•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 4) 침략전쟁기의 종교 이용·탄압정책(1931∼1945)

4) 침략전쟁기의 종교 이용·탄압정책(1931∼1945)

 1920년대 말에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재개된 대륙침략 정책으로 1931년 9월 만주침략을 도발하면서 그들의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精神敎化運動’과 종교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그 일환으로 기독교계 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조선총독부는 다시 적극적인 신사정책과 종교 통제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후임으로 1931년 6월 17일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는 일본에서 1924년부터 5년 동안이나 5개 내각의 육군대신을 역임한 신흥군벌로서 ‘昭和軍閥의 시조’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243)宮田節子,≪朝鮮民衆과 ‘皇民化’ 政策≫(일조각, 1997), 190쪽. 그는 부임에 앞서 일본 천황을 찾은 자리에서 “조선통치에 관해서는 대체로 전임자의 방침을 계승해 갈 예정”이지만, “내지인과 조선인의 융합일치 이른바 내선융화가 더욱 큰 진전이 있도록 노력”하고 “조선인에게 적당히 빵을 주도록 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244)宮田節子, 위의 책, 204쪽. 그의 이른바 ‘내선융화’란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평등한 가운데서의 조화가 아니라 조선인을 보다 더 일본인에 가깝게 만들겠다는 것으로 동화 내지 일본화정책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그의 정책발상은 1932년부터는 ‘정신교화운동’의 강화로, 1935년 이후에는 ‘심전개발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2년부터 ‘정신교화운동’ 내지 ‘사회교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그 해 2월 사회과를 내무국에서 학무국으로 이관하고, 학무국 종교과 업무를 흡수하여 담당하게 하였다.245)≪朝鮮總督府官報≫, 1932년 2월 13일,<조선총독부훈령 제13호>. 그리고 그 해에 추가예산으로 ‘社會敎化費’를 편성하고 그 해 9월부터 그 계획 수행에 착수하여 각 도지사에게 통첩을 보내 긴급히 조사하게 하여, 1933년 2월 이른바 紀元節에 “全道에 걸쳐서 우량부락·지방개량단체·청년단체의 산업시설 및 체육시설, 부인단체의 사업 등에 대하여 장려 조장”의 의미로 보조금을 교부하게 하였다.246)≪朝鮮≫(1933년 3월호), 153∼154쪽. 그리고 우가키 총독은 1932년 11월 10일 이래 이른바 ‘국민정신 작흥에 관한 조서 봉독식’을 전국에 걸쳐 거행하게 하고 그와 관련된 ‘교화시설’들을 갖추게 하여 ‘정신교화운동’ 내지 ‘사회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247)朝鮮總督府, 앞의 책, 891∼894쪽.

 우가키 총독은 1935년 1월 10일 部局長會議에서 “①精神作興, 自力更生 기타 전년이래 착수한 일은 신년과 함께 크게 박차를 가하여 촉진을 도모할 것, ②겸하여 희구하고 있는 心田開拓에는 금년에는 다시 몇 걸음을 진전시키고 싶다”는 등의 훈시를 하였다.248)≪宇垣一成日記≫2(東京:みすず書房, 1970), 990쪽, 1935년 1월 16일 일기. 이로 보아 그는 이른바 ‘心田開發’을 정신교화운동의 일환으로 그 전해부터 추진하였으며, 193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를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참여관 및 각 방면의 말을 들어보아도 결국은 神(神道)·儒(유교)·佛(불교)·耶(기독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해야 할 것으로 感知된다. 敬神崇祖의 高潮, 神社의 建設, 그것의 參拜獎勵, 승려의 소질 개선, 불교의 가두 진출, 사찰재산의 정리, 儒道의 부흥, 명륜학원 및 문묘의 활동 등을 당장 착안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억압받아왔던 불교를 정치적으로 살려가는 것이 크게 고려해야 할 요건이다.”249)위의 책, 997쪽, 1935년 1월 30일 일기.

