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6. 천주교
  • 3) 문학·건축·예술활동

3) 문학·건축·예술활동

 天主歌辭는 1830년대에 처음 불려지기 시작한 이래 약 1세기 동안 토착화된 한글교리를 신자들에게 전해 주었고, 그들의 교회활동과 신심함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개화기에는 신자들의 의식전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내용상 많은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1909년 1월 8일≪경향신문≫에 소개된 南相殷(마태오)의<국권학가>와 같은 작품이 자연히 소멸되어 가는 대신에 순수교리와 교회를 노래한 가사만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형식상으로도 1910년을 전후하여 4·4조 4음보의 장편가사가 6·4조(3·3·4조)나 7·5조(3·4·5조) 등 3음보의 창가형식을 거쳐 현대시로 계승되었다.438)河聲來,≪天主歌辭 硏究≫(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298∼309쪽. 1911년에 창간된≪경향잡지≫에도 처음에는 3음보의 가사들이 소개되다가 점차 창가와 자유시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1924년에 발간된≪죠션어셩가≫에 수록된 천주가사들은 당대의 가사가 아니라 신부 崔良業(토마스)의<향가>(思鄕歌)나 閔克可(스테파노)의<삼세대의>(三世大義) 등 박해기의 가사 내용 14편이었다.439)張安淑,<韓國가톨릭聖歌의 歷史的 變遷에 관한 연구>(≪韓國敎會史論文集≫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518쪽.
趙善宇,<한국가톨릭성가의 수용사>(宋基寅神父 華甲紀念論叢≪歷史와 社會≫, 현암사, 1997), 188·194쪽.

 천주가사와 같은 가사문학의 소멸을 재촉한 것은 1927년에 창간된≪천주교회보≫와≪별≫에 소개된 현대시들이었다. 이처럼 교회언론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한 가톨릭의 현대시는, 첫째 소재와 내용면에서 가톨릭신앙을 바탕으로 한 시와, 둘째 전통가락을 벗어난 산문시 내지는 자유시로 크게 구분되며, 시기적으로는 위의 언론이 발행되던 제1기(1927∼1933년 전반),≪가톨릭청년≫과≪가톨릭연구≫가 발행되던 제2기(1933년 후반∼1945년)로 구분된다.440)姜熙根,<한국천주교회의 시문학활동>(≪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33쪽.

 우선 제1기에는 시 50편과 시조 6편이 교회언론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대부분이 교회용어를 사용하거나 신앙내용을 주제로 한 가톨릭적인 생활시였다. 그러나 基洙의<독시>, 鄭芝溶(프란치스코)의<뉘우침>등은 생활시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전형의<밋음>, 주병환의<元旦漫吟>, 작자미상의<無題>등은 신앙의 발상과 뼈대로 포장하여 時代苦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제2기에는 시 83편과 시조 14편 등 도합 97편이 소개되었으며, 특히≪가톨릭청년≫을 통해서는 정지용·河漢珠·具常 등과 신부 崔珉順이 많은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오면 교회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 중에서도 가톨릭적인 생활시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26편이나 되며, 창작시쪽으로 이동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현상도 나타난다. 아울러 趙琯昊의<東方步哨>, 松峴의<無題>등 시대나 현실에 관심을 보인 작품들도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시들은 당시의 시대조건을 감안해 볼 때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441)姜熙根, 위의 글, 546쪽.

 이 밖에도 일제치하의 교회언론을 통해서는 소설·동화·동시·산문·평론 등이 꾸준히 소개되었으며, 때로는 영시를 번역 게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연구나 분석결과가 나온 것은 없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전문작가가 아니었고, 일반적인 계몽소설과는 달리 종교적인 내용과 호소를 내포한 교화적인 입장에 치우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별≫에는 자연 혹은 인간적인 정서를 노래한 시가 게재되거나 姜石取의 창작 소설인≪回道者≫가 연재되기도 하였다.442)안홍균, 앞의 글, 414쪽. 또≪가톨릭청년≫을 통해서는 정지용이 모더니즘과 동양정신, 그리고 가톨릭시즘을 지향하는 작품을 발표하였으며,443)정의홍,<鄭芝溶文學에 나타난 가톨리시즘>(≪교회와 역사≫154, 1988), 14쪽. 金起林·李箱 등이 당대의 모더니즘 문학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고, 李東九는 문학평론을 통해 성토마스사상과 중용주의를 바탕으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에 치우치는 것을 비판하였다.444)具仲書,<日帝下의 “가톨릭靑年”誌 연구>(≪교회와 역사≫108, 1984), 16쪽.

