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1. 과학
  • 2) 민간 주도의 해외유학

2) 민간 주도의 해외유학

 한국인이 해외유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무엇보다도 3·1운동의 좌절경험과 이로부터 얻어진 일부의 성과가 그것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활동 못지 않게 그를 대비한 실력양성의 필요성이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서 보여지듯 각 분야에서 절실히 느껴지게 되었다. 특히 전통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의 전환과 이에 대한 열의는 다분히 일제에의 대항 및 대응의 성격을 지니며 거세게 나타났다.

 이 때부터 해외유학이 그 동안의 각종 제재 및 억제조치가 다소 완화된 결과 한결 자유로워졌다. 고등교육기관으로의 진학을 위해서는 일본의 소학교나 중학교 단계부터 유학해야 했던 것이 학제와 교과과정의 개선으로 그렇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한국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일본의 고등학교로, 때로는 전문학교 졸업자들이 곧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 유학기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비로소 짧은 기간과 적은 비용으로도 해외유학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로써 유학의 기회가 일부 특권층-출중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자산을 가진-에서 더욱 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로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464)金根培, 위의 글, 171∼172쪽.

 사실 한국인들에게 해외유학은 앞선 선진학문을 교육받을 수 있는 주된 통로였다. 이 때문에 병합 이전부터 한국에서는 고등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관비유학생을 해외로 꾸준히 파견하였다. 일제도 이 같은 한국에서의 노력을 묵과할 수 없었던 관계로 한동안 관비유학 제도를 그대로 유지시켜 나갔고 결과적으로 이 제도가 해외유학의 대표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들어 개인이 앞장서서 스스로의 힘으로 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민간 주도에 의한 사비유학으로 주된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들에게 국가보다는 각 개인의 주동적이고 자발적인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하게 하였다. 유학 경비를 당사자가 부담해야 할뿐만 아니라 유학과정과 수학후의 진로 등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였다. 결코 식민지 정부가 나서서 해외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장려,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역할은 그것이 한국 통치에 가져올 파장을 예의 주시하며 그 추이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해외유학은 다른 국가에서와는 다르게 정부 주도가 아니라 일찍부터 개인이 앞장서는 민간 주도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해외유학의 주된 대상 국가는 일본과 미국이었다. 일본은 무엇보다 식민지 지배국으로서 정치외교적 관계가 긴밀하고 가장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생활 관습이 매우 흡사한 점 등의 이유로 선호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 본토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국내는 물론 다른 국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훨씬 우대를 받았던 점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에 비해 기독교계 학교 출신자들 중에는 선교사들의 지도 및 후원, 상대적으로 많이 실시된 영어교육, 선진 학문 중심지로서의 인식, 문명화된 국가에 대한 동경심 등으로 미국유학을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졸업후 진로가 불투명함에도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로서 독실한 종교적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미국행을 택하였다.

 일본유학은 1919년까지만 해도 6∼7백 명 수준-다른 국가로의 유학보다 많은 수치이기는 하지만-에 머물던 것이 이후 급격히 늘어나 1923년에는 4천5백여 명에 이르렀다. 물론 관동대지진에 따른 한국인들의 무고한 사상으로 잠시 침체를 맞기도 했지만 다른 국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숫자가 많았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유학생 수가 다시 급격히 불어나며 1940년대에는 전체 규모가 2만 명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중등학교 혹은 전문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어서 대학 재학생은 전체의 1/10에도 크게 못미쳤다.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이들 대학 재학생 중 이공계 전공자는, 과학기술의 인식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전공 선택이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판단에 맡겨짐에 따라, 5% 내외(의학과 농학도 비슷)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465)박성래,<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 연구>(한국과학재단, 1995).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학·문학 등 전통적으로 중시된, 권력 지향에 도움이 될 문과 계통의 학문분야를 전공으로 삼았다.

 이렇게 과학기술을 전공하려고 한 사람들이 적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식민지체제에서 나타난 과학기술을 둘러싼 지배국과 피지배국 간의 사회문화적 괴리에 기인한 바가 컸다. 일본은 일찍부터 서구 과학기술의 수용과 발전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 까닭에 이 무렵에는 이미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발전 정도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 있었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은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녀 이공계 대학은 국가가 운영하는 명문 관립대학에 설치되었고 그 전공자는 사회상층의 집안으로부터 나왔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위상이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오히려 낮아짐에 따라 의욕적이고 우수한 사람들로부터 이공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보다는 사회 중하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전공함으로써 적은 수이지만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이 나오게 되었다.466)당시의 처한 현실로써는 과학기술을 통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신분상승을 기하기가 어려웠음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높지 않은 출신배경으로 인해 과학기술로의 진출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하면 미국유학은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유학생 전체 규모가 일본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고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음에도 대학 재학생은 일본의 절반 가까이에 이른 적도 있었다. 이들은 해외유학에 남다른 의지를 가지고 비교적 많은 준비를 하며 어려운 여건을 헤쳐나가야 했기에 상당수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이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20%(의학과 농학은 15%)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많았다. 이는 일본으로의 유학이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권력 추구와 밀접히 관련된 학문 습득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면 미국유학은 그 같은 길이 막히면서 보다 기술적인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데 요구되는 전공을 선택한 결과였다.467)박성래,≪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 연구 2:미국유학 편≫(한국과학재단, 1998).

 식민지시기 동안에 이공계 대학 졸업자는 총 4백 명 정도가 되었다. 이 수치는 그 동안 추산한 것보다는 훨씬 많지만 그렇더라도 매우 적은 인원에 머물렀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런데 이들 중 국내의 경성제대 출신자 37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해외유학을 통해 배출된 사람들이었다. 국가별로는 일본 2백 명, 미국 1백 명, 그밖에 만주·유럽 등지에서 50명 정도가 나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박사학위자는 극히 적은 약 10명으로 모두가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5명씩 배출되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이학과 공학 박사학위는 李源喆(미시간대학, 천문학)과 崔晃(오하이오주립대학, 화학공학)이 각각 1926년, 1934년에 취득하였다.468)박성래, 위의 책, 72∼87쪽.

 그나마 이 정도의 인력이라도 양성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스스로의 개인적 노력과 주변의 격려에 힘입어 이루어진 해외유학의 덕분이었다. 당시 해외유학은 민족의 앞날이 걸린 거족적인 일로 여겨지던 시대 분위기여서 유학 당사자들은 흔히 많은 사람들의 큰 기대 속에 축하를 받았다. 경제적 여력이 없어도 장래가 촉망되거나 향학열이 남다른 사람들은 가깝게는 주변친지, 멀리는 독지가들로부터 상당히 기대 섞인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올 때도 성대한 환영을 받고 일간지에 그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큼 일대 뉴스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된 과학기술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부수물보다는 한국인 자신들이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서 얻은 결과의 몫으로 크게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교육, 그 하나로서의 해외유학은 일제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응의 한 양식이었다. 민족 전체적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되찾는 데 필요한 실력양성을 기르고 개인적으로는 우월한 능력을 갖추어 차별과 멸시를 벗어나려고 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국가 주도 없이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는 교육을 개인의 책임으로 간주하던 그 동안의 전통적 인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던 전통적인 사고까지 그대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과학기술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수반되어 나타났다.469)金根培, 앞의 글(1998), 171∼17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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