 그리고 결국 이것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시대에 들어서는 ‘황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조선인에게 적당히 빵”을 주는 정책은 일제의 노골적인 수탈로 인한 조선인의 반발을 잠재우고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으로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농촌진흥운동’ ‘농공병진정책’으로 나타났다. 우가키 총독의 통치 목표는 “어떠한 사태에 직면해도 절대적으로 ‘모국 일본’을 배반하지 않는 ‘식민지 조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250)御手洗辰雄 編,≪南次郞≫(生活の友社, 1957), 212쪽.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이른바 ‘정신교화’ 내지는 이데올로기 교육의 확대·강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비상시국임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각종 시책을 마련하여 교육계·종교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강제로 실시하였다.

 1936년 8월 5일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조선군사령관(1929)과 육군대신(1931), 관동군사령관 겸 만주국 특명전권대사(1934)를 역임했던 인물로 한국인에 대한 정신적 테러라고 할 수 있는 ‘동화정책’의 극단적인 형태인 ‘황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선통치의 2대 목표는 자신의 임기 안에 천황을 내방하도록 하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이었다.251)김승태,<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조선총독 10인≫, 가람기획, 1996), 183∼191쪽.
御手洗辰雄 編, 위의 책, 참조.
그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조선인을 모두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학교는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 미나미 총독 재임시기에 극단적인 종교탄압과 통제가 이루어져, 기독교계 학교들은 대부분 폐교되고,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를 포기하고 귀국하거나 추방되었다. 총독부는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 및 일반 종교계에 대한 탄압과 함께 신사의 설립과 신사신앙을 적극 장려하였다. 1933년 총독부 내무국장은<神祠 창립에 관한 건>과<神祠 부동산 등기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각도에 보내 신사의 성립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게 하고, 같은 해 9월<토지수용령>제2조의 “토지를 수용 또는 사용할 수 있는 사업”의 제2항을 “神社, 神祠 또는 관공서의 건설에 관한 사업”으로 개정하여 ‘神社·神祠’를 지을 때도 토지를 강제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5년 4월 우가키 총독은 각 도지사와 관·공·사립 학교장들에게 훈령을 보내 “지금 내외의 정세를 생각건대 刻下의 急務는 日本精神을 作興하고 국민적 교양의 완성을 기하여… 존엄한 國體의 本義를 明徵하고 이를 기초로 교육의 쇄신과 진작을 도모”하는 것이니 힘써 그 임무를 달성하라고 지시하였다.252)≪朝鮮總督府官報≫, 1935년 4월 16일,<조선총독부 훈령 제14호>. 이어 5월에는 정무총감도 각 도지사에게<學校에서 敬神崇祖의 念 涵養 施設에 關한 件>이라는 통첩을 하여 학교교육에서 ‘敬神崇祖’라는 神道 내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위한 가미다나(神棚)의 설치를 독려하였다.253)朝鮮神職會 編,≪朝鮮神社法令輯覽≫(帝國地方行政學會 朝鮮本部, 1937), 353∼355쪽.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도 총독부 학무국장이 각 도의 도지사에게<學敎職員의 敬神思想 徹底에 關한 件>이라는 통첩을 내려보내 학교직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앞장서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 神社·神祠의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고, 신사를 중심으로 한 행사나 참배자수도 해마다 급증하였다.254)김승태,≪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다산글방, 1994), 132∼139쪽.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신사숭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1936년 8월 1일 천황의 칙령으로 조선신사제도를 전면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神社·神祠가 社格에 따라 道·府·邑·面으로부터 神饌幣帛料供進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일부 신사에 대해서는 사격을 높여 더욱 신사의 관공립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1면 1신사 정책’을 추진하여 전국 각지에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였던 것이다.255)≪每日申報≫, 1936년 8월 2일,<조선신사제도 개정에 취하야>.
岩下傳四郞 編,≪大陸神社大觀≫(1941), 102∼154쪽.
뿐만 아니라 파출소·주재소 등 관공서나 학교에 神宮大麻를 넣어두는 簡易신사라고 할 수 있는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더니, 마침내 관할 행정기구들을 통하여 일반 민가에까지 신궁대마를 강매하고, 가미다나를 설치하여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종교계를 더욱 철저히 통제하여 전쟁 협력에 이용하고, 이에 거슬리는 종교 단체나 개인에 대하여는 가차없이 탄압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는 그 때까지 법령이나 종교계 지도층의 회유를 통한 간접 통제의 방식을 버리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 종교단체나 개인들에게까지 직접적인 강압과 통제·탄압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의 일본 제국의회 보고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당국의 지도로 조선 각 종교단체 및 유사종교단체들은 시국의 중대함을 적시하였다. 따라서 신도와 일반 민중을 열심히 지도하고 거국 일치로 후방에 봉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보국의 성의를 보였다. 따라서 황군의 무운장구와 전승기원, 사상자 위령제, 혹은 국방헌금으로 출전한 장병과 가족들을 위문하는 등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朝鮮總督府警務局,≪朝鮮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1938, 51쪽).

