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2. 음악
  • 3) 제3기-전시체제하의 음악
  • (4) 민족음악의 전개

(4) 민족음악의 전개

 1930년대 이전의 항일노래가 단기적이고 분산적인 유격전에서 불리워졌다면, 1930년이후부터는 한층 조직적으로 불리워졌다. 한중聯軍에 의한 항일가요로서<중조민족단결항일가>와<전투가>가 송화강 연안의 농촌과 광산에서 불리워졌다.532)李敏 編·李勝權 譯,<항일투쟁 열화 속에 태어난 항일련군의 노래>(≪東北抗日聯軍歌曲選≫, 哈爾濱, 東方經濟文化中心, 1995), 7∼20쪽. 또 당시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김학규 작사·작곡한<전우추모가>가 불리워졌으며,533)이중연,≪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혜안, 1998), 181∼182쪽. 김학규의 부인이자 광복군 3지대 대원이었던 오광심이 1934년초 임시정부를 찾아가며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라는<님찾아 가는 길>도 함께 불리워졌다.534)이중연, 위의 책, 182∼183쪽. 이 밖에도 1930년대부터 해방때까지 조선혁명군이나 조선의용군들에 의해 항일민족가요가 조직적으로 불리워졌다.535)독립군가보존회,≪독립군가곡집-광복의 메아리≫(독립군가보존회, 1982).
韓哲洙 編,≪獨立軍詩歌集 倍達의 脈搏≫(사단법인 독립동지회, 독립군시가집편찬위원회, 1984).
전정혁 편,≪조선족 항일투쟁노래선집≫(沈陷:遼寧民族出版社, 1995).
이중연, 위의 책.
李敏 編·李勝權 譯, 앞의 책.

 한편 국내에선 1938년 거문고 명인이자 동경제대 출신인 박석기와 명창 박동실이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초당에서 민족의 구국 영웅인 유관순·안중근·윤봉길·이준 등의 네 열사와 김유신·이순신 장군 등의 민족영웅들을 소재로 박동실제 열사가를 만들어 일제에 항거하는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 갔다.536)노동은,<음악가들과 3·1절>(앞의 책, 2001), 332쪽. 여기에서 임소향·김소희·한승호·박귀희·김동준·박후성·한애순·장월중선·김녹주·임춘앵 등 후에 한국판소리와 여성국극의 30여 명의 거목들이 당시 10∼20대로 활동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제강점하에서도 김세형의<뱃노래>와 윤이상의<편지>, 그리고 안기영의 조선가극 작품들은 기존의 가곡이나 가극과 달리 뜨거운 민족적 감정으로 창작하여 서양과 일본의 창작흐름을 민족음악으로 풀어가려 했다. 드디어, 해방직전인 1945년 8월 10일 작곡가 金順男은 ‘대중 속에 발을 힘차게 들여놓을 역사의 찰나’를 생각하며 민요풍의<자유의 노래>를 지어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537)김순남,<나의 음악수업>(≪예술평론≫3·4월 합병호, 예술평론사, 1948), 76∼79쪽.

<魯棟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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