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4. 체육·무용
  • 1) 일제하 근대체육의 성장과 시련
  • (2)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와 민족체육의 성장

가. 3·1운동과 민족체육의 재인식

 일제의 무단적이고 침탈적인 식민정책에 대해 조선은 1919년 3·1운동을 통해 거국적이고도 민족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였고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3면 1교를 목표삼아 보통학교의 증설이 꾀해졌고, 공립보통학교의 교장직에 조선인도 임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지배정책의 변화에 따라 1920년대에는 특히 문화활동 부분에서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속에서 체육도 그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 발전의 양상은 학교체육에 머물던 각종 체육활동이 각종 체육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체육을 지향하는 형태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구한말이래 학교체육을 통하여 각종 운동경기와 체육활동을 접하였던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지도층으로 성장하면서 체육을 적극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신문화에 대한 자각과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층이었다. 특히 3·1운동의 민중적 함성을 목도했던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민중의 강인한 정신과 힘이 바로 체육에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였다.

 1920년 이후 체육에 대한 중요성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 시기에 강조되었던 것 보다 휠씬 더 강조되고 있었다. 1925년 9월 26일자≪동아일보≫사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민족의 성쇠는 정치나 경제에 있다고 하는 것보다도 직접으로는 체육에 있다고 할지니 민족의 건전한 의기가 왕성한 체육에서 비로소 기대할 수 있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업다. 정치와 경제는 간접으로 재료를 공급함에 불과하니 직접으로 원기의 주체는 체육에 잇는 고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원기의 성쇠는 체육의 발달 여하에 정비례할 것이다. …체육을 장려함은 운동선수를 위하여 조흔 일일 뿐 아니라 민족적 元氣와 사회적 風紀를 위하야 有意한 일이라고 믿는다(≪동아일보≫, 1925년 9월 26일).

 위의 내용에 의하면, 체육의 발달 여하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인식하에 전 사회구성원이 참여하는 사회체육의 발전을 촉구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의 후진성과 열등성을 통해 민족의 개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의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였다.560)이광수가 이 당시 ‘민족개조론’이라는 논지를 통해 민족적 반성을 촉구한 배경에는 바로 일제의 기만적 식민정책이 깔린 것이었다(김용달,<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연구>,≪택와 허선도선생정년기념논총≫, 일조각, 1992). 이는 위생과 체력, 더 나아가 근대적 운동경기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이 후진적이고 열등하다고 선전하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당시 언론에서는 조선인의 체육과 위생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는 한편,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왜곡 날조된 악의적인 선전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였다. 즉≪동아일보≫는 일제가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해 조선의 실정과 전혀 다른 사실을 내외에 선전하여 불쾌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한편, 조선인의 위생사상이 유치하고 불결한 것으로 치부한 것을 고발하였다. 또한 조선인의 위생상태가 일본인에 비해 못한 것이 민족성이 아니라 교육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고 지적하였다.561)≪동아일보≫, 1927년 2월 1일.

 위생은 사실 국민의 건강과 체력 증진의 기초인 만큼, 이미 구한말부터 이의 개선을 위한 계몽과 교육이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그 개선의 효과가 아직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일제가 악의적으로 선전하자, 조선의 지식인층은 위생에 대한 인식의 제고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 내용은 체육을 아무리 장려해도 위생에 주의하지 않으면 체력증강은 실패한다는 것이었다.562)이용설,<보건운동의 필요>(≪동광≫27, 1931년 11월).

 체육은 본래 건강한 신체를 통해 건강한 정신을 기른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체육이 본래 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각종 운동경기가 활성화되면서 경기가 과열되는가 하면, 여러 가지 불상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체육을 통해 달성하려는 본래의 목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실제로 1924년 자전거대회 이후 발생한 불상사는 선수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563)≪동아일보≫, 1924년 6월 14일,<운동계에 대한 우려>. 그러자 당시 언론에서는 이러한 운동계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한편, 건전한 체육정신의 함양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원래 體育의 목적이 교육상 중요한 科目이 됨이 多言을 不要할 것이라. …만일 體育을 들어서 단순히 身體의 鍛鍊으로만 觀察하고 技術의 勝負로서만 思考하면 이는 體育이 아니라 體爭이며 眞勇이 아니라 蠻勇이니 이러한 의미의 체육장려는 吾人이 聲援치 아니하고 首肯치 아니하는 바다. 如何히 拔山의 力이 有하고 萬夫의 勇이 有하다 할지라도 謙讓의 德이 無하며 廉恥의 心이 無하면 이는 蠹動하는 物體라 所用이 何處이뇨 체육경기의 法이 그 엇지 容易하리오(≪동아일보≫, 1922년 5월 21일,<全朝鮮庭球大會開催에 대하야>).