 교파신도는 불교·기독교와 함께 공인종교이기는 하였지만, 총독부의 적극적인 옹호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이 미약하여 천리교 이외에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 초기부터 조선총독이 장악하였던 불교계는 “사격에 따라 열심히 후방 수호에 전념”하고 “경성에 있는 불교중앙교무원의 통제 아래 활동을 계속해서 일본인측 불교 각파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일제당국은 “조선에 있는 불교의 각 宗 연합회에서는 사변 직후 경성부에 있는 18개 사찰의 대표자가 협의회를 갖고 총독의 훈시에 따른 일치 협력과 후방 원호를 결의하였다. 이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 협력하여 전사자 慰靈追弔法會와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각 사찰에 위문비 건립 헌납을 독려하는 등 시국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다. 동시에 각 종파에서도 각각 본산의 유달 훈시를 받들어 사격에 따라 총후의 적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여 만족스런 평가를 하고 있다.

 중일전쟁 후 사상통제와 종교단체의 이용·통제는 유교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경학원을 비롯해서 각지의 향교·문묘에서 매월 1일과 15일에 유림들을 모이게 하여 서원문을 낭독하고, 일본 황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각종 시국 강연회, 좌담회를 개최하게 하고, ‘국방 헌금’, ‘군대 위문’에 관한 시가 등을 작성하게 하였다. 이러한 유교계에 대하여 총독부는 “유도는 오로지 당국의 지도에 의해서 경학원과 대동사문회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의 유림들에게 분기를 촉구”하여 “유림계도 점차 시국의 중대성을 깨닫고 당국의 지도에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총독부는 1939년 가을에 조선유도연합회를 조직하게 하여 ‘국민총력동원운동’의 한 조직으로 활동하게 하고 지방에도 유도연합회와 유도회를 조직하게 하여 ‘황도유학’을 부르짖고, 일제의 전시체제에 협력하도록 독려하였다.

 1930년대에 총독부가 가장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 탄압한 종교계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계였다. 1930년대 이전의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한국을 식민지화하던 과정에서나,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립해 가던 과정에서는 일본이 서구 제국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이들을 후대하여 회유·이용코자하였기 때문이다.256)강동진, 앞의 책, 71∼111쪽.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영·미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외부의 지지 없이도 식민지 경영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선교사는 오히려 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차츰 선교사들을 적대시하여 한국교회와 분리시키려는 분열정책과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그들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이미 그들의 통제에 순응하는 일본기독교에 예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신사참배문제는 결정적인 탄압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1930년대 선교사 경영의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가 문제화되자, 일제는 이를 선교사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 ‘頑迷한 외인 선교사’라 비난하면서 반선교사 여론을 부추겼다.257)≪京城日報≫, 1938년 9월 14일,<頑迷한 外人宣敎師團側이 神學校의 廢敎聲明>.
≪朝鮮新聞≫, 1938년 9월 15일,<頑迷 外人宣敎師 神社參拜에 抗議>.
한편, 1920년대 이후 선교사들의 교권적 횡포에 염증을 내어 일어난 이른바 ‘조선적 기독교’의 수립을 표방하던 한국교회내의 자생적인 반선교사운동까지 부추기면서, 한국 교회와 선교사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져 각 노회·총회에 압력을 가하여 선교사들의 활동을 배제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분열 공작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와 교육활동과 선교활동이 부진하게 되었고 겨우 의료활동에서만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활동마저 1940년부터 탄압을 받아 대부분의 기독교병원이 문을 닫았다.258)G. T. Brown, Mission to Korea, p.161. 뿐만 아니라 미·일 관계의 악화로 점차 모든 외국인들을 敵性 적국국민으로 취급하여 감시·탄압하였고, 일부 선교사들은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1940년 10월 일본의 미국에 대한 戰意가 표면화되자,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철수하였다.259)H. A. Rhodes & A. Campbell,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Vol. 2, p.18. 이후까지 남아있던 몇몇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억류되어 갖은 탄압을 당하다가 1942년 포로 취급을 받아 일본인과 교환되었다.260)H. A. Rhodes & A. Campbell, 위의 책, p.24.

