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2) 유림의 항일운동과 일제의 탄압
  • (2) 유림의 독립청원활동

(2) 유림의 독립청원활동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에 따라 巴里講和會議가 열리게 되고 이 시기에 미국 윌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한편에서는 이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방법과 다른 한편에서는 국내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이 추구되었다. 국내에서 각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이 모여 계획하고 거국적으로 참여한 독립만세사건인 1919년 3·1운동의 충격으로 유림들은 이 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의식과 정통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던 유림들로서 여러 계층의 타종교인과 공동으로 모의하는 3·1운동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356)허선도,<三一運動과 儒敎界>(≪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286쪽. 그러나 실제로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는 상당수의 지방유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57)허선도, 위의 글, 286∼287쪽.
≪매일신보≫, 1919년 6월 17일.

 이처럼 3·1운동의 발생시기에서 유림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郭鍾錫과 金昌淑 등은 서울의 만세운동이 유림을 제외하고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여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논의하였다. 그 활동과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곽종석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長書에 명망있는 영남유림들이 다수 서명하였다. 장서는 문명국인 한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운동을 만국평화회의가 지지해 줄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였다. 김창숙이 이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아서 상경하였을 때 호남의 田 愚(호 艮齋)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호서지방의 金福漢(호 志山) 역시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자, 서로 공동행동을 결의한다. 그리하여 영남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채택하여 137명의 유림대표가 연명한 이른바 儒林團의 ‘巴里長書’를 김창숙이 휴대하여 상해로 가져갔다. 상해에서는 이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金奎植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며,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 천 부 인쇄하여 각국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하여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하였다. 이 사건은 ‘파리장서사건’ 혹은 ‘제1차 儒林團事件’이라 일컬어지며, 합방이후 유림의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화라 할 수 있다.

 해외에 망명하여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은 중국의회 의원들의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하거나 中·韓인사들을 결속하는 中韓互助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돕고, 廣東의 공교회 회장 林福成의 후원을 받아≪四民日報≫를 발행하며, 한때 북경에서 신채호가 경영하는 잡지≪天鼓≫의 편집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년결사대를 조직하고 북경으로 가서 義烈團員 羅錫疇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게 하였다. 이로 인해 김창숙은 慶北儒林團頭領 겸 義烈團顧問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가 국내에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던 사건이 탄로되어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자 그 동안 일제와 타협하였던 유교지식인들도 자신의 지난 행적을 청산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대열에 나섰다. 그 대표적 인물이 金允植(호 雲養)과 李容稙(호 剛菴) 등 舊王朝의 원로대신들이다. 이들은 3·1운동 직후인 3월 28일, 두 사람의 연명으로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동경시내의 신문사 등 주요 기관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를 보냈다. 이들은 이 장서를 발송한 직후 검찰과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그 동안 일제로부터 받았던 작위와 직책을 박탈당하고 징역 1∼2년의 刑을 선고받았다.358)허선도, 위의 글, 299쪽. 한문체의 850자 정도의 이 장서는 한국의 모든 백성이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人心이며 天命임을 강조하고, 이런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승인하고 공평한 정책으로 세계에 표명하고 각 조약체결국에 통고하도록 요청하였다.359)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全書≫上), 95∼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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