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2. 천도교·대종교
  • 2) 대종교
  • (1) 대종교의 중광과 그 배경

(1) 대종교의 중광과 그 배경

 大倧敎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弘巖 羅 喆에 의하여 重光되었다. 나 철은 본명이 羅寅永으로 1863년 전남 樂安郡 南山面 錦谷里(현재 寶城郡 筏橋邑 七洞里 錦谷부락)의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1세 때인 1883년경 서울에 올라와 金允植의 문인이 되었고, 1891년 大科에 장원한 후 承政院 假注書·兵曹司正·承文院 副正字의 직을 거쳐, 1893년 10월 史官에 임명되었으나 낙향하였다. 그리고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도에서 유배된 스승 김윤식의 외로움을 달래며 함께 머물렀다.

 그는 1901년 서울에 올라와 국제공법과 한·일 간에 체결된 약장의 준수를 호소하는 민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 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으려 하자, 1905년 8월 李 沂·吳基鎬 등과 渡日하여 일본의 천황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전해줄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이<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주권을 빼앗자, 1907년 2월 서울 및 전라도지역의 전·현직 관리로 구성된 自新會를 조직하고, 을사5적의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준비 미비 및 행동대의 미숙으로 실패하였다. 1907년 4월 1일 平理院에 자수하여 유형 10년을 언도받고 智島에 유배되어 있던 그는 1907년 12월 隆熙皇帝의 특사로 석방되었다.291)朴永錫,<大倧敎의 民族意識과 民族獨立運動>(≪日帝下獨立運動史硏究≫, 一潮閣, 1984).
金東煥,<己酉重光의 民族史的 意義>(≪국학연구≫1, 1988).
박 환,<羅喆의 人物과 活動>(≪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그는<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과 1907년의 군대해산과 고종의 퇴위를 지켜보면서, 자주의식과 민족의식 같은 국권회복의 정신적 기초를 신앙을 통하여 수립하기 위하여, 1909년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고려 元宗 때의 몽고침입 이후 민간신앙으로 전해 내려오는 단군신앙을 다시 끌어내어 ‘檀君大皇帝神位’를 모시고,<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고 檀君敎를 중광하였다.292)朴永錫, 위의 글, 250쪽.
金東煥, 위의 글, 90∼92쪽.

 그러나 단군교란 명칭이 일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종교로 이해될까 염려하여, 나 철은 1910년 8월 5일 ‘단군교’란 이름을 폐지하고 ‘대종교’란 이름을 사용하였다.293)金東煥, 위의 글, 94쪽. 그가 대종교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교리적으로 大는 한, 倧은 검이므로, 大倧이란 한검, 즉 박달임금을 뜻하는 檀君이란 말과 같으므로 大倧敎를 敎名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단군교 중광의 주역이었던 鄭薰模가 일본에 의탁하여 교세의 신장을 기도하는 등 친일화 하자 이와 결별하고294)李康五,<檀君信仰의 實態分析>(≪정신문화연구≫32, 1987), 65쪽. 독자적으로 대종교를 創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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