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3) 계몽운동과 유교개혁운동
  • (2) 유교개혁운동의 양상

(2) 유교개혁운동의 양상

 국권의 상실과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라 민족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유교개혁사상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근대의 유교개혁사상은 그 실현을 위해 대중적 전파나 공동체의 조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구상하여 실제로 공동체 조직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종교운동으로서의 활동양상을 크게 보면 ①박은식·장지연을 중심으로 하는 大同敎 조직, ②이승희·이병헌에 의해 각각 추진되었던 孔敎운동, ③기타 群小조직이나 활동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박은식·장지연 등은 1909년 9월 대동교를 창건하여 유교의 민족주의적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장지연은 공자의 誕日의례와 문묘의 釋奠의례·祭天의례를 비롯한 황제의 의례(皇禮) 등 유교의례의 체계적 재구성을 추구하고, 나아가 의관제도의 개혁방법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의례의 재정립을 통한 유교적 실천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것은 유교개혁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대동교는 유교의 새로운 이념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서, 강유위의 大同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1908년 친일유교단체인 大東學會(孔子敎로 改名)를 설립하여 유림의 변질과 통제를 추구하자, 이에 대항하여 민족진영에서 대동교를 조직한 것이다.366)愼鏞廈, 앞의 책(1982), 201∼202쪽.

 박은식은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종교를 扶植시키는 과제의 시급함과 공자의 도를 나라 안에 떨쳐 일으키고 백성의 마음속에 젖어들게 할 방책을 탐색하고 있었다. 곧 그는 유교가 개혁되지 않으면 결국은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면서<儒敎求新論>에서 자신의 유교개혁론으로 ①군주중심에서 인민중심으로 전환, ②소극적 폐쇄성에서 적극적 전파활동으로 전환, ③번쇄한 주자학풍에서 쉽고 절실한 양명학풍으로 전환이라는 3조목의 핵심대책을 제시하고 있다.367)朴殷植,<儒敎求新論>(≪朴殷植全書≫下), 44∼48쪽. 다시 말하면 민주적 사회의식으로 국민을 계몽하며, 세계를 향해 선교를 행동화하고, 주체적 신념과 실천의지의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강유위와 陳煥章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전개된 공교운동에 직접 관련을 맺고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한 경우로서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승희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이병헌이 있으며, 이승희는 道學을 배경으로 유지하고 있다면 이병헌은 今文經學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먼저 이승희는 1913년 당시 북경에 孔敎會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만주지역(東三省) 한국인 동포들을 결속하는 방법으로 東三省韓人孔敎會의 설치를 위해 각지로 통문을 돌리며,<東三省韓人孔敎會趣旨書>와 시행원칙으로 10條의 ‘節目’을 제정하였다. 또한 그는 1914년 북경에 가서 진환장 등 북경공교회 인사들을 만나 東三省韓人孔敎會支會를 설치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그는 공교와 서양의 新學을 조화시키는 것이 공교 존립의 핵심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공교에서는 政·敎가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국가와 교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정·교를 통합하고, 신학과 구학을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약에 끝내 양자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孔廟와 학당에서라도 孔敎學科를 설립하여 공교가 현시대의 응용(時用)을 겸하고 있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고 있다.368)李承熙,<孔敎會講說>(≪韓溪遺稿≫7), 388∼390쪽.

 다음으로 이병헌은 다섯 차례(1914∼1925) 중국을 방문하여 강유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중국의 공교운동을 도입한 유교개혁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문묘를 설립하여 敎祖를 존숭하는 공교조직화를 추진하여 丹城(경남 山淸)에 培山書堂을 설립하였다. 비록 그의 공교조직운동은 시작단계에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공교의 경학적 기초인 금문경학연구에로 관심을 돌려≪孔經大義考≫를 비롯한 금문경학의 독보적인 체계를 남겼다. 이병헌은≪儒敎復原論≫(1919)을 통해 자신의 공교사상의 기본체계를 확고히 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곧 그는 유교의 傳布방법으로서 ①敎堂을 건립하여 성심으로 공자를 섬길 것, ②별도로 가려서 번역한 서적을 聖經으로 하여 천하에 배포할 것, ③敎士를 선택하여 정해서 경전을 강설하여 천하에 펼칠 것을 제안했다.369)李炳憲,<儒敎復原論>(≪李炳憲全集≫上), 189쪽. 또한 유교개혁의 방향을 전반적으로 전통의 ‘鄕敎式 유교’(舊派)에서 ‘敎會式 유교’(新派)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370)李炳憲,<辯訂錄>(≪李炳憲全集≫上), 325∼329쪽. 이러한 개혁론의 실천방법은 당시에 강력한 전파력을 발휘하고 있던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방법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1909년의 대동교조직과 1910∼1920년대의 국내외에서 공교조직으로 유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으나, 유교개혁운동으로서의 구상과 설계만큼 실제로 대중적 호응과 세력의 확장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전후에 지속적으로 유교의 교단조직이 일어났으며, 이때에 조직되어 활동하던 유교단체 가운데는 친일조직도 상당수 있었다.371)일제하의 유교단체를 목록으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敎團名 창립 대표 특기사항
大宗敎
太極敎
大東學會 ※
大同敎
孔敎會(國外)
大東斯文會 ※
儒道振興會 ※
儒道闡明會
孔敎會(國內)
大成敎會
性道敎
慕聖尊道院
大聖院
孔子敎
朝鮮儒敎會
朝鮮儒道聯合會※
1907
1907
1907. 12
1909. 9
1913
1919. 12
1921
1921
1923
1923
1929
1929
1930
1931
1932
1939
河相益
宋炳華
申箕善
李容稙
李承熙
鄭萬朝
金榮漢
金鶴圭
李炳憲
趙衡夏
李民濟
李範錫
金彰漢
?
安淳煥
尹㥁榮
원래 1879년경 김재일이 창시
처음 명칭 ‘關東敎’. 총부-吉州
1909. 10 ‘孔子敎’로 改名
朴殷植·張志淵이 활동의 중심인물
‘東三省韓人孔敎會支部’로 설치
≪大東斯文會報≫간행(1929. 4∼)
≪儒道≫간행(1921∼)
≪儒道闡明會報≫간행(1922. 4∼)
경남 산청군 丹城에 培山書堂창건
총부-京城.
水雲敎에 儒林 加味. 2代 敎統
太極敎의 분파. 慕聖院과 구별
京城과 端川 등지에 支院
총부-평북 영변.
始興에 鹿洞書院운영.≪日月時報≫간행
≪儒道≫간행(日文, 1942. 4∼)

鄭奎薰,≪한국 근대 종교의 사상과 실제에 관한 연구≫(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8), 229쪽.
※표는 親日儒林단체.
당시 유교단체의 조직과 활동양상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서 ①일제의 유교단체에 대한 회유와 분열의 통제정책이 매우 집요했던 사실, ②유교단체의 창립시기가 1920년대에 가장 많았던 사실, ③太極敎(길주)·慕聖尊道院(길주)·大聖院(단천)·孔子敎(영변) 등의 중심 활동지역이 함경도와 평안도인데, 전통적으로 유림기반이 가장 약한 곳이었던 서북지역에서 유교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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