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2. 음악
  • 3) 제3기-전시체제하의 음악
  • (2) 전시체제하 노래 및 음악교육

(2) 전시체제하 노래 및 음악교육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기부터 ‘내선일체’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 전면적으로 皇音化政策을 강행했다. 크게 두 가지로 황음화정책을 강행하였는데 그 하나는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대량 소통매체인 신문·잡지·라디오·레코드·영화 등의 매스미디어로 일본의 음악체계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노래’에 의한 황음화정책은 학교교육에 의하여 ‘皇國臣民된 情操를 함양시키는 데’ 걸맞은 가사와 곡조를 선정하여(소학교 규정 제26조) 강화시키는 방법과 음악지배계급에 의한 ‘가창지도대’를 만들어 사회교육화하는 방법이었다.

 일제는 1938년 제3차<조선교육령>에 의거한 음악교과목표를 ‘황국신민된 정조를 함양’시키려는 데 두고, 이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먼저 사범학교와 초등학교 등의 교재를 개편했다.521)제3차<조선교육령>시기의 음악교과서는 조선총독부가 모두 9권을 발행하였다. 1939년의≪みくにのうた≫, 1939년≪初等音樂 第一學年用≫, 1939년의≪初等音樂 第二學年用≫, 1940년의≪初等音樂 第三學年用≫, 1940년의≪初等音樂 第四學年用≫, 1941년의≪初等音樂 第五學年用≫, 1941년의≪初等音樂 第六學年用≫, 1942년의≪ウタノホン一ネン≫, 1942년의≪ウタノホン二ネン≫등이 그것이다. 교과목적은 1938년에 발행한≪新制音樂要義≫에 잘 나타나 있었다.522)京城의 朝鮮圖書出版株式會社에서 발행한≪新制音樂要義≫는 1938년 3월 11일에 조선총독부 검정필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황국신민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창가과가 결코 단순한 기능과가 아니고 魂의 교육, 정신 교육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혼’이란 곧 일본정신인 것이고 이 정신에 따라 음악교재가 선택되어야 함이 음악교육의 목적이자 교재론의 기준임을 강조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가 리츠(律)음계와 4/4박자로 된 일본국가<키미가요(君が代)>이다. 전시체제하의 일제는 일본국가<키미가요>를 제1국가로,<우미유카바(海行かば)>를 제2국가로 지정하고, 모든 음악회를 비롯한 행사장의 개회는 제1국가로, 폐회는 제2국가로 부르도록 강제화시켰다.

 제3차<조선교육령>에 따라 초등학교 음악교재 역시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조함양에 적절한 창가채택에 유의”하도록 개편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1940년의≪초등창가≫는 1943년에≪초등음악≫로 바뀌면서 학년당 20%(25곡 중)가 의식·군가로 편성된 반면, 동요적 창가는 극소수로 편성하였다.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연상시키는 가사나 악보가 하나도 없는≪초등음악≫의 경우 전체 59%가 일본의 음계이고 나머지가 서양음계인데다, 박자도 4/4, 2/2박자 중심이어서 민족음악체계와 전혀 달랐으니, 초등교육에서 정서적 지배체계가 완성된 셈이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음악지배계급과의 결탁에 의한 일본음악체계로 황음화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①가요정화운동, ②시국가요창작보급, ③가창지도대에 의한 계몽운동, ④가창집 발간 등을 음악전문인이 권력체계와 합의하에 전개되는 황음화정책을 말한다. 가요정화운동은 황민화라는 시국적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여기에 총독부 관제단체인 조선문예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음악협회 등의 중요 역할이 있었다. 가요정화운동에서 가요는 “시국가요-애국가요-건전가요”이었고, 그것에 반하는 노래가 “퇴폐가요-반체제가요-불건전가요”로 분명하게 대비시켜 정화의 대상으로 삼아갔다.

