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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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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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대종교
  • (2) 대종교의 확산과 조직의 정비

(2) 대종교의 확산과 조직의 정비

 대종교를 창시한 나 철은 서울에 南道支司 및 北部지사를 설치하고, 庚戌國恥 후인 1910년 10월 만주 북간도 三道溝에 지사를 설립하였다. 1911년 7월에는 다시 백두산 北鹿 靑波湖에 대종교 總本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삼도구에 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道敎區를 설립하였다. 동도본사는 汪淸縣, 서도본사는 上海, 남도본사는 서울, 북도본사는 노령에 두었다. 동도본사의 책임자는 徐 一, 서도본사의 책임자는 李東寧·申圭植, 남도본사의 책임자는 姜 虞, 북도본사의 책임자는 李相卨이었고, 나 철은 남도본사에 머무르며 전반적인 교무를 관장하였다.

 특히 나 철은 金敎獻 등으로 하여금 교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리하여, 김교헌의 주관으로 1914년≪神檀實記≫·≪神檀民史≫·≪檀奇古史≫가 저술되었으며,≪三一神話≫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서적을 통하여 단군의 실존을 주장하고 고조선의 王系를 복원하였다.

 이처럼 나 철은 서울에 머무르며 교리를 정립하고 교구를 정비하며 포교를 확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宗敎統制案>을 반포하여 대종교를 불법화하자, 그는 1916년 8월 황해도 九月山 三聖祠로 은둔하였다가 8월 15일 사망하였다.

 나 철의 유언으로 2세 교주에 임명된 김교헌은 1917년 만주에 위치한 대종교 총본사에 부임하였다. 교주 취임 전 이미 많은 교리서를 발간한 바 있던 그는 부임해서도 민족종교에 걸맞게 교리와 儀式을 정비하고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종래의 사대주의사관을 탈피하여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많은 문헌을 저술하고 편찬하였다.295)朴永錫, 앞의 글, 261∼262쪽.

 그는 1922년 倧經會에서≪神話講義≫·≪神理大全≫·≪會三經≫·≪神事記≫·≪朝天記≫·≪神歌集≫등을 교열·간행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宗理問答≫·≪重訂神歌集≫·≪增剛倧禮抄略≫·≪國漢文三一神話≫·≪神聖大全≫등을 검정한 후, 施敎會에서≪國文懸吐神話講義≫·≪神理大全≫·≪神事記≫·≪會三經≫·≪國漢文神檀民史≫·≪倍達族彊域形勢圖≫등을 간행하여 이를 바탕으로 포교활동과 교세확장에 이바지하였다.296)朴永錫, 위의 글, 262쪽.

 이처럼 김교헌은 교리연구와 교사편찬에 주력하는 한편 포교활동에도 매진하여, 국내에 6개소, 만주지역에 34개소, 노령지역에 3개소, 중국 관내에 3개소, 총 46개소의 施敎堂을 설립하였다. 특히 1920년 일본의 간도 출병으로 대종교인이 많은 희생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에 34개소의 시교당을 설립한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1917년 연길·왕청현에 700여 명의 신자가 있었지만, 1925년 무렵 연길·화룡·왕청현에는 무려 2,100여 명의 대종교 신자가 있었다.297)千敬化,<大倧敎의 民族敎育運動에 관한 硏究>(≪白山學報≫27, 1983),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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