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5. 개신교
  • 1) 식민지시기 개신교의 상황

1) 식민지시기 개신교의 상황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혹독한 무단통치하에서 개신교회는 민족적 또는 사회적 문제보다는 종교적 방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망국의 비애를 신앙의 열성으로 잊어보려 했으며, 특히 일제와의 갈등을 두려워 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 개신교인들을 비정치적인 경향으로 지도·감독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은 이같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3·1운동의 계획과 확산 단계에서 개신교인들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졌다. 그 동안 침묵했던 교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고, 독립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최대의 민족적 거사라 할 수 있는 3·1운동과 개신교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은,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을 위한 개신교인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음<표 1>은 3·1운동 당시 入監者와 被檢者의 종교별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3·1운동 당시 종교인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입감자의 39.43%(3,572/9,059), 피검자의 32.3%(6,314/19,525)가 종교인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의 종교 인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작은 비율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천도교와 개신교의 비율이 높았으며, 불교와 천주교의 경우 그 교세에 비해 비율이 낮았다. 천도교는 입감자의 15.1%, 피검자의 11.8%를, 개신교는 입감자의 22%,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두 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보여준다.

종교
(입감자/피검자)

(입감자/피감자)
합계
(입감자/피감자)
비율
(입감자/피감자)
천도교
시천교
1,361/2,264
5/14
2/15
-
1,363/2,283
5/14
15.1%/11.8%
-
불 교 105/220 1/- 106/220 1.2%/1.1%
유 교 55/346 - 55/346 0.6%/3.6%


장로교 1,322/2,254 119/232 1,441/2,486 22%/17.6%
감리교 401/518 37/42 438/560
조합교회 7/7 - 7/7
기 타 81/286 16/34 97/320
천주교 45/54 8/1 53/55 0.5%/-
기 타 7/21 - 7/21 -/0.1%
무종교 5,455/9,255 31/49 5,486/9,304 60.6%/47.7%
미 상 1/3,809 -/98 1/3,907 -/20.2%
합 계 8,845/19,054 214/471 9,059/19,525 100%/100%

<표 1>3·1운동 당시 입감자와 피검자의 종교별 현황

≪조선총독부 통계보고≫(1919년 5월);≪일본헌병대 조사보고≫(1919년말);김승태,<종교인의 3·1운동 참여와 기독교의 역할>(≪韓國基督敎史硏究≫25,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9), 21∼22쪽.

 더불어 주목할 점은 여성 입감자와 피검자의 비율이다. 입감자와 피검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2.4%(214/9,059)와 2.4%(471/19,525)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여성 입감자와 피검자는 각각 8.7%(172/1,983)와 9.1%(308/3,373)였는데, 이는 다른 종교의 여성 입감자와 피검자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에 비해 상당한 비율이다. 이는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사회 참여가 가장 두드러졌던 종교가 개신교였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3·1운동 당시만 해도 민족문제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관심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3·1운동에 대거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교세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개신교는 꾸준히 성장해갔다. 다음<표 2>의 통계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교 파 \ 연 도 1916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천주교회 교회 206 215 222 224 233 237 243 249 243 250
교인 83,893 80,613 82,843 81,504 88,573 91,941 91,320 85,508 88,987 89,798
조선예수교장로회 교회 1,885 1,908 1,896 1,899 1,916 2,031 2,095 2,095 2,197 2,165
교인 124,170 114,106 156,628 141,044 155,400 181,298 194,037 186,785 186,785 182,650
미북감리회 교회 553 578 565 564 563 562 548 530 534 543
교인 40,361 37,609 40,722 34,414 36,673 39,972 40,659 42,301 32,682 35,337
미남감리회 교회 258 259 252 224 259 317 348 407 423 493
교인 8,606 16,074 10,722 9,442 12,578 20,058 23,453 21,486 13,075 22,097
조선성공회 교회 70 72 72 71 63 62 61 62 67 70
교인 5,465 4,621 4,622 4,264 3,900 3,863 4,127 4,492 4,683 4,805
러시아정교회 교회 6 6 6 6 7 6 6 6 6 6
교인 553 553 549 558 562 550 559 556 585 595
안식교회 교회 36 49 44 44 47 57 54 63 64 64
교인 832 868 859 839 1,039 1,044 953 1,273 1,398 1,542
동양선교회 교회 10 11 13 16 18 25 27 40 38 57
교인 501 1,182 570 850 1,500 2,000 1,833 4,371 2,710 5,413
구세군 교회 81 84 103 97 97 100 100 155 158 163
교인 3,916 3,825 4,176 4,725 4,878 5,718 5,718 7,739 7,808 8,509
조선기독교회 교회                   19
교인                   1,147
성결교회 교회         1 2 2 2 3 3
교인                    
조선회중교회 교회           35 27 22 22 22
교인           2,955 3,608 3,369 3,369 3,369
일본기독교회 교회 9 10 10 10 10 10 10 16 15 16
교인 8 18 144 113            
일본감리교회 교회 11 11 11 11 11 11 11 15 16 17
교인                    
일본조합교회 교회 38 48 58 59 54 7 5 8 8 8
교인 11,280 11,228 13,541 14,387 14,254          
기타 교회           16 17 15 20  
교인                    
합계 교회 3,163 3,251 3,252 3,225 3,279 3,478 3,554 3,685 3,814 3,896
교인                    