 이와 같이 기독교계에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킨 일제는 기독교계에 대한 예속과 통제를 강화하여 그들의 통치에 이용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굴복한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포섭하여, 소위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이라 하여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종교보국’이라 하여 전쟁협력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문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938년 2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一. 당국의 지도 실시 때에 그것을 즐기지 않는 頑迷한 교도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계 법규(행정집행령, 경찰범 처벌규칙 기타)를 활용하여 합법적으로 조치할 것, 一.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의 신건설운동에 대하여는 그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목적이 순진하고 장래 성과가 예상되는 것에 대하여는 이때 적극적으로 원조하여 줄 것” 등 대책을 마련하여261)朝鮮總督府警務局,≪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1938), 390∼391쪽.,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른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1940년에 일제 검찰이 마련한 다음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으로 보다 강화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

지도의 근본 방침:물심 양면에 걸친 조선 기독교의 구미 의존 관계를 금절하여 일본적 기독교로 순화 갱생하게 할 것.

 1. 물질적 방면에 대한 지도

1) 외국인 선교사회가 경영하는 교육기관 기타 각종 사회사업을 점차 접수할 것.

2) 외지 전도국에 대한 재정적 의존 관계를 차단하고 내선 기독교에 의한 재정의 자립을 촉진시킬 것.

 2. 정신적 방면에 대한 지도

1) 교역자 양성 기관에 대한 학무국의 지도 감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

2) 각 파에 상설적 집행기관을 설치하게 하여 감독 지도의 철저를 기할 것.

3) 성서·찬송가에 대하여 재검토를 가할 것. 아울러 일요학교 교과서 기타 각 파의 출판물에 대하여 엄중하게 단속을 할 것.

4) 각 파의 敎憲·敎規를 재검토하여 적정한 개혁을 하게 할 것.

5) 현재 경영 중인 각 파의 기관지에 대하여 그 편집 내용에 적극적인 지도를 가하여 국체관념의 함양과 시국인식을 철저하게 하도록 개선하고 널리 각 교도에게 구독하게 할 것.

6) 신사참배의 철저

(1) 일반 민중의 신사참배에는 교도도 반드시 참배하게 할 것.

(2) 기독교계 경영 학교 직원 생도는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신사에 참배하게 할 것.

7) 교도는 각 집에 국기를 구입하여 갖춤과 동시에 교회당은 국기 게양탑을 설치하고 축제일 기타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게 할 것.

8) 집회시에는 반드시 다음의 행사를 실시하게 할 것.

(1) 4대절 기타 이유가 있는 의식을 거행할 때에 국가의 봉창.

(2) 궁성요배.

(3)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9) 국체와 아울러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하여 강연회·좌담회 등을 개최 할 것.

10) 각 파를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게 할 것.

11) 교도는 될 수 있는 한 청년단·방공단 또한 애국부인회·국방부인회·애국여자단 등에 가입하게 할 것.

12) 祖先崇拜 관념의 양성을 조장하고 기독교의 조선숭배 배격의 잘못을 깨닫게 할 것.

13) 국체에 순응하는 기독교 재건의 자각에 기초한 운동에 대하여 이를 견제 또는 저해하는 것 같은 장애를 제거할 것.

14) 외국선교사에 대한 지도 단속을 강화할 것.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思想彙報≫제25호, 1940년 12월, 81∼101쪽).

