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3. 불교
  • 4) 조계종의 성립과 식민지체제에 좌절
  • (2) 군국주의 체제에 좌절

(2) 군국주의 체제에 좌절

 불교계가 일제 식민통치에 좌절·훼절·타협한 양상이 노골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계종단 출범 이후였다. 사실 그 같은 성향은 국권상실 이후<사찰령>체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성향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35년부터라고 하겠다. 일제는 만주사변 발발 이후 중국침략에 필요한 물적·인적자원의 조달뿐만 아니라 전쟁의 후방에 해당되는 조선농촌의 재정비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농어촌진흥운동과 心田開發운동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심전개발운동은 곧 한국인의 정신을 통제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현실에 안주케 하면서 저항정신의 상실을 기도한 것이었다.

 일제가 추진한 심전개발정책에 불교계는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이 기회를 사찰 정화의 기회로 판단했고, 심전은 불교사상의 근원인 마음과 동일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요컨대 불교 부흥의 기대에서 심전개발에 동참하였다. 중앙 및 지방 불교계에서는 일제의 권유에 의하여, 아니면 자발적으로 심전개발과 유관한 강연회를 수없이 개최하였다. 또한 불교 지식인들은 심전에 관련된 저서를 발간하여 그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심전개발 강연회가 개최되지 않았던 지역과 사찰이 없을 정도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불교계의 일제에 대한 협조와 타협은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군사후원연맹에 가입, 교무원의 시국강연회, 출전부대 송영, 위문금 전달, 무운장구 기원법회 개최, 황군위문사 파견, 국방헌금 모금 및 전달, 銃後報國强調週間 행사 개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등은 당시 그 사정을 말해주는 정황들이었다.347)임혜봉,≪친일불교론≫상(민족사, 1993), 167∼259쪽. 그리하여 당시 전국의 사찰과 신도들은 위와 같은 식민통치의 강요와 억압에 무관치 않을 수가 없었다.

 불교계의 그 같은 좌절은 일제가 1941년 12월에 자행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불교계가 가혹한 군국주의 통치에 의하여 수행한 양상 또한 다양하였다. 군용기 헌납, 전시실천요목과 전승기도 축원문 낭독, 임전대책협의회 가담, 조선임전보국단 가입, 사찰의 금속류 헌납, 국방헌금, 일본어보급운동, 시국 순회강연회, 징병 권유 및 협조, 근로보국대 결성, 창씨개명 협조 등이었다.348)임혜봉, 위의 책, 325∼450쪽. 그런데 불교계의 이같은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좌절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간혹 불교의 지성인이라 지칭되는 인물들이 적극적인 시국 협조의 발언 및 기고를 한 것은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식민지 불교정책을 극복키 위한 치열한 활동을 추진한 불교청년운동의 일부 인물들도 이 시기에 와서는 일제에 타협, 좌절한 행적을 보였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통치 기간중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고 노력한 일단의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의 활동이다. 1926년에 범어사 포교당으로 용도 변경된 선학원은 1931년 金寂音에 의하여 재기하였다. 재기한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와 선학원 재정기반 구축에 유의하였는데, 그 결실로 1934년 12월에는 재단법인 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전환하였다. 그후 선리참구원 계열의 수좌들은 일본불교의 침투 및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인하여 피폐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고뇌의 산물로서 朝鮮佛敎禪宗 宗憲을 선포하였다.349)金光植,<朝鮮佛敎禪宗宗憲과 首座의 現實認識>(≪建大史學≫9, 1997), 288∼ 292쪽. 이 종헌 선포는 청정한 교단의 전통을 사수하고 부패의 정화를 기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전통불교의 회복, 식민지불교에의 저항을 지향하였다. 그 결과 기존 선학원은 중앙선원으로 변경, 종무원 설립과 운용, 수좌대회의 개최 등을 기하면서 전통 수호에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선원의 증가, 참선 수좌의 증대가 나타났다. 이러한 기반하에서 1941년 2월에는 청정승풍과 전통선맥을 구현하기 위하여 선학원에서 遺敎法會를 개최하였다.350)金光植, 앞의 글(1994b), 303∼304쪽. 宋滿空·박한영·河東山·이청담 등 승려 수십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법회에서는 法網經과 曹溪宗旨에 대한 설법이 이루어졌다. 이는 군국주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당시에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일제하 불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통 선맥을 계승하려는 수좌들의 노력은 1942년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로 일컫는 宋鏡虛의 문집인≪鏡虛集≫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우리 功勞者의 表彰은 우리 손으로”라는 명분하에 진행된 그 발간에는 전국의 청정 수좌 40여 명과 전국의 선원이 동참하였다.351)≪鏡虛集≫(極樂禪院, 1990), 4∼5쪽. 이렇듯이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이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려고 노력한 고뇌와 산물은 이후 8·15해방 이후 교단 정상화의 값진 밑거름이 되었다.

<金光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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