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6) 일제하의 유교의 특성

6) 일제하의 유교의 특성

 조선시대를 지탱해 온 통치이념의 주체인 유림은 일제의 국권침탈과정에서부터 의병운동이나 상소운동 등으로 강력하게 저항해왔으며, 합방후에도 국외에 망명하여 무력항쟁을 하거나, 일본정부나 조선총독부를 포함하여 각국 정부에 독립청원을 하며, 교육사업과 계몽활동을 벌여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도 하고, 일제의 동화정책에 저항하여 전통문화를 지키며 모든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박은식·김창숙 등 소수의 유림출신 망명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는 정도이고, 이승희처럼 공교운동과 연결된 독립기지건설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약하였다. 다만 유림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을 하였던 ‘파리장서사건’과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해 일관된 비타협적 거부태도에서 강인한 저항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유림의 비타협 무저항은 일제의 가혹한 억압에 따른 시련 속에서도 비교적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지조를 지켜갔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유교의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는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유림의 항일운동은 유림이 향촌의 친족적 결속이나 학맥의 결속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소수의 진보적 인물을 제외하면 전국적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였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전통의 생활양식을 일본 식민통치의 사회체제와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는 수구적 폐쇄의식 속에 사로잡혀 항일의식을 민족의식으로 선명하게 표출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유림의 항일의식은 실제로 민족의식으로 표출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개인적 신념과 의지의 차원에 머물고 말아 사회적 변혁과 유리되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해 유림은 극단적 거부로 민족전통을 고수하는 강인함을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유림의 태도는 철저히 은둔적인 것이기에 민족독립의 당면문제를 위한 적극적인 지식의 획득이나 대책의 강구가 결여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일제의 유림에 대한 탄압정책은 조직적이고 집요하여, 조선사회의 국가체제 속에 있던 유교조직인 성균관·향교를 장악하여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제거하여 변질시키고 친일유림집단을 조직하여 이를 점유함으로써, 한편으로 유림집단을 분열시키고, 이에 비타협적인 항일유림집단을 더욱 사회체제로부터 소외시켜 무기력하게 몰아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일제는 식민통치의 도구로서 친일유림집단과 유교기관을 이용하는 동시에, 은사금 등의 수단으로 유인하고 위협하여 유교인의 지조를 꺾고, 유림집단을 회유하여 변질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분열을 심화시켰다. 나아가 일제가 유교전통의 衣髮제도와 의례제도의 변혁을 강요함에 따라 유림을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예속집단으로 전락시키거나 폐쇄적 전통수호의 은둔집단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유교조직을 이용하거나 억압하는 양면정책을 썼던 것이다.

 다만 이 시대의 상당수 유교지식인이 일제에 순치되어 식민통치의 도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집요한 동화정책을 끝까지 거부하여 지조를 지켰던 보수적 유교지식인 및 소수이지만 유교개혁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자 노력하였던 인물들은 국내에서 항일정신을 지켜갔던 중심세력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琴章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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