 당시 가요정화운동의 대상이 되었던 가요들은 1927년 관영 경성방송국(JODK)가 개국한 다음부터 일본의 빅터·콜롬비아 지사와 폴리도르가 한국에 진출한 이래 30년대부터 국내 레코드사가 일본기술과 자본에 종속되면서 대량적인 소통구조를 형성, 전성기를 열어놓았던 가요들이었다. 또 2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서 금융공황과 농업위기 그리고 세계공황으로 일본의 자본주의가 전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을 때 일본 대중을 폭발적으로 휘어잡았던 민요조의 고우타(小唄)인<출범의 항구(出船の港)>,<당신 그립다(君戀し)>등과 30년대 일본가요계의 우상인 코가 마사오(古賀政男)가 부른<술이란 눈물인가, 한숨인가?(さけは淚かためいさか)>, 그리고<여보 왜요?(あなた なんたい)>등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음악소통 전개가 일제와 같은 음악체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홍도야 우지마라>(1935),<나그네 설움>(1938) 등 한국의 대중가요들은 30년대 후반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 통치체제 앞에서 눈물과 애수·정한·사랑·이별·도피·한숨 등을 나타내며 대중적 삶을 압도시키며 그 시대를 적응해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 대중가요는 1860년대부터 ‘엔카’(演歌)류로 불렸던 것이고, 1894년 이후 발음이 같은 ‘엔카’(艶歌)라는 용어와 혼용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노래들을 조선총독부는 시국상황에 따라 정화의 대상으로 삼거나 때로는 묵인하고 있었다.

 자연히 조선총독부나 한국대중가요계는 일본음악의 음계와 박자체계로 황민화를 찬양하도록 만들어진 친일가요(시국가요·신가요·시국가·애국가요 등)를 이 기간에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작곡자 이종태·이면상·손목인·박시춘·전기현·정진규·한상기·이운형·김준영·김해송·이재호 등은 가수 고운봉·이규남·김영춘·옥잠화·이해연·남해성·김정구·남인수·장세정·백년설·이화자·이난영·김용환 등과 함께<총후의남>·<정의의 사여>·<열사의 맹서>·<총후의 기원>·<정의의 행진>·<종군간호부의 노래>·<승전의 쾌보>·<사막의 환호>·<군사우편>·<동아의 여명>·<승전가>·<병원선 일기>·<보내는 위문대>·<정의의 행진>·<아들의 혈서>·<결사대의 안해>·<혈서지원>·<이천오백만 감격>·<장렬이인석 상등병>·<지원병의 어머니>·<반도의용대가>·<남아의의기>·<소년용사>·<전장의달>·<복지만리>등의 작품을 선전하며 부르고 있었다.523)노동은,<일제하 친일음반과 대중음악계>(≪현대사상연구≫9, 목원대 현대사상연구소, 1995), 135∼150쪽.

 한편, 시국가요 창작 보급의 대표적인 예가 방송을 통한 보급이었다.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는 전시동원체제를 찬양한 대부분의 일본음악 특징을 지닌 작품을 모아≪가정가요≫란 이름으로 발행하여 보급하였다. 여기에 박태준·홍난파·임동혁 등의 친일가요 작품이 널리 권장되고 있었다. 이광수는 박태준과 함께 만든 곡<지원병 장행가>에서 한국청년들이 천황폐하의 명을 받아서 지원하라는 가사에다가 일본의 요나누키장음계와 2박자로서 작곡한 노래를 보급하고 있었다. 또 이광수가 작시하고 임동혁이 작곡한<애국일의 노래>, 그리고 춘원이 작시하고 홍난파가 작곡한<희망의 아침>은 모두 일본음악으로서 “천황의 뜻을 받아 일장기 날리는 것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릴 희망의 아침”이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시작과 함께 전시체제는 긴박한 신체제로 전환되면서 한국인 3,400만 명을 ‘감격적’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중개매체는 ‘국민가요’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 분야에 집중적인 문화정책을 펴나가게 된다. 곧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만든<일억의 결의>과<대동아 결전의 노래>그리고<총후반도의 노래>·<우리는 제국군인>·<어머니의 기원>등 모두가 신문·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 두 가지 중요한 음악총력전을 펼치는데, 하나는 가창지도대 운영과 또 하나는 ‘국민가집 발행’ 보급과 함께 대대적인 국민개창운동이었다. 물론 가창지도대는 조선음악협회 소속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운영은 조선총독부내 사무국으로 옮긴 연맹이 주관하였다. ‘국민사기 앙양과 건전 정조를 일본정신으로 육성’하자는 취지 아래 ‘국민개창운동회’를 병설하여 1943년 초부터 연말까지 국민개창운동기간을 설정하여 전개하였다. ‘국민가창운동 정신대’라고 하는 가창지도대는 조선음악협회와 공동으로 산업전사가 있는 각 공장·광산·학교 등 연맹산하 현장을 찾아 음악회를 열었다. 국민개창운동의 두 번째 작업은 일본 정서로 애국적이고 건전한≪국민가집-우리들의 노래≫(1941) 발간과 함께 일본에서 나온≪국민가요 명곡집≫ 등 각종 국민가요집의 공급과 지도였다.524)≪國民歌謠曲集≫(東京:新興音樂出版社, 1941). 그리고 전국에 36만 개 班에 448만 명의 반원으로, 회사·은행·공장·광산·대상점·학교에까지 직장연맹으로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은≪국민개창가집≫의 작품을 확정하고 각 연맹원이 ‘중점적으로 불러야 할 노래’를 선정·시달하였다. 물론 전부 일본어로 된 일본음악이었다.

