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2. 천도교·대종교
  • 1) 천도교
  • (1) 천도교의 창시

(1) 천도교의 창시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후, 관군의 수색과 추적이 심화되자 동학지도부는 산골로 피난을 다녀야만 하였다. 당시 동학지도부는 제2세 교주 崔時亨의 지도 아래 金演局·孫秉熙·孫天民이 삼두체제로 동학교단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2세 교주인 최시형이 1898년 관군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손병희는 1900년 교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의 심복 李容九가 1897년부터 1900년 사이에 서북지방에 포교를 벌인 결과 입교한 수만 명의 서북지방 교인들이 그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264)조규태,<舊韓末 平安道地方의 東學-敎勢의 伸張과 性格에 대한 檢討를 중심으로>(≪東亞硏究≫21, 1990), 58∼59·72∼78쪽.

 교권을 장악한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뼈저린 경험과 아울러 개화사상이 발달한 서북지방의 교인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1901년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에 망명하여 있던 개화파 인사인 趙羲淵·權東鎭·吳世昌·梁漢黙·朴泳孝·李軫鎬 등과 접촉하였다.265)邢文泰,<1904·1905年代 東學運動에 대한 一考察-一進會·進步會를 中心하여>(≪史學論志≫4·5합집), 66∼67쪽.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조된다.
姜成銀,<20世紀初頭における天道敎上層部の活動とその性格>(≪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7).
金炅宅,<韓末 東學敎門의 政治改革思想 硏究>(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90).
이은희,<동학교단의 ‘갑진개화운동’(1904∼1906)에 대한 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90).
崔起榮,<韓末 東學의 天道敎로의 개편에 관한 검토>(≪韓國學報≫76, 1994).
조희연·권동진·오세창은 갑오경장을 추진한 주역이었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에 망명하여 재기를 꾀하고 있었고, 손병희는 포교의 자유와 조선정부의 정치적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으므로, 두 집단의 제휴는 쉽게 이루어졌다. 손병희는 이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진화론·문명론에 입각한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일본에서<三戰論>(1903)·<明理傳>(1903)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생각을 동학교단에 알리고 교인들의 태도 변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군인 및 정치인과 접촉하여, 러일전쟁 기간 중인 1904년 大同會·中立會·進步會 등을 설립하여 民會運動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4년 12월 진보회와 일진회의 합동으로 세력을 강화하고 일본의 도움을 얻어 입헌군주제의 실시와 조세제도의 개혁 등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을 이루려 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 一進會를 이끌던 손병희의 심복 이용구가 일본의 ‘大東合邦論’을 순수하게 믿고, 1905년 11월 5일<보호청원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보호청원이 있은지 약 2주일 뒤인 11월 17일<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국내에서는 의병들을 중심하여 反一進會運動과 反東學運動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동학교도들이 의병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동학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손병희는 1905년 12월 天道敎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敎會分離運動’, 즉 일진회와 천도교의 분리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진회 활동을 지속하던 교구장을 해임하였으며 이용구 등 60여 인을 출교시켰다. 출교당한 이용구 등이 侍天敎를 만들고 동학교단의 주요 재산을 독점하자, 천도교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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