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2. 천도교·대종교
  • 2) 대종교
  • (3) 대종교의 독립운동

(3) 대종교의 독립운동

 대종교는≪神檀實記≫·≪神檀民史≫·≪檀奇古史≫등의 敎史를 발간하여 민족주의사관을 형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대종교는≪신단실기≫를 통하여 桓因·桓雄·檀君의 시대를 우리의 역사시대로 포함시키고, 만주에서 흥기한 遼·金까지도 국사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신단민사≫는 仙敎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문화사를 조명하여, 선교의 성쇠가 곧 국운의 성쇠와 연결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箕子朝鮮의 위치를 遼西의 永平·廣寧 일대로 비정하는 등 만주를 우리 고대사의 주요한 무대를 보았다. 이러한 대종교의 민족주의사관은 민족주의사학자인 박은식·신채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신단민사≫와≪倍達族彊域形勢圖≫등은 항일독립운동가를 양성했던 사관학교와 한인들이 세운 일반학교의 교재로 쓰이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298)李道學,<大倧敎와 近代民族主義史學>(≪국학연구≫1, 1988) 참조.

 또한 대종교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포교의 수단으로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2세 교주 김교헌 교주 시기인 1914년 화룡현 평강 상리사 삼도구에 靑一學校를 지었다. 또한 尹世復은 1911년 봉천성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東昌學校를 설립하고 李元植·李克魯 등과 함께 재만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윤세복은 1919년 7월 동창학교가 폐지되자, 1919년 7월 撫松縣으로 이주하여 白山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密山 當壁鎭으로 총본사를 이주하여 大興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35년에는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기고 다음해에 倧門學院인 大倧學院을 설립하고 초·중등부와 여자야학부를 병설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아울러 각지에 산재한 시교당에서도 강습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외에 왕청현에 설립되었던 昌東學校, 1933년 안희제가 동경성에 설립한 渤海學校도 대종교계 학교였다.

 대종교에서 설립한 학교에서는 교사진으로는 대종교 교주인 김교헌 외에 신채호·박은식 등 민족주의사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신단실기≫·≪신단민사≫의 敎史와<朝鮮上古史>·<夢拜金太祖傳>등 단군의 역사와 만주의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특별히 교수하였다.299)千敬化, 앞의 글, 103∼111쪽.

 대종교에서는 이러한 계몽운동뿐만 아니라, 1911년 3월에 왕청현에서 重光團을 조직하였다. 중광단은 단장 徐 一과 玄天黙·白 純·朴贊翊·桂 和·徐相庸 등이 참여한 무장투쟁을 지향한 단체였다.300)박 환,<北間島地域의 獨立運動團體-北路軍政署>(≪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92∼93쪽. 대종교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개조론이 주장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독립을 위한 열망에서 1918년경 소위<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하였다.301)朴永錫, 앞의 글, 270∼271쪽. 그리고 대종교인들은 1919년 3월 이후 龍井에서 개신교·천주교·천도교·공자교의 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조선독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독립만세운동 직후에는 大韓國民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1919년 5월 大韓正義團이 조직되자 이 대한정의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1919년 10월 吉林軍政司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北路軍政署를 조직하였다.302)박 환, 앞의 글(1991b), 98∼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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