 매체 지배구조 역시 지금까지 노래에 의한 황음화정책과 달리 신문·잡지·라디오·레코드·영화 등 대중매체와 음악공간을 이용한 ‘황민화-황음화정책’이 실시되었고, 전문성을 가진 음악인들에 의해 일본음악체계가 정당화되어 갔다. 즉, 일제가 대중조작으로 일본노래를 이용하였다면, 전문음악인은 이 분야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신문·음악공간을 자기 지분으로 병행시켜 일반 지식인뿐 아니라 자신들도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신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관제신문인≪매일신보≫에 계정식·김관·김재훈·박경호·박용구·이면상·홍난파·히라마 분쥬 등이 일본정신과 그 음악체계를 정당화시키며 활동하였다.

 1940년 4월 일본군부는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 직후 독일을 모방하여 ‘신체제’를 수립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한 제국주의의 파쇼적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간다. 여기에서 “세계는 지금 신체제시대로 되었다. 세계의 신체제, 동아의 신체제, 일본의 신체제, 구주도 신체제에 있다”고 본 일본제국주의가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을 정당화시키며, 전시체제를 신체제로 정비하고, 문화예술계의 개편을 전면적으로 시작하면서 조선음악협회가 결성되었다.525)<新らしき文化圖體の動き(새로운 문화단체의 움직임)>(≪三千里≫, 1941년 4월호), 528∼538쪽. 조선음악협회 뿐만 아니라 경성후생실내악단, 대화악단, 대동아악단 등에 소속된 음악인들의 음악 활동은 더욱 강화되어 결국 식민본국의 지배체제와 사회적 힘의 매체로 외세의 음악체계를 이 기간에 더욱 정당화시켰다. 음악인들의 신사참배, 음악보국 연주활동 전개, 창씨개명한 이름 사용, 그리고 반시국적 음악과 음악인들을 스스로 숙정하였다. 내선일체를 구현시킬 수 있는 성전 부여 신궁에 음악인들의 참석, 예술부문을 망라한 관계자가 조선신궁 풍영료에서 연성훈련, 또는 태평양전쟁 제3주년을 맞아 개최한 문화단체 필승결의선양대회에 20명의 조선음악협회 중진들이 참석하였다. 1944년 7월 26일에 ‘國歌奉納大會’를 조선음악협회 주최로 열려 일본국가를 봉납하고 총독부까지 시가행진하여 음악보국을 맹서하는 것들이 그것이다.526)≪朝鮮年鑑≫(京城:京城日報社, 1944), 228쪽. 또 음악보국주간 설정과 음악보국 음악회, 국민음악의 밤, 군가의 밤, 국민가곡 현상모집, 싱가폴 함락 전첩축하 대음악회, 총력앙양 야외음악회, 국민개창운동, 국민합창 야외음악회, 국민음악연주회, 전함 헌납 음악보국의 실내교향악의 밤, 징병실시 감사 축하행사, 전함건조 기금헌납을 위한 梨專추계음악회, 비행기헌납 음악대연주회, 후생음악주간 설정과 음악회, 군인원호대연주, 전국순회 결정음악회, 應徵士家族 위안음악회, 동원학도 위문음악회, 본토 결전 부민대회 음악회 등처럼 일제의 핵심적인 행사에 음악인들이 앞장 섰다. 그리고 황국의식과 시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조선흥행 등 취체규칙>(1944. 5. 8 공포)에 따라 음악인들의 자격 심사를 시행하여 기예증을 교부하는 등 악단 숙정을 단행하였다.527)악단 숙정뿐 아니라 연예·창극·연극 등 모든 무대예술인에게 실시한 자격인정시험은 곧 막바지 시국통제를 위한 숙정작업이었다. 음악인들에 대한 ‘음악기예가 자격증’ 시험은 1944년 8월 16·17일에 배재중학교에서 실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태평양전쟁 이후 음악도 전쟁의 무기로 삼고 ‘전시총력의 6대 방책’을 결정하거나,528)노동은, 앞의 책(1989), 160∼161쪽 및≪朝鮮年鑑≫, 228쪽. “불건전한 가요음곡을 보급시키는 것이 레코드의 죄과”으로 여기어 레코드 발매도 규제하였다.529)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장이 1941년 12월 14일 발표한 각 문화관계 단체에 발송한 ‘전시총력 6대 방책’은 ①국민사기, 선양운동 ②사상전의 수행 ③전시생활의 강화운동 ④전시생활 과학의 보급 ⑤예술오락의 동원 ⑥언론문예의 전시동원 등이 그것이다.≪매일신보≫, 1941년 12월 14일. 그리고 1939년 11월<조선민사령>을 개정함에 따라 한국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명으로 바꾼 소위 ‘창씨개명’한 음악인 이름이 40년대 벽두의 음악회 프로그램, 신문 등에 공식화되어 갔다.530)모리카와 쥰(森川潤, 홍난파), 쿠로야마(玄山濟明, 현제명), 카네시로(金城聖泰, 김성태), 나오키(直木興烈, 이흥렬), 하리모토(張本仁範, 이인범), 다쓰야마(龍宮天愛, 김천애), 스즈키(鈴本貴一, 이종태), 코오무라(香村實, 박경호), 카네야마(金山生麗, 김생려), 키야마 히데코(木山英子, 이영선), 이토오 미쓰요시(伊東光善, 윤광선), 다카시마(高島宗益, 고종익), 요시모토(義元仁亨, 이인형), 키시모토(岸本仁洙, 김인수), 토요하라(豊原東爀, 임동혁), 마루야마(莞山東日, 이동일), 사쿠무라(作村甲洙, 한갑수), 타카다(高田淸子) 등이 창씨개명의 예이다.