<표 2>기독교회의 교세(교회·교인) 변화 (1916∼1925)

≪朝鮮に於ける宗敎及享祀一覽≫(朝鮮總督府, 1928), 44∼47쪽.

 장로교의 경우 1916년 1,885개의 교회와 124,170명의 교인이 1925년에는 2,165개의 교회와 182,650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여 각각 14.9%와 47.1%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남·북감리교의 경우는 1916년 811개 교회와 48,969명의 교인이 1925년에는 1,036개의 교회와 57,434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여 각각 27.7%와 17.3%의 성장율을 보였다.

 이같은 발전의 이유는 복합적인 것이겠으나,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서양의 종교로만 인식되던 개신교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는 종교로도 부각되었음을 다음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제1기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방방곡곡에서 하는 문화운동의 혜택을 입거나 혹은 찬동하며 또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수입된 구미의 물질문명에 심취하여 예수교를 믿게 되는 사람이 많았다. 3·1운동 이후의 제2기에 있어서는 기독교회가 민족전선에 연출한 역할로 인하여 교회가 비약적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다(趙龍基,<福音的信仰要義>,≪基督申報≫, 1937년 2월 3일).

 3·1운동의 규모와 열기에 놀란 일제는 식민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경질되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는데, 선교사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들였다. 선교사들은 1919년 9월 일본정부의 처사에 대한 의견과 제안을 요청하며<연합종교회건백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① 교회 및 선교사에 대한 단속을 완화할 것.

② 기독교 및 기독교에 대한 관리의 차별을 철폐할 것.

③ 기독교계 학교에서의 성서교육과 종교의식을 허용할 것.

④ 기독교 문서에 대한 검열을 철폐할 것.

⑤ 교회의 출판물 발행의 제한을 완화할 것.

⑥ 교회 및 선교기관을 재단으로 인정할 것.

⑦ 기독교인으로서 구금된 정치인에 대한 학대를 중지할 것.

⑧ 형무소의 교화사업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할 것.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의 역사≫Ⅱ, 기독교문사, 1990, 44쪽).

 즉 3·1운동은 민족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도, 선교사들은 종교적 개선 요구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총독부에서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종교과를 신설하고<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했으며, “교회에서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사용의 정지나 금지를 명령할 수 있다”는 규정을 삽입했다. 또한<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여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서교육을 인정하고 종교단체가 소유한 부동산을 내국인법으로 허가했다. 그 결과 선교사들 중에는 사이토를 예찬하는 이들도 나오기에 이르렀으나, “보통 문화정치라고 일컫지만 반도통치의 기본방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달라진 점은 없다. …끝내 國憲에 반항하고 병합의 정신에 어긋나는 不逞輩에 대해서는 추호의 가차없이 단속하는 방침을 추진할 것이다”381)≪施政二十五年史≫(朝鮮總督府, 1935), 314∼315쪽.라는 저들의 말처럼 민족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인들이 다시 거족적으로 민족운동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다. 단속을 완화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약간 허용해 주는 대신 일제는 표면적인 항일활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차없는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간접적이고 온건한 민족운동이었으며, 문화운동도 넓은 의미에서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겠다.

 민족문화를 수호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한 운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양에서 이식된 개신교에 우리 민족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하나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의 문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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