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2. 천도교·대종교
  • 1) 천도교
  • (3) 3·1운동의 주도와 임시정부 수립 활동

(3) 3·1운동의 주도와 임시정부 수립 활동

 천도교에서는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최 린·권동진·오세창 등의 간부들이 독립의 기회임을 깨닫고 그 방법을 논의하였다. 상해로부터 신한청년당의 밀사가 다녀가고 일본의 동경으로부터 밀사가<2·8독립선언서>의 원고를 갖고 오자, 천도교의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 린 등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월 20일경 이들은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 ②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 ③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의 세 원칙을 마련하였다.269)신국주,<3·1독립선언>(≪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226∼227쪽.
朴賢緖,<三·一運動과 天道敎界>(≪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 東亞日報社, 1969), 223∼234쪽.

 천도교에서는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기 위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작정하고, 2월 초 崔南善의 중재로 정주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李昇薰을 통하여 기독교계와 연합전선을 맺는 것을 추진하여 기독교계로부터 참여 약속을 받았다. 또 최 린이 2월 24일 韓龍雲을 방문하여 불교계의 참여를 요청하고 승낙을 받았다.

 민족대표 33인을 선정하였는데, 천도교측 인사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林禮煥·羅仁協·洪基兆·양한묵·權秉悳·金完圭·羅龍煥·李鐘勳·洪秉箕·李鍾一·崔 麟·朴準承의 15명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의 16명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다. 천도교인들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대고<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주관하였다. 천도교의 오세창이 총책임을 맡고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실무를 전담하여 보성사에서 2만여 장의 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이처럼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안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황해도 수안, 함경남도 단천 등지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살해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또한 천도교인들은 서간도·북간도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그 지역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군비단 등의 무장투쟁단체에 참여하였다.

 한편 천도교회는 1919년 3·1운동의 추진과 함께 소위 ‘大韓民間政府’라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270)愼鏞廈,<대한민국임시정부와 지도자의 역할>(≪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도산사상연구회 제8회세미나발표문, 1997), 3∼5쪽.
고정휴,<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제기>(≪제40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97), 141∼144쪽.
그렇지만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거나≪조선독립신문≫의 발간에 관여한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이것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천도교인인 申 肅과 安尙德 등은 漢城政府의 수립에도 관여하였으며,271)李賢周,<3·1운동 직후 ‘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수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6, 1997). 일부의 천도교인들은 조선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선포에 관여하였다.272)李炫熙,<大韓民國臨時政府의 樹立計劃과 天道敎>(≪韓國思想≫20, 1985).
潘炳律,<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韓國學報≫46, 1987).
고정휴, 앞의 글.
―――,<3·1운동과 天道敎團의 臨時政府 수립 구상>(≪韓國史學報≫34, 1998).
이현희는 노령임시정부를 대한국민의회가 조직한 것으로 보고 있는 데 반하여, 반병률은 대한국민의회가 노령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다고 논증하였고, 고정휴는 이것을 발전시켜 노령정부가 대한민간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단정부라고 보았다.
그리고 천도교의 중간 지도자인 남형우는 노령으로 망명하여, 이승만계의 인물을 비롯하여 안창호계·이동휘계·일본유학생계 인물과 접촉을 갖고 노령정부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성정부는 활동이 용의치 않았고, 노령지역은 백군과 적군과의 내전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활동이 자유로운 상해지역이 임시정부의 적합지로 부상하였고, 각지의 민족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였다. 이것과 짝하여 천도교인인 南亨祐와 洪 濤·李瑛根(李民昌) 등도 상해로 망명하였다.273)조규태,<天道敎團과 大韓民國臨時政府>(≪한국민족운동사연구≫23, 1999) 참조.

 이들은 국내의 한성정부에 참여한 천도교인과 접촉을 가지면서, 천도교의 정치조직으로 統一黨을 결성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여하여 행정부의 관리와 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낮았고 따라서 천도교인의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그런데 1919년 9월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평북 의주대교구장 최석련과 선천대교구장 이군오의 명을 받은 崔東旿·신 숙 등 많은 인물들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聖化會를 조직하여 내부적 결속을 다지면서 다른 정치세력과의 제휴를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인력과 자금의 양 측면에서 국내의 중앙총부와 지방의 천도교인들로부터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결국 상해지역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한계를 노정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내에서의 천도교단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3·1운동시의 지대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李承晩 정권에서 미미한 대우를 받자, 천도교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승만 정권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마침 1920년 말에서 1921년 초 이승만 정권이 위임통치를 주장한 사실이 알려지고, 일본의 간도출병으로 고통을 겪는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군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자, 각지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신 숙이 중심이 된 천도교인들은 통일당을 새롭게 정비하고, 북경의 박용만·신채호와 접촉을 갖고 1921년 4월 北京軍事統一會議를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임시정부의 개혁과 의정원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또한 1921년 중엽 북경지역의 신 숙·姜九禹 등의 천도교인들은 상해지역의 천도교인들과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천도교인의 영향력을 향상하기 위하여, 북경에 전교실을 세우는 명목으로 국내로부터 합법적으로 자금을 들여왔다. 국내에서는 이종린 등이 북경교당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지원하였다.

 1923년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천도교단은 만주 혹은 노령에 새롭게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창조파 등의 분열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그러자 신 숙·강구우 등의 천도교인들은 노령의 尹 海 및 元世勳과 연계하여 1923년 6월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노령에 정부를 창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24년 초에는 노령으로 이동하여 이것을 관철하려 하였으나, 노령의 이동휘파와 이르크츠크파와의 갈등과 러시아의 지원약속 불이행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이후 천도교인들은 다시 북경에 집결하여 교회활동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5년 중반 민족협동전선운동이 본격화될 때 북경지역의 천도교인들은 대외연락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농민사의 크레스틴테른 가입을 주선하면서, 천도교 신파와 이동휘계 공산주의자와의 협동전선의 결성을 지원하기도 하였다.274)조규태,≪1920年代 天道敎의 文化運動 硏究≫(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98), 158∼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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