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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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5. 개신교
  • 2) 개신교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2) 개신교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식민지시기 개신교계의 새로운 경향은 ‘조선적 기독교’를 표방하며 나름대로의 ‘土着化’를 시도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대한제국기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382)이덕주,≪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192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두드러졌다. 이는 서양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교리와 의례만을 그대로 따랐던 과거의 비주체적 모습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예컨대 蔡弼近은 다음과 같이 ‘조선인의 기독교화’와 더불어 ‘기독교의 조선화’를 강조했다

기독교는 하나이오 그 성경도 하나이오 그 신앙의 목표도 하나이지만은 그것을 소유는 생명 잇는 인격·생명 잇는 민족이 다른 것을 따라서 다른 방면이 잇슴니다. … 民族은 그 宗敎化를 고 宗敎는 그 民族化를 니다. … 그런데 朝鮮人은 얼마나 基督敎化엿스며 基督敎는 얼마나 朝鮮化를 엿슴닛가(蔡弼近,<새 基督敎>,≪基督申報≫, 1925년 12월 23일).

 또한 田榮澤도 다음과 같이 “예수의 도리로 새로운 민족성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우리의게 본래부터 잇던 문화 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밧고 우리 민족셩이란 밧 우에 예수의 도리가 심어졌슴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로 새로운 문화를 지어야 하겟고 예수의 도리로 새로운 민족셩을 길너야 하겟슴니다(田榮澤,<열매열닐 때는 왓다>,≪基督申報≫, 1927년 10월 26일).

 한편 趙龍基는 기독교인들이 “서양숭배로 인하야 과거 조선의 문화·윤리·도덕에 대한 멸시가 심한 것”이 기독교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383)趙龍基,<福音的信仰要義>(≪基督申報≫, 1937년 2월 3일). 즉 이들은 조선적 기독교의 정립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출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적 기독교’가 된다는 것은 배외사상이나 복고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 본위의 교회가 되고, 우리의 독특한 문화를 보존·소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같은 경향은 敎權을 장악하고 있던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반발이기도 했다. 즉 한국 개신교인 중에는 선교사나 기성 교단과 마찰을 빚으며 제도권에서 이탈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로교 목사 崔重珍은 1909년 선교자금 사용, 선교기관 운영, 선교구역 조정 등의 문제를 놓고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었으며, 이듬해 전북대회에 5개 요구조항을 제출했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배은·배약·분쟁·불복’ 등의 용어를 써가며 그를 비난했고, 이에 최중진은 ‘대한예수교자유회 목사 최중진’의 이름으로 “…자유할 수밖에 없어서 자유하는 것을 불복이라 합니까? 불복이라는 말을 안들으려고 자유하는 것이지요”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낸 뒤 장로교를 탈퇴, 뜻을 같이하는 전북지역 10여 개 교회들과 함께 ‘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어 1918년 황해도에서는 장로교 목사였던 金庄鎬를 중심으로 ‘조선기독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는데, 1916년 황해노회는 그의 總戴 자격을 정지시켰고, 1918년에는 그의 휴직을 결의했다. 그러자 김장호는 자신이 맡고 있던 봉산 신원교회를 중심으로 ‘조선기독교회’를 창건했던 것이다. 그는 “교리해석상에 문명각국의 현행하는 眞正高尙한 神學說을 자유채용하고, 野昧 인종을 유도하는 眩惑迷疎하는 假言寓說을 일체 曉破覺悟하여 동양교회에 신선한 정신을 激醒新興케 할 것”이라 하여, 성경에 대한 미신적 해석을 반대하며 선교사들의 보수적 신학과 신앙을 비판했다.

 역시 장로교 목사로 남성정교회를 맡고 있던 李萬集은 대구에서 1923년 ‘자치교회’를 설립했다. 3·1운동에도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1921∼1922년 계성학교 학생들이 운영자인 선교사들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사건을 일으키자 학생들을 지지했다. 그러자 경북노회에서는 1923년 이만집을 停職시키고 이 교회 장로 4명, 집사 1명을 면직시켰다. 그러자 이만집 등은 “今我 대구교회는 저 권리를 주장하는 선교사의 정신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하고 ‘자치교회’를 창립했다.

