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6. 천주교
  • 2) 출판·언론활동

2) 출판·언론활동

 천주교회의 출판·언론활동은 다른 문화활동에 비해 비교적 활발한 편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종교활동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 일반신자교육과 전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출판활동은 주로 이러한 문제와의 연관성 아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출판활동 중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의 한글번역작업을 들 수 있다. 천주교회의 성서번역작업은 1906년부터 주교 뮈텔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다.421)개신교에서는 일찍이≪신약성서≫를 완역하였으며, 1911년에는≪구약성서≫를 완역한 뒤 이를≪신약성서≫와 합쳐≪셩경젼셔≫로 발간하였다.<신약4복음서>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작업에서 신부 孫聖載(야고보)·洪秉喆(루가)이 마태오복음을 번역하였으며, 신부 韓基根(바오로)이 나머지 복음서의 번역과 전체 각주작업을 담당하였다. 그런 다음 1909∼1910년 뮈텔과 한기근의 교열작업을 거쳐 1910년 연말에≪셩경≫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하였다.422)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뮈텔 주교 일기-1906∼1910≫4(1998), 1910년 7월 7일.
李鎔結,<한국 천주교회의 성서 운동>(≪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2000), 391∼392쪽.
이로써 이≪신약성서≫가 교회창설기 이래로 필사되거나 목판 및 활판으로 간행되어 읽혀지던 한글본≪셩경직≫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한기근은 1922년에≪종도행전≫(사도행전)을 번역·출간하였고, 덕원 베네딕도회의 신부 슐라이허(A. Schleicher)는≪신약성서≫의 남은 서간들과 묵시록을 번역한 뒤 최병권과 신부 로트(L. Roth, 洪泰華), 김용학의 교정과 교열을 거쳐 1941년에 출간하였다. 베네딕도회에서는 이에 앞서≪少年聖書≫(1925년)와 신부 에그너(R. Egner)의≪어린이의 성서≫(1940년)를 발간한 적이 있었고, 1941년에는 신부 차일라이스(V. Zeileis)와 신부 퀴겔겐(C. Kügelgen, 具傑根)이≪합본복음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또 일제말기에는 베네딕도회에서≪구약성서≫를 번역하여 출간을 기다리다가 훗날 압수되었다고 한다.423)李鎔結, 위의 글, 392∼393쪽.

 이와 함께 일반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교리서와 교회지도서들도 간행되었다. 우선 1910년에는 한기근이 프랑스어원본을 한글로 번역한 뒤 설명을 첨부한≪요리강령≫이 간행되어 예비신자와 아동교리서로 널리 이용되었다. 다음으로 1925년에는 신부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를 중심으로 저술된 한글본≪천주교요리≫(대문답)가 발간됨으로써 1864년이래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셩교요리문답≫을 대신하게 되었고, 1934년에는 교리서 편찬을 위한 전국5교구위원회에서≪천주교요리≫를 확대 편찬한≪천주교요리문답≫을 간행하여 공식 교리서로 사용하였다.424)최석우,<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360∼361쪽.

 교구의 사목규칙과 행정제도 등에 관한 기본지침을 수록한 교회지도서로는 먼저 1912년 6월 대구교구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동시에 간행한≪대구교구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Taikou)를 들 수 있다. 이어 서울교구에서도 1922년 9월에 부주교 드브레(Devred, 兪世俊)가 저술한 라틴어본≪서울교구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를 발간하였고, 이 지도서들은 1932년 9월에 발간된≪한국천주교공용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신자용이 아니었으며, 신자지도층인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로는 1913년 대구교구에서 간행한≪회장의 본분≫(대구교구회장지도서)과 1923년에 르 장드르가 저술하여 서울의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한≪회장직분≫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전자는 초대 대구교구장인 주교 드망즈(Demange, 安世華)가 교구지도서에서 회장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번역·보완한 것이다.425)≪교회와 역사≫68(1981년 4월).
차기진,<대구교구지도서>·<서울교구지도서>(≪한국가톨릭대사전≫3·7, 1996·1999).

 그 무렵 일반 교회서적들은 서울과 대구보다는 베네딕도회가 활동하던 원산교구에서 활발히 간행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덕원 이전 직후인 1927년부터 인쇄소설립에 착수하였고, 1930년부터는 서적간행을 시작하였다.426)프로멘시우스 레너,<원산교구사>(≪교회와 역사≫59, 1980년 7월). 인쇄소 책임자는 수사 피셔(L. Fischer)였고, 교정은 수도원장인 신부 로트와 신학교의 한국인 교사가 담당하였다.427)Adelhard Kaspar O.S.B., HWAN GAB(還甲), Münster Schwarzach, 1973, p.130. 이로써 덕원인쇄소는 1886년 나가사키에서 서울로 이전된 성서활판소와 함께 교회출판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덕원에서의 첫 결실은 1933년에 신부 아펠만(B. Appelmann)이 교회전례에서 가장 긴요한 미사통상문에 해설을 곁들여 저술한 한글본≪미사규식≫이었다.428)Ibid., p.113.