 위의 두 자료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 간의 상황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기독교에 대한 정책의 명칭부터 앞의 것은 ‘지도 대책’이요, 뒤의 것은 ‘지도 방침’으로 ‘대책’에서 보다 확고한 ‘방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도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훨씬 상세하고 강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자료의 내용상 강요나 상세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근본적인 의도가 기독교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강화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정책은 모두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억압하여 서구 선교사와의 관계를 끊게 하고 고립시켜 일제의 황민화정책 및 침략전쟁 수행에 순응·협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일본적 기독교’라 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까지 변질시켜 기독교를 그들의 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충실히 순응·협력하는 일종의 어용 교화기구로 삼으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심지어 일제의 패전 직전에 일본 군부 지도부는, 연합국군의 공격시 한국 기독교인들이 연합국을 도와 줄 것을 두려워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을 1945년 8월 중순경에 학살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262)한석희 저, 김승태 역,≪일제의 종교침략사≫(기독교문사, 1990), 185쪽.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탄압·통제정책은 전시체제와 함께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미나미 총독이 1938년 10월 7일 제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와 1938년 10월 17일 시국대응 기독교장로회 대회에서 한 다음과 같은 연설에서도 분명하게 예고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일본)는 동양 평화 옹호의 대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총동원하에 시국에 대처하고 있는 때인데 대일본국민인 자는 그 신앙하는 종교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제히 천황폐하를 존숭하여 받들고 선조의 神祇를 숭경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바로써 信敎의 자유는 대일본국민인 범위에서만 용인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황국신민이라는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종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 그 존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비상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국민으로서 힘써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아시고 이른바 종교보국의 길에 매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朝鮮總督府 官房文書課 편,≪諭告·訓示·演述總攬≫, 朝鮮行政學會, 1941, 707쪽).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공인종교라고 하는 일반 종교계에 대해서는 이러한 탄압·통제·이용정책을 쓰는 한편, 민족적 색채가 농후하고 이용가치가 적은 비공인 종교였던 신종교들에 대해서는 더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총독부가 ‘종교유사단체’로 지칭한 신종교들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1935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탄압은 주로 총독부 사회과와 일제 경찰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총독부 사회과에서는 이에 대한 단속방침을 마련하기 위하여 1935년 6월 10일부터 2일간 ‘종교유사단체 취체회의’를 소집하고 있다.263)≪每日申報≫, 1936년 6월 9일, 社說<宗敎類似團體 取締會議>. 같은 시기에 경기도에서도 도미나가 분이치(富永文一) 지사와 사에키 아키라(佐伯顯) 경찰부장 등 10여 명이 회합하여 총독부 방침에 준하여 관내 사찰 정화에 관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 본토에서도 그 무렵 ‘종교경찰’을 두고 대본교 탄압에 들어감으로써, 조선총독부 경찰도 같은 종교단체의 조선 지부의 검거 탄압에 착수하여 1936년 4월 10일 이 단체를 해산시켰다. 일본 내무성에서 1935년이래<사교취체에 관한 건>에 의해 ‘國體明徵’과 ‘邪敎一掃’라는 명분으로 종교탄압을 통하여 국민사상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방침을 조선총독부도 그대로, 아니 보다 더 가혹하고 충실하게 추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단체와 종교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더욱이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는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고, 이로 인한 종교단체 및 종교인에 대한 검거와 처벌 사건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에 검거되어 탄로 난 白白敎 사건은 일제의 종교탄압의 좋은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어 1938년 4월에는<보안법>위반 혐의로 충남지역에서 정도교의 교주가 검거된 것을 비롯해서 같은 해 8월에는 성도교와 전북지역의 황극교가<보안법>및<치안유지법>위반혐의로 검거되어 기소되었다. 이 밖에도 수운교·무극대도교·흠치교·천도교 구파·태극교 등이<치안유지법>·<보안법>등 위반혐의로 대거 검거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물론, 당시 조선 민중의 종교적 정서를 대변하던 신종교 종파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 단체와 종교인들을 국체변혁·불경·<치안유지법>위반·<보안법>위반·<군형법>위반 등의 이유로 검거하여 처벌하였던 것이다. 1940년 10월 당시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장이던 마스나가 쇼이치(增永正一)가 사법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다음과 같은 훈시는 그들이 어떤 시각에서 종교단체들을 보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 어떤 탄압정책을 마련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종교단체 단속에 대하여

