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3. 불교
  • 2) 3·1운동과 불교계의 각성
  • (4) 불교전통의 회복

(4) 불교전통의 회복

 3·1운동의 영향으로 나타난 또 다른 파급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고수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도성출입금지 해제, 일본불교의 영향과 증대, 불교의 대중화 추구 등으로 인하여 점차 불교전통이 무시·배척당하였다. 불교의 개혁·유신이 중시되는 가운데 특히 일제가 한국불교의 전통을 파괴·위축시키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불교전통의 회복은 급선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禪學院의 창건이었다.326)선학원 및 선우공제회의 전모는 金光植,<일제하 禪學院의 運營과 性格>(≪한국독립운동사연구≫8, 1994)을 참고할 것. 1921년 11월 30일에 창건된 선학원은 전통불교 특히 선불교정신의 쇠퇴를 개탄하면서 항일의식을 소유하였던 일단의 승려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선학원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사찰령>의 구속을 피하려는 의식에서 나왔는데, 1922년 3월 말 선학원에서는 선풍의 진작과 전국 수좌들의 수행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禪友共濟會가 조직되었다. 각 지방 선원을 회원으로 하여 출범한 공제회는 선학원에 그 본부를 두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제회는 1924년경부터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어 直指寺로 그 본부를 이전시키기도 하였으나 1926년에는 중도 퇴진하였고, 선학원도 범어사 포교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전통의 회복과 유관한 움직임은 전통 講院의 부활이었다. 1915년 기존 강원이 지방학림으로 개편되면서 중단된 강원교육이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재건되었다. 이는 불교개혁의 대세에 의하여 밀려난 전통 및 구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백용성이 망월사에서 萬日參禪結社會327)<萬日參禪結社會 規則, 入會禪衆 注意事項>(≪佛敎≫15, 1925. 9), 42∼45쪽.를 1925년에 개최하였음도 바로 전통의 회복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 결사회의 지향은 禪과 律의 균형적인 입규로 나타났는데, 이는 일본불교의 침투 등으로 청정한 수행 풍토와 엄정한 계율이 무너져 가고 있었음에 대한 반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용성이 당시 승려들의 莫行莫食을 강력하게 비판한 심정도 바로 전통의 상실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백용성은 1926년 5월과 9월, 일제당국에 승려의 帶妻食肉을 금하여 달라는 건백서를 제출하였다.328)金光植,<1926년 불교계의 帶妻食肉論과 白龍城의 建白書>(≪한국독립운동사연구≫11, 1997), 201∼206쪽. 이는 당시 만연되어 가고 있었던 승려의 대처식육329)정광호,<韓國近代佛敎의 ‘帶妻食肉’>(≪한국학연구≫3, 1991), 96∼100쪽.을 차단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백용성의 이 제의는 총독부에서 수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는 그를 방관하였다. 더욱이 1927년 이후에는 대처 주지의 취임은 합법화되어 갔다.

 전통의 회복과 관련되어 나타난 것은 禪農佛敎의 실행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白鶴鳴과 백용성이었다. 백학명은 선농불교를 1923년부터 內藏寺에서 실행에 옮겼는데, 그는 불교 개신의 방안으로 半農半禪을 설정하였으며 승려들의 나태와 무노동을 강력히 비판하였다.330)安舟峰,<追慕白鶴鳴禪師>(≪佛敎≫62, 1929. 8), 53쪽. 백용성은 1927년부터 경남 함양의 백운산과 만주의 용정에서 선농불교를 실천하였다.331)金光植,<白龍城의 禪農佛敎>(≪大覺思想≫2, 1999), 73∼79쪽. 백운산에서 추진한 華果院과 용정에서 추진한 禪農堂은 그 예증이다. 특히 그는 화과원에서 인근 농민·신도들과 함께 이상적인 공동체를 실천하였는데, 그의 선농 실행은 승려의 自作自給과 禪律의 실천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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