 그 이전부터 원산과 延吉敎區(1928년에 知牧區로 설정됨)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신자들의 능동적인 미사참여와 전례의 土着化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토착화 운동은 ‘미사 經本과 聖務日禱의 모국어화’로 이어졌고, 연길교구의 신부 랍(K. Rapp)과 아펠만, 원산교구의 신부 로트는 이를 위해≪미사경본≫의 한글번역과 사용법교수에 노력해 왔으며, 1936년에는 마침내 로트에 의해 한글본≪미사經本≫(약 1천 쪽)이 간행되었다.429)Ibid., pp.113∼114. 이에 앞서 랍과 아펠만은 1932년 가을부터 한글본 미사경본들을 저술하여 등사판으로 배포하였고, 아펠만은 같은 해 겨울에 저술한≪소미사경본≫(1933년 9월 간행) 안에 여러 종류의 한글본경문을 수록하였다. 또 원산의 로트는 1932년에 수도자용 한글본≪미사통상문≫을, 다음 해에는 쇼트의≪미사경문≫한글역본을 등사판으로 간행하였으며, 1934년에는 한글본≪주일미사경본≫과≪성인미사경본≫을 간행하였다. 이≪미사경본≫의 발간으로 일반신자들도 이제는 미사 때마다 사제들이 읊는 라틴어경문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덕원인쇄소에서는 1936년에 로트의 韓獨문법서인≪조선어문법≫, 1938년에는 신부 슐라이허의 교양서적인≪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와 신부 피셔(W. Fisher, 陳道光)의 한글성가인≪가톨릭성가≫를 간행하였고, 미사와 성무일도, 일반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서적이나 양봉·공업·건축관련 소책자들을 꾸준히 간행하였다.430)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1995), 283∼286쪽.

 다음으로 교회언론 중에서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창간된 것은≪경향잡지≫였다. 이 잡지는 참개화를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지식전달을 목적으로 1906년에 창간된≪경향신문≫(발행인 드망즈)이 일제의 탄압으로 1910년 12월 30일(제220호)에 폐간되면서 그 부록으로 발행되던≪寶鑑≫을 확대 개편하여 1911년 1월 15일에 격주간잡지로 창간한 것이다. 이후≪경향잡지≫는 순수종교잡지를 표방하면서 신자 재교육과 계몽활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보감≫에서 신자들을 위해 게재하던<법률문답>란만은 계속 유지하였으며, 문예작품과 독자투고 등을 통해 가톨릭문화의 보급에도 일조를 하였고, 1933년 이후에는 조선어학회의<한글마춤법통일안>에 맞추어 내용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상의 한계성 때문에 신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데다가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45년 5월 15일(제39권 976호) 폐간되었다.431)≪교회와 역사≫54(1980년 2월).
차기진,<경향잡지>(≪한국가톨릭대사전≫1, 1994), 351∼352쪽.

 1912년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한국인 성직자들을 위한 잡지로≪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 예수성심지)를 등사판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잡지발간은 1914년에 중단되었다가 1919년에 복간되었으며, 1924년부터는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나자렛인쇄소에서 발행되었다. 본래 여기에는 신학교의 소식을 비롯하여 로마·세계·한국교회의 소식과 강론, 논쟁사항, 이단반박의 역사, 과학 등이 게재되었는데, 홍콩발행 후부터 소식란이 없어지면서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되자 신학교에서 소식지만을 따로 만들어 그 부록으로 발행하다가 1937년 6월 이후에 폐간되었다.432)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타벨라≫(1912∼1937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1913년도 보고서>·<1922년도 보고서>(앞의 책, 1987), 117∼118쪽·169쪽.
한편 덕원신학교에서도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소식지≪神友≫를 발간하였다.

 이처럼 일제초기에는 일반생활과 관련된 언론활동이 미진하였다. 그러다가 민족문화운동, 민족언론기관의 설립과 민족지 창간 등에 자극을 받아 당시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을 주도해 나가던 대구와 서울의 두 단체에 의해 교회신문이 발간되었다. 먼저 대구교구에서는 南方天主公敎靑年會 명의로 가톨릭운동의 계몽과 확대를 표방하고 1927년 4월 1일에≪천주교회보≫(현≪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하였다. 이후 여기에서는 소식보도·의견교환·보조일치의 3대 목표를 기치로 내세우고 소식전달과 교리선전, 護敎 등의 내용을 게재하였으며,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증면을 거듭하였다.433)최석우,<가톨릭 新聞과 敎會言論의 發達過程>,≪가톨릭 신문≫1(영인본, 1982).<천주교회보>는 1931년 7월 7일 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에 의해 교구 기관지로 인가되었다. 한편 서울의 경성교구천주교청년연합회에서도 1924년 9월부터≪청년연합회보≫를 발간해 오다가 대구의≪천주교회보≫창간에 자극을 받아 1927년 7월 10일에≪별≫을 창간하였다. 이후≪별≫은 교회소식·종교도덕·일반교양을 비롯하여 사설·논설·문예·상식 등 다양한 내용을 게재함으로써 가톨릭 문화활동에 기여하였다.434)안홍균,<“별”보에 대한 연구>(≪교회사연구≫6, 1988), 497∼416쪽.

