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4. 체육·무용
  • 1) 일제하 근대체육의 성장과 시련
  • (3) 전시파쇼체제와 민족체육의 저항

가. 전시체제의 가동과 민족체육의 저항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는 ‘문화정치’적인 기만정책이 끝나고 파시즘체제가 강화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1920년대 말 세계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일본 자본주의는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륙침략을 본격화해 갔다. 1931년 만주침공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마침내는 태평양전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철저한 군국주의 파쇼체제로 바꾸어 갔다. 식민지 파쇼체제의 강화는 군사력과 경찰력의 증가, 철저한 사상통제와 전향 강요, 전시체제하의 국민생활 통제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더구나 중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조선민족에 대한 황국신민화정책은 조선 민족성의 말살정책을 기도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저항을 철저히 막고 마지막까지 전쟁협력을 강요하려는 데서 나온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조선의 체육계는 나름대로 타협적인 민족주의 방략에 따라 민족체육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해 나갔다.

 우선 1931년 만주침공을 감행한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환시켜 나가는 한편, 조선에 대한 수탈적 지배정책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와 함께 체육을 통해 지역대립과 민족감정을 부추겨 분열화·우민화를 더욱 획책하였다.572)강동진,≪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 401∼429쪽. 실제로 민족체육의 기반이자 사회체육의 근간이 되어왔던 학교체육은 근대체육이나 경기를 보급시키는 역할은 물론 학교단위의 선수단 양성을 통해 학교의 명예를 널리 인식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운동선수 중심의 학교체육은 일반 학생들의 체력증진을 소홀히 하는 문제를 야기하였고 지나치게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운동정신을 망각하거나 각종 분규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573)≪동아일보≫, 1923년 10월 19일, 사설<체육과 경기>.
≪동아일보≫, 1925년 7월 1일, 사설<운동경기의 정신>.

 1930년대에 들어와 학교체육의 문제점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러자 학교응원단의 풍기 각성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가 하면,574)<각학교응원단 풍기문제>(≪신동아≫29, 1934년 3월).
<학교응원단 풍기문제에 대하여>(≪신동아≫30, 1934년 4월).
아예 선수제도의 폐지론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575)정상윤, 앞의 글. 학교체육의 이같은 폐단은 근대체육이 정상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결과의 하나였다. 사실 일제는 운동경기를 장려하여 이민족에 대한 모순보다는 민족내부의 지역감정, 대립감정을 부추켜 항일운동에 쏠리는 관심을 교묘히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 사회주의사상의 확산을 차단하는 데에도 체육경기의 장려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고 판단하였다.

 더구나 운동경기의 과열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은폐시키고 우리 민족의 내부적 대립·파쟁 등을 선전하는 데 좋은 구실을 하였다. 동시에 각종 경기대회가 민족을 단결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판단하에 민족체육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32년 9월<야구통제령>을 발표한 조치576)≪조선총독부관보≫, 1932년 9월 1일,<야구의 통제 또는 시행에 관한 건>.나 1934년 1월에<축구통제령>을 발표한 사실은577)≪동아일보≫, 1934년 4월 13일.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일본체육인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조선체육협회의 ‘조선신궁대회’라는 종합경기대회를 통하여 국제대회의 참가자격을 부여하는 등 식민체육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선 체육인의 탁월한 저력은 굴하지 않았다. 사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을 마음껏 누를 수 있었던 분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체육이었다. 당시 “일본팀과 싸울 때는 죽어도 이겨야 한다”는 서약을 했을 정도로,578)전영술,<남기고 싶은 이야기들­황성기독교청년회­>(≪중앙일보≫, 1971년 3월 25일). 일제 식민지체제에 대한 체육을 통한 조선 민중의 저항과 투쟁은 사실상 민족운동의 한 방편이었다.

 일제가 갖가지 방법을 통해 올림픽 참가를 저지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931년에는 조선신궁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양정고보의 金恩培가 종전의 올림픽 기록을 무려 6분이나 앞당기는 기록을 수립함으로써 조선민족에게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579)이길용,<조선스포츠의 회고와 전망>(≪혜성≫10, 1932년 1월). 그런데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김은배와 權泰夏가 각각 6위와 9위를 차지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마라톤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36년 중일전쟁을 앞둔 일제는 조선통치의 근간을 황국신민화에 두고 神社參拜, 宮城遙拜, 國語(일본어) 등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6년 8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孫基禎이 거둔 마라톤의 우승과 南昇龍이 동메달을 차지한 소식은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국적이 아닌 일본 국적으로 국제경기에 참여함으로써, 민족 내부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 당시를 회고한 손기정은 “우승의 기쁨보다 나라없는 서러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통감했다”고 술회한다. 손기정의 우승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에서는 ‘마라톤 제패가’가 유행할 정도로 축제분위기와 민족의식이 고조되었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지도자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소식을 상해에서 접한 김구는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손기정에게 축하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동아일보≫는 우승을 하고 월계관을 쓴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는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켜 민족의 울분을 달래고자 하였다.580)인촌기념회,≪인촌 김성수전≫(1976), 387∼388쪽.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을 주도했던 李吉用 기자를 비롯한 관련자 8명이 구속되었고≪동아일보≫는 9개월간 정간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