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4) 일제의 유림 회유정책과 분열정책
  • (2) 일제의 유림 분열정책

(2) 일제의 유림 분열정책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유교조직으로서 대동학회(1909년 공자교로 개명)·大東斯文會·儒道振興會·朝鮮儒道聯合會는 일제가 유교조직을 친일세력으로 순화시키는 동시에 유교조직을 분열하여 파괴하기 위한 유교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조직하고 지원하였던 친일유교단체이다. 그 가운데 대동사문회(1919)와 유도진흥회(1921)는 3·1운동 이후 유림조직을 저변에서 분열시키고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에 이용하기 위한 단체로 볼 수 있다.

 일제의 총독부가 경학원과 향교를 관리하자, 일제에 저항하는 유림들은 문묘의 석전제향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문묘제향은 친일유림에 의해 점유되는 형편이었다. 일제가 3·1운동 이후 유림들을 회유하는 한편 분열정책으로 총독부의 지원아래 유림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는데, 총독부는 이런 유림단체들을 내선융화운동·황국신민화운동 등 식민지 통치정책을 위한 사회교화운동에 활용하였다. 이들 친일유림단체는 식민지 교육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친일조직의 유림회가 회원모집을 하자 대중들은 입회만 하면 양반이 되는 줄 알고,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사람조차 입회금 1圓씩을 내고 다수가 참여하였다고 한다.375)≪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時代錯誤의 儒林會>.

 1919년 발족된 대동사문회는 魚允迪·宋之憲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東京斯文會와 연계하기 위해 조직을 추진한 것이요, 회장에 尹用求, 총무에 어윤적이 추대되었다. 대동사문회는 일제의 재정적 뒷받침과 보호하에 친일유림의 역할을 수행하여, 경학원의 석전제와 강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일제의 정책에 협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석전제향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일제에 의해 동원되었다. 1920년 발족된 유도진흥회의 지회창립대회에는 도지사·군수·경찰간부·헌병대장·학교장 등의 지방관이 동참하는 등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친일유림단체의 활동은 한편으로 지방의 유림들을 끌어내어 지조를 꺾어 친일세력으로 포섭하며, 다른 한편으로 회원들에게 “國憲을 존중하여 국법에 따르고 生民에 복리를 생각할 것”과 “世運의 進展에 뒤지지 말아야 할 것이요, 평상시에 大局에 착안하고 가볍고 조급하게 불온한 행동을 삼가하여 일반 民人의 모범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으로 길들여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친일유교단체가 사회의 표면에 드러나면서 지방의 유림들 가운데 지조가 굳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일제의 유혹과 위협에 따라 친일단체에 참여하거나 동원되면서 사실상 유림의 내부분열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지조가 굳은 유림들은 이들을 비루하게 여겼고, 한 번 지조를 잃은 유림들은 현실에 타협하며 일제에 순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일제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명감이나 능동적 참여의식이 결핍된 유도진흥회는 자생력이 없다는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하였다.376)≪齋藤實文書≫9, 162∼163쪽,<朝鮮儒道振興會 經過狀況報告書>.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