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2. 음악
  • 1) 제1기-무단통치기의 음악
  • (4) 민족음악의 전개

(4) 민족음악의 전개

 한국근대음악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점은 노래를 운동으로서 불렀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 이전의 노래들은 애국계몽가와 항일의병가로서 계몽과 국권회복을 노래하였지만, 1910년 이후로는 민족적 울분과 반일독립의 애국적인 노래(창가)로 민족음악의 중심이 되었다. 이미 일본도 메이지(明治)시기부터 쇼오카(唱歌)나 온가쿠(音樂)가 일본국민으로서 國調를 일으켜 새로운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되는 대표적인 분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차원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한국의 창가들은 테라우치총독이 1911년 7월 1일 각도 장관회의 시정연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독립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을 반대하는 불량창가이자 위험한 노래”였으며, 그래서 “이것들은 물론 허용하지 않는 일이니 취체상 가장 주의가 필요”하므로 “일본은 실력으로서 이를 진압할 것이고, 이 때문에 오직 조선인만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단언한 노래들이었다. 그만큼 한국의 창가들은 애국창가이자 독립을 고취하는 노래들이었으며, 학교와 교회를 비롯하여 국내외의 항일운동 현장에서 불리워졌다.

 따라서 한국의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음악을 가장 엄한 불경죄로 다스리기 위하여, 1912년 3월에 制令으로 정한<조선형사령>이나<조선민사령>을 기존의<보안법>이나<출판법>등과 함께 적용하여 2중으로 처벌하였다.

 창가집 사건은 일제가<출판법>과<보안법>은 물론<조선형사령>까지 적용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경기도 개성 韓英書院의 창가집 사건, 함남 금야군의 사립문명학교의 창가집 사건, 함북 경성군의 사립온천학교의 창가보급사건 등이 그것으로, 이 중에서 1917년의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이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491)박우영,≪조선음악사≫1하(예술교육출판사, 1985), 71쪽. 한영서원은 尹致昊가 개성에서 경영하는 학교로서 이 학교 졸업생이자 소학과 교사로 있던 신영순·백남혁과 서기 오진세, 음악과 교사 정사인, 그리고 권사 이경중들이 애국창가집을 발행하고 보급하였다고하여 1917년 9월<조선형사령>에 의한 불경죄와<출판법>과<보안법>위반 판결을 받고 징역과 구류처분을 받은 사건이 바로 ‘한영서원 창가집사건’이었다.492)京畿道 警務部報告,<警高機發 第527號>, 不穩者 發見處分 1件, 1915년 11월 13일.
<京畿地方法院 刑事部 裁判記錄>, 1917년 9월 5일.
한영서원 창가집은 한영서원은 물론 같은 지역의 호수돈여숙, 그리고 남북예배당 및 그 밖의 동지들에게 보급되었다. 바로 이 창가집엔 일제가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통제한<영웅 모범>·<경부철도>·<한양가>·<대한혼>·<애국가>·<선죽교>·<구주전란>등 조선총독부 금지곡 등이 수없이 담겨져 있었다.

 창가사건은 이들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전국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애국적인 노래들이 불리워졌다. 1914년 4월엔 배화여학교에서 학생들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존하세”라는 애국가를 “왜국사람 왜국으로 기리 망하세”로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하면서 수업을 거부하였다. 또 1916년 강원도에서 불온 창가집이 발견되었다는 경찰보고를 보아도 당시 강원도에 항일애국의 노래들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93)조용만·송민호·박병채 공저,<일제하의 한국저항문학>(≪일제하의 문화운동사≫, 현음사, 1982), 249·252쪽.

 한편 1914년 북간도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의 광성중학교에서 펴낸 등사판≪最新唱歌集 附 樂典≫은 모두 153곡의 애국노래와 악전을 음악문답으로 소개한 총 250여 쪽의 창가집이었는데,<치안법>위반의 금지 창가집이 되었다.494)재간도 일본총영사관 산하 외사경찰이 1914년 외무성 외무대신(加에藤高朋)에게 보고한<最新唱歌集 發賣禁止ニ關スル件>에 의한다. 그러나 이 창가집은 중국 동삼성(만주)에 망명한 동포들이 1911년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연길) 소영자에 설립한 민족학교인 광성중학교가 중심이 되어 만주와 국내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불리워졌다.495)수록된 애국노래들은<국기가>·<혈성대>·<애국>·<조국생각>·<망향>·<대한소년기개>·<대한혼>·<자유>·<한반도>·<건혼절>·<독립>·<단군>·<민충정공 추도>·<학생 추도>·<조선혼>·<영웅 추도>·<대한제국국가>등이었다.

