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3. 불교
  • 3) 불교자주화의 시련
  • (1) 불교운동의 기반 구축

(1) 불교운동의 기반 구축

 1928년부터 본격화된 불교운동의 기반구축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불교계 내부의 자기 정비는 이후 1929년의 승려대회 개최의 성공과 불교계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최초의 대상으로 주목할 것은 구학계열의 학인들이 추진한 朝鮮佛敎學人大會였다.332)金光植,<朝鮮佛敎學人大會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1996), 348∼351쪽. 구학 중심의 講院敎育을 개선하려는 李靑潭·이운허 등 일단의 학인들이 주도한 그 대회는 1927년 10월 개운사에서의 대회 발기준비회에서 시작되어 1928년 3월 각황사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대회를 주도한 학인들은 학인들의 승가정신 회복과 나아가서는 불교교육 제도를 개신하려는 노력을 구체시켰다. 당시 그 대회는 전국 강원 대표 44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인들의 활동 방향, 조직체, 강원교육 개선방향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그들은 학인의 조직체인 학인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回光≫도 발행하였다. 그후 그들은 2, 3차 학인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서 당시 교단에 교육제도 혁신을 위한 건의안을 제출하여 교단 차원의 교육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켰다.

 또 다른 불교청년들의 움직임은 조선불교청년회의 재기 및 朝鮮佛敎靑年總同盟의 창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5년 이후 침체를 거듭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는 1928년 3월에 재기하였다. 이는 과거 불교청년운동 주도자들의 재기, 복귀, 외국유학 이후의 귀국, 중앙불전의 개교 등의 기반에서 가능하였다.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는 우선 불교청년운동의 제반 문제점을 정비하는 가운데 점차 그 조직을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불교청년운동의 총 집결체의 위상을 갖기 위한 자기 정비이자 조직 확대였다.

 당시 불교청년들은 청년운동의 문제점을 동지연결과 통일정신 부재에서 찾고 그를 해결할 대안으로서 총동맹을 설정하였다. 이에 총동맹에는 기존 조선불교청년회 조직과 인물뿐만 아니라 구학계열의 학인, 여성불교운동을 담당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333)金光植,<朝鮮佛敎女子靑年會의 창립과 변천>(≪한국근현대사연구≫7, 1997).의 조직과 인물 등이 대거 가세한 조직체로 확대되었다. 이에 기존 조선불교청년회의 산하 조직은 해체하고 총동맹 산하의 동맹으로 가입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교청년운동의 재정비와 교정의 문제점 해소를 고민하였던 일단의 불교청년들의 항일 비밀결사체인 卍黨의 등장과 주도가 개재되었다.334)金光植,<朝鮮佛敎靑年總同盟과 卍黨>(≪韓國學報≫80, 1995), 221∼231쪽. 1930년 5월 창립된 만당은 조학유·김법린·李龍祚 등이 주도하였는데 政敎分立·敎政確立·佛敎大衆化라는 강령을 내세웠다. 불교청년 16명으로 출발한 만당은 한용운을 당수로 여기면서 활동은 비밀리에 추진하였는데, 불교청년운동 및 교단을 움직였던 裏面 단체였다.

 한편 이같은 불교청년들의 자기 정비에 맞물려서 나온 단체가 二九五八會였다. 이구오팔회는 중앙불전의 제1회 졸업생들의 모임이었다. 1931년 2월 졸업에 즈음하여 중앙불전 제1회 졸업생들은 ‘조선불교의 前衛’가 될 것을 다짐하며 그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들은 불교계의 위급한 상황이 있거나 난국에 처할 시에는 언제든지 결합하기로 맹세하였다.335)金光植,<二九五八會考>(≪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韓國民族運動史硏究≫, 1997), 335∼361쪽. 이같은 이구오팔회의 등장은 만당의 등장, 총동맹의 결성 등 불교 부흥이라는 흐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밖에도 이 시기의 움직임에서 주목할 것은 1931년에 재건된 선학원, 1928년에 개최된 전국포교사대회, 1929년 개운사에 설립된 고등연구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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