 1933년 3월 6일, 한국의 5개 교구대표들은 서울 명동에서 개최된 연례회의에서 가톨릭운동에 대해 심의한 뒤, 전국 5교구 출판부위원회(위원장 서울의 부주교 Larribeau)를 구성하였다. 전국 가톨릭운동의 통일을 위해서는 교회안의 출판물을 통일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천주교회보≫는 73호를 끝으로,≪별≫은 71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1933년 6월 10일≪가톨릭靑年≫이 창간되어 총독부로부터 제3종 우편물인가를 받았다. 이≪가톨릭청년≫은 ‘가톨릭운동을 분산에서 종합으로’라는 기치 아래 올바른 교리이해와 護敎論을 바탕으로 한 신심함양에 목적을 두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반사상·철학·역사·문학·의학·과학·상식 등 다양한 내용을 게재함으로써 신자계몽과 민족문화의 발전에도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중 한 예로는 李秉岐의<조선어講話>란을 들 수 있는데, 이 欄은 조선어학회의<한글마춤법통일안>전달에 부응하여 문맹퇴치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동참하고자 한 것이었다.435)차기진,<“가톨릭청년”과 교회 언론>(≪교회와 역사≫161, 1988), 9쪽. 그러나≪가톨릭청년≫이 표방한 가톨릭운동의 일치를 위한 역할은 1934년 1월 평양교구에서≪가톨릭硏究講座≫(후에≪가톨릭연구≫,≪가톨릭조선≫으로 개칭됨)를 창간하고, 1936년 봄에 연길교구에서 소년·소녀들을 위한≪가톨릭소년≫을 발간하면서 상실되어 갔다. 게다가 총독부에서는≪가톨릭청년≫의 계몽·문화적인 역할에 주목하여 철저하게 내용을 검열하였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이 잡지는 창간된 지 3년 6개월 만인 1936년 12월호(제4권 1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436)차기진, 위의 글, 7∼8쪽.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당시의 출판과 언론활동을 통해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점이다. 먼저≪보감≫과≪경향잡지≫에서는<대한성교사기>라는 난을 통해 샤를르 달레(Ch. 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Paris, 1874)를 번역 게재함으로써 신자들이 갖고 있던 교회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별≫에서도 한국천주교회약사와 단편적인 세계교회사를 소개하였다.≪가톨릭연구≫에서는 특집호를 통해<대구교구사>,<간도선교사>등을 소개하였으며,≪가톨릭청년≫에서도<신부 金大建(안드레아)의 전기>,<초대 조선교구장인 주교 브뤼기애르(Bruguière)의 전기>,<연길교구사>등을 특집호로 게재하였다. 특히≪가톨릭청년≫에서는 1933년 9월호부터 다음해 6월호까지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교회사를 담당한 신부 피숑(Pichon, 宋世興)의<朝鮮가톨릭史片影>을 연재하였다. 피숑은 이 밖에도 신부 김대건의 약전과 라틴어서한, 조선순교사료 등을 모아 신학생용 교재로 사용하였고, 1938년에는 이를≪朝鮮聖敎史料≫(Pro Corea Documenta)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경성교구천주교청년연합회에서는 1931년에≪조선천주공교회약사≫를 발간하였는데, 비록 그 분량은 111쪽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통사라는 점과 한국인의 신앙과 교회 창설을 올바른 시각에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437)李元淳,<韓國天主敎會史硏究小史>(≪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682∼683쪽. 이밖에도 1924년에는 서울의 부주교 Devred가 저술한≪한국의 천주교≫(Le Catholicisme en Corée)가 홍콩에서 간행되었고, 파리외방전교회의 교회사가인 A. Launay가 한국순교사에 관한 저술을, 일본인들이 한국교회사에 관한 저술을 펴냈으나 모두 한국 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언론활동은 일제의 조직적인 탄압에 의해 침체되어 갔다. 모든 신문·잡지들은 이른바<皇國臣民誓詞>를 서두에 게재해야만 하였고, 황국화정책을 옹호하는 글들을 수록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제도교회는 마침내 그 동안의 태도를 바꾸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 아래 신자들로 하여금 그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일제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경향잡지≫를 제외한 모든 정기간행물들을 폐간하였다. 실제로≪경향잡지≫는 이후 종교적 의미를 상실하면서까지 일제의 정책에 부응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는 언론을 통해 진행되어 오던 천주교회의 문화운동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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