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1. 과학
  • 3) 과학기술자들의 활동

3) 과학기술자들의 활동

 사실 한국인들에게 훨씬 어려웠던 것은 과학기술을 공부할 대학에의 진학보다도 졸업후 자신의 전공과 관련한 일자리를 찾는 일이었다. 당시 이공학 전공자가 진출할 수 있는 곳은 고등교육기관·시험연구기관·관청·대기업 등이었지만 모두 일제가 장악하고 있어 한국인으로서는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단지 이들 기관에서는 한국인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보여 주려는 의도로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을 채용하였던 것이다.470)일례로 최고의 교육기관인 경성제대 이공학부에는 한국인 교수가 한 명도 없었고 경성고공·경성광전, 그리고 시험연구기관인 중앙시험소·연료선광연구소·지질조사소에는 각각 한 두명의 한국인이 있었을 뿐이다. 이에 따라 대다수 한국인 이공학 전공자들은 불가피하게 다른 진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은 중등학교의 과학교원 자리였다. 중등학교는 일제가 운영하는 공립 이외에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이 상당수 있어 그만큼 이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사립학교인 보성고보·중앙고보·송도고보·경신고보 등은 여러 명의 이공계 졸업생을 채용한 대표적인 중등교육기관들이었다. 그런데다가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대단히 가치있는 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그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던 시대상황이어서 이들 이공계 졸업자들도 교육기관으로의 진출을 뜻있게 받아들였다.

 유학 대상국가에 따라서는 미국유학 출신자들이 훨씬 큰 어려움을 겪었다. 피지배민 뿐아니라 외국 학위자들에 대한 일제의 차별로 이들은 소수의 기독교계 기관 이외에는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연희전문·숭실전문·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교육기관들이었다. 물론 이들 기관도 초기에 공부를 마치고 온 소수의 졸업생들에게만 전공과 관련된 일 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불가피하게 미국유학 출신자들의 일부는 자신의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게 되고, 그 상당수는 심지어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등교육기관을 비롯한 과학기술 관련 기관을 누가 세워 운영했는가에 따라 그 역할과 의미는 이처럼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인이 설립한 대동공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등과 함께 선교사들이 세운 앞서의 교육기관들은 학생은 물론 교수진까지도 한국인 중심으로 짜여짐으로써 과학기술 전공자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소중한 활동의 공간이 되었다. 기업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하게 한국인이 설립한 경성방직·대동광업·조선제사 등은 한국인 졸업생들을 채용했고 그들에 의해 운영되어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과학기술 잠재력은 배출된 전공자들의 규모와 더불어 이들이 적절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존재, 확보되었느냐에 따라 좌우되게 되었다.

 한편, 한국인 졸업생 중에는 극히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아주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발휘한 사람도 생겨났다. 분류학이나 광물학 같이 지역 특성이 강한 과학분야에서는 국내의 연구자, 화학이나 물리학처럼 보다 보편적인 과학분야에서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연구자들 중에서 두드러진 연구업적을 낸 경우가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石宙明(가고시마고농 졸업, 생물학), 趙福成(평양고보 사범과, 생물학), 鄭台鉉(수원농림, 생물학) 등이 있고 이들은 전문학교 이하의 학력을 지닌 가운데 정교한 장비 없이도 거주자로서의 지역적 이점을 살려 수많은 성과를 내었다. 그에 비해 후자의 대표적 인물인 李泰圭(교토제대 박사, 화학), 李升基(교토제대 박사, 응용화학), 金良瑕(도쿄제대 박사, 화학) 등은 일본의 제국대학 출신자들로서 명성있는 연구기관에 근무할 수 있게 됨으로써 탁월한 업적을 내게 되었다.471)문만용,<石宙明의 나비 연구와 ‘조선적 생물학’>(김영식·김근배 편, 앞의 책), 203∼236 쪽.
김용덕,≪어느 과학자의 이야기:이태규 박사의 생애와 학문≫(도서출판 동아, 1990), 47∼93쪽.
李升基,≪科學者의 手記≫(평양:國立出版社, 1962), 5∼24쪽.

 특히 이태규와 이승기는 그들이 일궈낸 높은 연구업적과 사회적 지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들은 당시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무엇보다 일본인 과학자를 능가하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냄으로써 자신들이 지닌 능력을 널리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식민지 기간에 발표한 논문편수는 이태규 37편, 이승기 48편으로 일본의 유명 과학자들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수준에서도 이태규는, 물론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물리화학 분야에서 그 동안의 성과에 힘입어 리-아이링(Ree-Eyring)이론을 창안하고, 이승기는 섬유화학 분야에서 나일론에 뒤이어서 새로운 합성섬유인 합성1호(후에 북한에서 비날론으로 명명)를 개발할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472)물론 논문편수로만 보면 한국인 과학자 중 석주명과 조복성이 1백편 내외의 논문을 발표할 만큼 더 많았지만 그것은 사례연구 위주로 이루어지는 분류학 분야의 학문적 특성에 크게 기인한 결과였다.