 한편 내선 일체된 국민으로서 일본국민음악을 수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일본 전통음악인 시긴(詩昑)·와카(和歌)·찌시마(千島)곡·샤미센(三味線)에 맞춰 부르는 ‘고우타’(小唄)나 ‘나가 우타’(長唄) 그리고 샤미센과 더불어 일본 민족악기의 세 가지 대표적인 악기인 고토(箏)·샤쿠하치(尺八) 등에 얹힌 세 가지 악곡(三曲, 산쿄쿠) 등 일본음악이 조선음악협회 주최의 연주회를 비롯하여 학교 교육, 교습소 등지에서 그 소통이 확산되고 있었다.

 일본 군가<미·영 격멸의 노래(勝ったぞ日本)>, 내선일체를 극명하게 표현했다는 무용시곡<부여회상곡>, 그리고 조선군 보도부의 영화작품으로 육군중위 林得一이 지휘한<헤이타이 상(兵隊さん)>, 일본 제2국가로 명명되고 불린<우미유카바(바다로 가면)>의 작곡가 노부토키 기요시(信時潔)와 이 시대 시인·가인으로 알려진 키타하라 하쿠슈우(北原白秋)의 합동작품인 칸타타<海道東征>, 일본 제1세대 작곡대부인 야마다 코오사쿠(山田耕莋)의 가곡<탱자꽃>·<들장미>,531)야마다는 이때 일본음악문화협회장과 일본연주가협회 음악정신대 대장이었다. 그리고 나카야마 신파이(中山晋平) 등의 작품들이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었다. 또 현제명의 가곡<후지산(富士山)을 바라보며>, 윤두선의 군가<일본정신>, 이유성의 트롬본 소품<황성의 달>, 계정식의 바이올린 소품<앗쓰島의 영웅에게 바치는 선율>, 임동혁의<미국은 적국되고(アメリカは 敵國なり)>등의 일본국민 음악이 창작·연주되었다.

 일제는 전시체제하의 방공소리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1942년 전국에 걸친 ‘音感훈련’과 향상을 목표로 음악사회교육 확대와 경연대회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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