 위의 내용처럼 각종 운동경기에서 운동선수 사이의 불화나 응원단간의 충돌을 우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의 단련과 기술의 승부만을 평가하는 체육이 아니고 體爭이라고 파악하고 이를 위한 용기는 진실된 용기가 아닌 만용이라고 못박았다. 이어서 산을 뽑을 만한 힘과 만 명의 용기를 가졌다할 지라도 謙讓의 德과 廉恥의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체육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체육활동의 활성화는 경기의 과열로 인한 갖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고, 이에 따라 체육의 본질 내지 정신에 대한 반성이 고조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당시 여론이 ‘체육의 본정신’이라는 제목하에, “당당한 경쟁, 호조적 정신, 비루하지 않은 정신” 등을 강조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564)≪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 독자투고<체육의 본정신>. 또한 그러한 움직임은 ‘運動道’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운동의 역사적 발달을 대략 진술하고 運動道라는 신용어를 정하여 그 의의를 설명하고 겸해야 운동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말하랴 한다. …심신상관의 이론을 근거삼아 체육학이 실제 발달함으로부터 운동의 필요가 세인에게 두루 알게 되었스니 운동은 신체를 강건코 기민케 할 뿐 아니라 정신을 수련함에 막대한 공효가 잇슴으로 운동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운동도는 엇더한 것인가 상세한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고 이번은 대강령만 들어 말하랴한다. 운동도는 광명하다. 그럼으로 운동가는 비열한 정신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 도는 유쾌하니 이기면 물론 깃부고 져도 흔연한 것이요. 그 도는 강의하니 강한 것을 겁내지 안코 약한 것을 업시여기지 아니 할 것이며, 운동가가 협동함을 숭상하고 규율직힘을 귀히 여기고 쾌활하고 기민하고 인내심을 발휘함은 모다 이 도를 체현함이나 진정한 운동가가 되라함에 이 도를 살필 수 잇스며 그 다툼이 군자라 함에 이 도를 엿볼 수 잇슬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9월 26일, 社說<運動道>).

 운동도란 신체의 단련 뿐 아니라 정신수련의 방법이라고 정의하면서, 光明·正大·愉快·剛毅·協同·規律·機敏·忍耐 등을 발휘하는 정신 등을 들고 있다. 운동도는 조선인의 체육정신을 말하는 것이며, 곧 서양의 스포츠맨쉽과 연결된다. 이후 운동도로 대표되는 체육정신으로는 실력·자신·용감·정직 등이 강조되는가 하면, 스포츠맨 정신과 인격함양 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565)최능진,<스포츠맨쉽 운동정신 급 도덕>(≪동광≫22, 1931년 6월).
―――,<정직-운동정신의 요체>(≪동광≫23, 1931년 7월).
현정주,<인격적 승리가 진정한 승리다>(≪동광≫39, 1932년 11월).
주요한,<스포츠맨 스피릿트함양을 주로 노력하라>(≪조선체육계≫창간호, 1933년 7월).
정상윤,<운동선수와 운동정신>(≪조광≫, 1938년 4월).
이처럼 1920년대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체육의 본질 내지 체육의 정신에 대한 열기는 근대적인 체육문화를 수립하는 데 토대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민족개론을 염두한 황국신문화에 기우는 또 다른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조선 체육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성들의 체육활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당시 여성체육이 강조되는 배경에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따른 여성의 신체활동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점과 여성의 체력이 조선 모성의 체력으로서 중시된 데 있었다.

 우선 신조선의 건설에 필요한 여성의 건강과 체력문제가 고조되었다.566)≪동아일보≫, 1925년 6월 6일, 사설<여자와 체육­제3회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대하야>. 당시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부터 신문화 도입 이후 여성을 사회적으로 해방시키는 데 여성체육은 당연히 강조될 수밖에 없는 사항이었다. 또한 당시 여성운동선수는 조선민족 건강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로 모성체육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567)≪동아일보≫, 1926년 10월 1일, 평론<녀자 덩구선수에게 두가지 희망>. 이와 관련하여≪동아일보≫주최의 전조선여자정구대회는 여성체육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까닭은 정구가 여성의 체육활동으로 크게 인정받아 장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회의 발전에 따라 여성체육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인식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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