 이 밖에<신흥무관학교 교가>는 독립군 진영뿐만 아니라 일반 교포와 청년학생들까지 널리 불리워졌다. 또<신흥학우단가>를 비롯하여<봉기가>·<용진가>·<국치추념가>·<작대가>·<운동>·<격감가>등이 만주의 항일지역에서 널리 불리웠다. 미국 망명동포들이 1913년에 창간된≪신한민보≫에서는 “기억해 아날옴, 못니즐 치욕을”과 같은 항일애국시가를 발표하여 ‘노가바’할 수 있도록 하였다.496)셩빈,<8월 29일>(≪신한민보≫, 1917년 9월 14일). 또 1915년 같은 신문에 “저 먼 운소 중에, 펄펄 높이 날며, 만세 영광 자랑하리, 우리 국기로다”라는 애국시가를 비롯하여 같은 해 6월 17일자에는 음악가 이성식이 ‘도산션이 저술한 노래’ 가사를<격검가>란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10년 4월 발매금지와 함께 압수당한≪중등창가≫의 저자로서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1910년대 국내의 학교와 교회는 물론 국외에서 불리웠던 노래들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기 노래의 줄기를 받아 민족적 울분과 반일독립운동 노래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 일제의 한국문화말살정책에 의하여 전통적인 음악제도의 약체와 해체는 물론 그 음악들도 금지곡으로 통제받았다. 그 음악들은 바로 민족정신과 함께하는 민족정서의 근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역사적인 민요를 비롯하여 기악작품들을 발굴정리하고 보존하는 사업은 시대적이면서 민족적인 요구이었다. 이러한 시대적·민족적 요청에 공헌한 음악가가 김인식·이상준 등이다. 김인식이 1914년 서울의 창문당에서 발행한≪朝鮮 舊樂 靈山會上≫은 당시 민간 기악곡으로 널리 알려진 양금보로 된 고악보를 양금의 구음인 육보와 함께 양악보로 작업한 최초로 악보이다. 이리하여 한국 전통음악과 양악문화와의 만남을 열어 주었다. 또한 이상준은≪조선속곡집≫(상권, 1913),≪죠션잡가집≫(1916),≪유진 조선잡가집≫(1918) 등 3권의 민요를 비롯한 잡가집을 5선 양악보로 발행하였다. 즉, 우리 나라 서도민요와 남도민요 그리고 경기민요 등 전국의 민요를 가사는 물론 오선악보와 숫자악보로 채보하므로써 우리 민요에 대한 깊은 조예로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497)이상준의<아리랑>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아리랑>과 장단(6/8)과 시김새 처리가 다른 우리식 민요로 채보한 작품이다. 현재 부르고 있는<아리랑>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일본식으로 작곡한 4분의 3박자의<アリランの唄>이다. 노동은,≪노동은의 음악상자≫(웅진출판, 1996), 109∼120쪽. 이들 외에 최창선 편의≪가곡선≫(1913), 김학규 편의≪조선음률보≫(1916), 미상의≪조선신구 신가총서≫(1916), 송기화 편의≪정정 증보 신구잡가≫등이 출판됨으로써 우리 음악의 정리와 역보 및 채보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민족기악양식인 ‘산조’라는 명칭이 대외적으로 공식화될 정도로 산조연주가 빈번해지면서 산조시대가 변함없이 전개되었다. 특히 김창조가 1915년 전후로 전주와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야금 산조는 물론 거문고 산조와 젓대 산조, 그리고 가야금 병창·단소·해금 등 전 분야의 기악과 성악이 공연되었고, 1917년 장별제 산조를 완성하여 20년대 광범위하게 산조의 시대를 열어갔다.498)민족음악연구소 편,<유산연구, 김창조(金昌祚)와 가야금산조>(≪조선음악≫1기,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2), 40∼48쪽. 즉, 1890년대 중반이후 시나위나 봉장취 등의 기악곡과 판소리 장단에서 발전시킨 민족기악형식인 산조가 김창조에 의하여 장별제 산조로 정형화되어, 20년대 산조시대가 본격화되어 우리나라 민족음악발전에 전환을 이루었다.

 한편, 일제의 조선문화예술의 약체화·해체화속에서도 기층민중에 뿌리를 둔 판소리와 창극을 유지·보존하려는 운동이 펼쳐졌다. 명창 김창환과 이동백이 앞장서서 1915년 3월 16일에 ‘경성구파배우조합’을 설립하였는데, 이들은 “장래 남의 치욕을 면하고 修身 잘하여 조합의 발전기초를 위함”이라고 그 설립취지를 밝힐 정도로 안팎의 부정적 시각을 극복하고, 자기 나라 문화를 치욕스럽게 여기도록 몰아가는 일제에 울분을 삼키면서 조합 발전을 모색하였다.499)≪매일신보≫, 1915년 4월 1일. 그들은 광무대와 연흥사에 속하는 남녀 예술인들과 기타 여러 예술인들을 영입하여 조합장에 장재옥을 선임하고 자신들은 지도선생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경성구파배우조합’은 1928년에 창립된 ‘조선음악협회’, 1930년 여름에 창립된 ‘조선음률협회’, 1934년 5월에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로 맥을 이어가면서 한국음악의 부흥과 보급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500)한편 양악계는 김영환·홍난파·김형준 등이 중심이 되어 1919년 10월에 ‘경성악우회’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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