사변이래 반도의 기독교 기타 종교단체 관계자로서 불경<치안유지법>·<보안법>혹은<군형법>위반 등의 죄로 인하여 검거 처벌된 자가 잇따르고, 현저히 총후의 치안을 문란케 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반도의 각 종교운동은 대개 민족의식의 색채가 농후하여 순종교운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정치운동 내지 사회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 많고, 반도 정치상 많은 불상 사건에 관련된 것이 많다는 것은 일찍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로써, 총후 치안확보의 요구가 가장 절실한 현시국 하에서 이들 종교단체에 대한 단속은 하루라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 전 번에 경기도 경찰부에서 검거한 등대사 사건은 주목할 만한 사안으로서 수사의 결과에 의하면 통치권의 주체를 부정하고 국민의 국체관념을 혼란시키며 이에 편승하여 지상 신의 나라의 건설을 기도하는 불경·불령의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결사라는 것이 명백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전 달에 전조선적으로 일제히 검거를 감행한 신사불참배를 표방하는 장로파 기독교도의 불온 사건은 현재로서는 아직 그 전모를 밝힐 수 없지만 혹은 이들 관계자가 품고 있는 사상경향은 등대사 관계자 등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이 취조에 대하여는 심심한 주의를 기울여 사안의 본질 규명에 만에 하나라도 유감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불경·불령의 목적을 가진 종교 단체의 운동은 그 害가 일반 좌익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단체에 대하여는 더 한층 엄밀한 査察·內偵을 가하며 특히 그 이면 행동에 주의하고 모름지기 법에 저촉되는 불온한 언동을 발견할 경우에는 속히 검거 탄압을 가하는 동시에, 신앙은 한번 그것을 맹신하는 경우에는 포기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기 때문에 검거 후라도 일반 교도의 계몽 지도와 병행하여 사찰의 손을 늦추어서는 안 되며, 사안의 재발 방지에 만전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반도 재래의 유사 종교단체의 단속에 대하여는 이미 작년도 본 회의 석상에서 여러분들에게 유의하도록 한 바 있습니다만, 보천교 기타는 이미 탄압에 의하여 괴멸되고 교단 관계자가 지하에 잠입하여 재건운동을 기도하고 있는 외에 호남 방면에서 급격히 교세를 신장하고 있는 불교연구회와 같은 신흥 유사종교단체의 최고 간부가 불경죄로 인하여 처벌받은 사안 등이 발생하고 합법적 단체의 교리·교설 내지 이면의 사상 동향에 대하여도 재검토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니, 거듭 유사종교단체에 대한 단속에 여러분의 유의를 환기시키는 바입니다(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思想彙報≫제25호, 1940년 12월, 2∼3쪽).

 이러한 조선총독부 검·경찰의 종교탄압 정책에 의해 검거되어 기소된 중요한 사건만 들어도 다음<표 1>과 같다.

사건명 검거인원 기소인원 검사국 및 기소일 비 고
동우회사건 181 42 경성, 1937. 8. 20 기독교인
등대사사건 66 33 경성, 1940, 6. 23 여호와의 증인
황극교사건 89 10 전주, 1938. 12. 23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
68 35 평양, 1942. 3. 12 기독교인
神人동맹사건 42 28 전주, 1942. 4. 11  
무극대도교사건 52 30 경성, 1942. 8. 17  
동아기독교회사건 32 9 함흥, 1943. 5. 24 침례교
삼산교 사건 36 17 전주, 1943. 6. 10  
천자교 사건 36 17 전주, 1943. 6. 16  
仙敎사건 38 9 전주, 1943. 6. 28  
640 230    

<표 1>종교인 관련 주요 사상사건 경과 (1943. 9월말 현재)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편,≪思想彙報續刊≫, 1943, 1∼13쪽,<朝鮮重大思想事件 經過表>에서 정리.

 그러나 1939년에 제정되어 1940년 4월부터 발효된<종교단체법>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는 여러 가지 추측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되기까지 발효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조선에는 이미 각종 종교단체에 관한 구체적인 제반 법규가 정비되어 있었고, 이미 1915년에 제정 공포된<포교규칙>과 그 밖의<치안유지법>·<보안법>등으로도 충분히 총독부가 종교단체를 통제하여<종교단체법>이 의도한 효과를 이미 거두고 있어 별도의 법규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종교단체법>을 적용하지 않고도 일제는 종교단체를 통폐합시키고, 교리와 종제까지 변경시키는 등 갖은 통제와 탄압을 할 수 있었으며, 성결교·안식교·동아기독교(침례교)와 같이 교회를 폐쇄하고 교단을 해산시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金承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