 이들이 억압적인 시대 상황에서도 뛰어난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체제가 빚어낸 과학활동의 이중성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대다수의 한국인 과학자는 일제의 지배로 말미암아 수준 높은 교육과 연구경력을 쌓을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고등교육 및 연구기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나름의 연구활동이 가능한 박물학 같은 분야에서나 한국인의 움직임이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내에서 한국인이 상당수 참여한 가운데 조선박물학회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정밀과학(exact science)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고 이어 그곳의 과학기관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한국인 과학자들은 주변부에서 지역적 특성을 띤 과학활동을 한 반면에 극소수의 사람들은 중심부로 진출하여 국제수준의 과학활동을 벌일 수 있기도 하였다. 양극화된 과학활동이 식민지체제라는 시대상황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같은 민족의 연구자들에 의해 행해지며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과학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당사자들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은 물론 주변에서 쏟은 애정어린 관심과 후원도 큰 몫을 하였다. 이들은 피지배민 한국인들에게 가해지는 민족적 열등과 모멸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우월한 능력을 선보임으로써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려 하였다. 한 가족이나 집안에서는 집안의 앞날을 위해 적어도 문중의 한 사람, 대개는 집안의 장자를 선정하여 집중 지원하는 방식으로 당면한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실력을 보일 경우 그들은 기업가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독지가들로부터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473)일례로 이태규는 경성방직의 김연수와 금강제약의 전용순·이승기는 역시 김연수로부터 연구활동에 대한 지원금으로 각각 1만원 이상의 거액을 받은 바가 있었다. 이같이 당사자, 주위 친지, 그리고 독지가들의 노력이나 관심, 후원이 없이는 과학기술에 관해 고등교육을 받고 일부는 탁월한 업적까지 내게 된 것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의 활동이 식민지 한국 과학기술의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과학기술자들과 그들이 벌인 활동이 다소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전문과학의 형성, 즉 전문화와 제도화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존재했던 주요 과학단체와 과학기관들은 어느 하나 한국인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참여 속에 설립 및 운영된 것이 없다시피 하였다. 한국인 박물교원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회를 만들거나 연희전문 이과교원들이 과학클럽을 운영하는 등의 일들은 있었으나 큰 흔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다분히 그들은 고립된 개인으로서 각자 자신의 과학활동을 영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 과학기술에서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식민지적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말미암아 일반대중 및 학생을 상대로 한 계몽활동을 비교적 활발하게 벌였다. 이 때만 해도 과학기술교육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었던 관계로 사회 전반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은 형편이었다. 때문에 과학기술자들은 과학계몽을 자신이 담당해야 될 중요한 과학활동의 하나로 여겼다. 그들은 이를 통해 전래의 미신적인 관습을 타파하고 가정과 생활을 과학화하며 나아가서는 근대교육과 산업도 크게 진흥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특히 1930년대 중반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과학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 속에 집단적으로 표출된 가장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과학운동은 金容瓘(경성고공, 요업)을 비롯한 초기에 경성고공을 졸업한 사람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실질적인 주도자로서 김용관은 각계 인사들의 영입을 통한 발명학회나 과학지식보급회와 같은 단체의 조직에서부터 활동방향 제안, 행사 기획, 대중 선전, 잡지 발간 등 모든 일들에 앞장을 섰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 과학운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김용관 개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를 도와 혹은 그와 함께 과학운동을 벌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로는 李 仁(변호사), 朴吉龍(경성고공, 건축), 玄得榮(경성고공, 염직) 등이 있었다. 그만큼 이들은 한국에서 과학기술에 관한 고등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의 갱생에 도움이 될 과학기술에 대해 고심하고 그것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474)임종태, 앞의 글, 237∼273쪽.

 이 때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논의된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방향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실정에 적합한 방향으로 과학기술을 진흥시켜 나가자는 한국적 과학기술 발전론과 서구나 일본의 앞선 과학기술을 적절히 수용, 활용하여 과학기술 진흥을 도모하자는 보편적 과학기술 발전론이 그것이었다. 한 쪽은 한국 산업의 자립화(소공업화)를 내세우며 그에 활용될 과학기술의 독자적인 발전을 내세웠고 다른 쪽은 한국 산업의 근대화(대공업화)를 역설하며 그에 요구되는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확보를 주장하였다. 이들 두 흐름은 아주 판이하지만 공존하며 당시 한국인 과학자들의 과학관의 주된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은 식민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자기 발전과 개발, 한국 내에서의 과학 정착 등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중에서 과학기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다수 등장하고 그 중의 일부는 아주 뛰어난 과학적 성취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은 현대 과학기술의 핵심적 특징으로 부상하고 있던 연구활동보다는 일반대중을 계몽하고 다음 세대를 교육시키는 일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대두된 대립적인 과학기술관, 과학활동의 이중성 등은 이후에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심사숙고해서 풀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게 되었다.475)金根培,<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기술-개발의 씨앗>(≪역사비평≫56, 역사문제연구소), 297∼313쪽.

<金根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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