 일제치하에 와서는 교회건축에서도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진출하면서 이전에 프랑스선교사들이 설계한 성당이나 一자형 건축물과는 다른 독일식 건축물이 건립된 것이다. 우선 베네딕도회에서는 한국에 진출한 지 1년만인 1910년과 다음해에 걸쳐 백동 언덕에 2층과 3층의 독일식 건물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은 성당과 수도원이 한 건물에 있는 복합식구조였다.445)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1995), 193∼194쪽. 또 베네딕도회에서는 1920년에 원산교구가 설정되면서 새 수도원 부지를 물색한 끝에 원산 인근의 德源에 부지를 정하고 건축을 시작하여 1927년에 U자형 수도원과 신학교를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원산에는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芬道修女會, O.S.B)의 U자형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덕원의 U자형 수도원은 1931년 나머지 한쪽에 성당건물이 들어서면서 ㅁ자형 복합식건물이 되었다.446)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위의 책(1995), 220∼223·251·273·302쪽.

 당시에 건립된 성당 중에는 현재 사적지나 지방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1906년에 건립한 것을 1916년에 증축한 전북 익산의 華山성당(일명 나바위성당, 사적 318호), 1922년에 건립된 안성성당(옛 구포동성당, 경기도유형문화재)은 대표적인 한·양절충식 성당이었다. 서양식성당 중에서는 1896년에 지은 옛 성당을 개축하여 1937년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식성당으로 완공한 인천의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이 유명하다. 또 지방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서양식 성당으로는, 고딕식 첨탑의 장방형인 원주의 龍召幕성당(1915년), 고딕식 첨탑을 갖춘 T자형인 충남 아산의 공세리성당(1921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식인 충남 당진의 합덕성당(1929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당들은 대부분 서양성직자들이 본국의 건축양식을 피상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경우가 많았으며, 따라서 내부 공간보다는 외형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낳은 데다가 건축양식을 상실한 講堂形(천장의 높이가 동일한 단일공간형) 성당들이 많이 건축되었다.447)김정신,≪한국가톨릭성당건축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61∼77쪽.

 이러한 성당건축과 함께 탄생한 것은 聖畵라고 불리는 회화작품과 조각품들이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張勃(루도비코) 작품인 명동성당의 12종도화(1926년), 李順石(바오로) 작품인 약현성당의 성베드로·바오로종도화(훗날 소실됨)를 비롯하여 신의주성당의 성신강림도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성당벽화와 성상작품들은 동양화풍을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하던 당시의 미술계에 영향을 주었다.448)최석우,<韓國의 開化와 그리스도敎>(≪韓國 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455쪽. 또 베네딕도회의 수사 플뢰칭거(A. Flötzinger)는 명동성당에 안치된 신고딕식의 강론대(1915년)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도 서양목공예를 전공한 여러 수사들이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고 하지만,449)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1995), 195∼197·271∼273쪽. 현재 그들의 작품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천주교전례음악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그레고리오성가였다. 그러나 라틴어로 미사가 집전되는 과정에서 불려진 그레고리오성가는 일반신자들에게 하나의 서양음악이었을 뿐이며, 그 의미보다는 단지 경건한 전례의식의 하나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서울교구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성가집인≪죠션어셩가≫를 1924년에 간행하면서 69곡의 성가 중에서 14곡의 가사를 천주가사인<향가>와<삼세대의>에서 차용하였다.450)≪죠션어셩가≫에 앞서 나온 한글성가집으로는≪사리원성가집≫(1921년)과 덕원의≪朝鮮語聖歌≫(1923년)가 있었다고 한다(趙善宇, 앞의 글, 193쪽). 이후 교회전례음악이 더욱 발전해 가면서 대구의≪공교성가집≫(1928년), 덕원의≪朝鮮語聖歌≫(1928년), 연길의≪聖歌集≫(1935년),≪대구교구성가집≫(1936년), 덕원의≪가톨릭성가≫(1938년) 등에 서양식 한글성가들이 계속 수록되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처럼 한글가사들이 성가집에 수록된 것은 한글성가의 발전적인 측면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사들은 노랫말로만 수용되었을 뿐 음악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었으며, 고유의 민족성가로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서양식 한글성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민족음악을 기방음악으로 품하시킨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경건주의 음악관에 빠져 한글가사가 한국적 음악으로 더 잘 표현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고, 셋째로 제도교회가 일제와의 마찰을 꺼려하여 민요풍의 한글성가가 불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51)趙善宇, 위의 글, 183·194쪽. 그 결과 일제치하에 간행된 한글성가집들은 고유의 한글가사를 원용하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발전적인 차원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車基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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