 1928년에도 장로교 목사 朴承明은 기성 교단에서 뛰쳐나와 ‘마산예수교회’를 창립했다. 일찍이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국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던 그는 1925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했다. 그러나 교회안의 소장·노장층의 갈등과 여자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경남노회는 그의 사직을 권고했고, 그 처리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고압적 자세가 문제가 되어 선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박승명은 1928년 “자유신앙에 방해되는 편협된 고정적 신경조례를 부인”하며 “예수교회의 연합통일에 장해되는 각 교파의 繁弊한 敎政條例와 교황·주교·감독·장로 등의 과두정치를 부인”하는 강령을 내걸며 따로 마산예수교회를 설립했다.

 이상은 모두 장로교에서 갈라진 교파였으나, 감리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먼저 감리교 목사 李龍道는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 문제되어 1932∼1933년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과 함께 휴직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평양에서 “羅馬舊敎라거나 更正新敎라거나 가릴 것 없고 宗門의 동서나 派別의 남북을 논할 것 없이 교회의 내용만 예수로써 정화되면 그만이다”라 주장하며 ‘예수교회’를 창립했다.

 역시 감리교 목사인 邊成玉은 1935년 만주에서 ‘조선기독교회’를 조직했다. 만주지역도 장로교·감리교 선교부 사이의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따라 동만·남만·북만 등 지역에 따라 교파도 달랐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이유로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인 이 지역 한국인 신자들에게 이같은 교파 구분은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장로교인이 감리교 선교구역에 정착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즉 초교파적인 조선기독교회의 창설은 선교사들이 만든 선교지역 분할정책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성결교의 경우에도 한국인 신자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1936년 ‘하느님의 교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이 주관하던 東洋宣敎會는 1921년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했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선교사들에게 있었는데, 교세가 성장하면서 한국인 신자들은 1932년 자립을 선언하고 총회를 조직했다. 이후 동양선교회와 총회 사이에 종종 마찰이 빚어졌으며 1936년 자치운동에 적극적인 邊南星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는데,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이사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자 마침내 “하느님의 교회는 정치적 통제기관을 두지 않으며, 또한 성서 이외의 법규를 세우지 않고, 각 교회가 다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직속하야 성서를 유일의 正則으로 함”이라 하며 목사 13명이 따로 ‘하느님의 교회’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기성 교단이나 교회와 거리를 두고 시작된 조직들도 나타났다. 崔泰鎔은 1920년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를 만난 뒤 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1924년 귀국하여≪天來之聲≫을 창간, 기성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하며 ‘非敎會主義’로 자처했다. 그는 1935년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러라”라는 구호를 내걸며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설했으며, “조선교회가 외국인의 자선 위에 서 있고 또한 현재에도 그 자선에 의뢰하는 마음이 있어 조선교회의 근저에 외국인의 자선이 깔려 있다는 일은, 이는 조선인의 신앙의 불철저를 의미하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金敎臣은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귀국, 우치무라 문하생인 咸錫憲·宋斗用·鄭相勳 등과≪聖書朝鮮≫을 창간했다.≪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즉 기독교와 민족을 융화시키려 한 김교신의 생각을 보여준다. 그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사람에게 가라”고 외치며, 기성 교단과 거리를 둔 無敎會主義를 주창했다. 그리고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骨筋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38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1990), 202∼208쪽.

 심지어 신학 분야에서도 우리 민족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나왔다.

飜譯神學과 雇傭神學에서는 조선의 靈을 움직이는 활력이 나오기 어렵다. 정통이라 할지라도 조선인 신앙정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선인 독창의 신학, 조선인의 손으로 발행하는 조선의 독립의 신학이래야 조선의 靈을 움직일 수 있다(金麟瑞,<아빙돈 註釋問題>,≪信仰生活≫, 1935년 11월호, 10쪽).

 이처럼, 이제 ‘조선적 기독교’의 수립은 한국 개신교계의 지상과제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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