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2) 유림의 항일운동과 일제의 탄압
  • (1) 순절과 망명의 항거

(1) 순절과 망명의 항거

 국권상실의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유림들이 대응한 태도는 망국의 책임에 대한 통감으로 비분강개하여 생명을 버려 節義를 지키는 殉節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개화사상가요 시인이었던 黃 玹(호 梅泉)은 합병의 소식을 듣자 그 다음날 絶命詩 4首와 유서를 남겨놓고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그의 유명한 절명시에는 역사를 아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는, 선비를 5백년간 길러낸 국가가 망하는 날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한 성품을 보존하고 독서로 체득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결행한다는 절의의 신념을 밝히고 있다. 당시 상당수의 유교지식인이 황 현의 경우처럼 절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353)≪騎驢隨筆≫에는 ‘庚戌合邦殉節’의 인물로 21명을 열거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호남인물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한≪念齋野錄≫의 ‘合邦顚末’에는 32명이 자결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朴殷植의≪韓國痛史≫제3편 58장, ‘日人倂韓之最終’에서는 순절한 인물 28명을 들고 있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가 멸망하는 현실 앞에서 ‘자결’을 통해 지조를 지키고 의리를 천명하고자 하는 유교지식인의 대응방법은 많은 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자결하여 일제의 침략이 불의함을 밝혔다고 하더라도 일제에 직접 손상을 입힐 수 없고, 집단적인 행동화로 이끄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을미의병(1895)이후 유림들의 의병운동이 일제의 우세한 무력에 의해 무기력하게 붕괴되어 갔다. 따라서 합병이후 국내에서 ‘의병’운동은 급격히 붕괴하고 극소수의 ‘순절’과 상당수의 ‘망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自靖’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압박이 가중되면서 을사늑약(1905)과 경술합병(1910)을 전후한 시기에 상당수의 유림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자신의 지조와 전통의 예법을 지킨다는 명분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한다는 목적으로 만주·러시아령 연해주지역·중국대륙 등으로 망명을 갔다. 이 시기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유교인 가운데는 을미의병을 비롯하여 의병에 참여하였던 도학자들과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새로운 항일투쟁의 기지를 찾아 망명하거나,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정통 도학자 출신으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도학자 柳麟錫(호 毅菴)과 李承熙(호 韓溪)를 들 수 있다. 提川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은 1896∼1897년과 1898∼1890년 사이에 만주로 두 번 망명하였고, 1907년 高宗이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자 해외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유인석은 중화의 문화를 지키다가 생명을 마칠 것을 주장하는 ‘守華終身’의 의리를 제시하였으며, ‘중화문화를 보존하고’(保華), ‘중화문화를 수호하고’(守華), ‘중화문화를 지키다 죽는다’(殉華)는 세 가지 방법을 ‘處義’의 3조목으로 제시하였다.354)柳麟錫,<處義有三>(≪毅庵集≫, 권 36). 이처럼 도학자로서 유인석의 국가의식은 바로 문화의식으로서의 中華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華夏문화의 지향은 당시 유림의 독립운동에 나타난 국가의식의 특성이지만, 시대조류에 상반되어 대중적 설득력이나 행동으로 추진하는 힘이 미약했다.

 李承熙(호 韓溪)는 乙巳五賊을 討罪하고 국채보상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고,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하였다가 1909년 중국∼러시아 접경지대인 만주의 密山府에 이주하여 망명동포를 모아 한국을 부흥시킬 독립기지로서 ‘韓興洞’을 개척하여 활동하였다. 독립기지 건설의 목적은 망명한 동포를 조직화함으로써 생활기반을 확보할 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시 만주 등지에서는 무수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여기서 유림의 독자적 조직은 초기에 의병조직의 연장선에서나 망명한 동지들의 결집을 통해 상당수 나타났다. 그 밖에 이승희에 의해 중국 孔敎會의 支部로서 만주지역(東三省) 韓人孔敎會가 조직되었다.355)孔敎會에 더불어 만주지역에는 復皇團·保皇團·鄕約團·大韓獨立團(紀元獨立團)·忠烈隊 등 유림들이 참여한 단체들이 있었는데, 이 단체들은 舊王朝를 회복하려는 동기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3(1968), 176∼189쪽.

 유교인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인물로서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물에는 朴殷植·申采浩·李相龍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청년기에 유교교육을 철저히 받은 인물들이지만,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신념을 점차 상실해 갔다. 그들은 한때 전통유교의 개혁을 통한 새로운 유교적 신념을 추구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은 보수적 폐쇄성에 젖어 있는 유교조직을 통합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을 포기한다. 기독교·천도교·대종교 등 유교 이외의 종교단체가 좀더 활력있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비해, 유교단체의 개혁의지와 조직적 결속이 갈수록 약화되어 해외독립운동은 점차 소수 개인적 인물의 활동에 의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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