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4. 체육·무용
  • 2) 일제하 근대무용의 시련과 성장
  • (1) 일제하 전통무용의 계승과 시련

가. 궁중무용의 계승과 시련

 1910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 통치체제로 재편하는 가운데 황실의 무용조직과 활동을 크게 축소시켰다. 이미 궁내부 산하의 掌樂院이 1897년(고종 광무 원년)에 敎坊司(정원 772명)로 개편했다가 1907년(순종 융희 원년) 掌樂課(정원 305명)로 다시 바꾸었다가, 합방 후 雅樂隊로 개편하고 그 인원도 189명으로 축소하였다.595)≪순종실록≫ 권 7, 1915년 5월 26일. 또한 侍從院에 속했던 吹打內吹와 細樂內吹의 일부가 아악대에 편입하였다. 왕가의 제향을 위해 축소된 규모였지만 아악대의 존속은 조선궁중무용의 계승을 위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실제로 악원의 명맥 유지는 이곳에 종사한 악인의 연면한 승계를 가능케 함으로써 궁중무용의 단절을 막을 수 있었다.596)근대 궁중정재 및 일무의 전승은 한말과 일제 초기의 아악사장 咸在韻·明完壁·金甯濟·咸和鎭 등과 아악사 李壽卿 등에 의해 완벽하게 전승되었다(성경린,<현대 속의 전통계승>,≪한국무용사≫Ⅰ, 대한민국 학술원, 1985, 411∼413쪽).

 1910년 이후 처음으로 궁중무용이 공연된 것은 1923년 3월 순종의 50회 탄신일 때였다. 당시 축하연주를 위해 무동을 선발했는데, 제1기 아악생 중에서 2인, 2기 아악생 중에서 9인, 아악수에서 2인 등 모두 13인을 뽑았다. 아악수 2명을 제외하고는 연령이 14세∼17세의 어린 학생들로 용모나 체격이 단정한 자들이 뽑혔다. 무용을 지도한 악사로는 金甯濟·咸和鎭·李壽卿 등이었다.

 당시 전수시킨 呈才로는 處容舞·春鶯囀·鳳來儀·寶相舞·抛毬樂·響鈴舞·壽延長·萬壽舞·舞鼓·長生寶宴之舞·演百福之舞·佳人剪牧丹 등 12종이었다.597)金千興,<궁중무의 계보>(≪춤≫, 1977년 5월호). 위의 12종 정재무의 분담은 처용무는 金桂善·高永在·박노아·박성재·李炳星이, 기타 11종의 정재는 어린 학생이 분담하였는데, 춘앵전은 李炳祐가 전담하였다.598)金千興,<舞踊>(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서울六百年史≫4, 1984), 752쪽.≪동아일보≫에 의하면, 창덕궁의 탄신연에서 아악대의 고악과 무동의 정재를 크게 보도하였는데,599)≪동아일보≫, 1923년 3월 25·26일. 이미 3월 17일에는 인정전에서 순종이 왕비와 함께 雅樂과 舞童呈才를 관람하였다.600)≪순종실록≫, 1923년 3월 17일, 부록.

 무동을 대상으로 한 정재교습은 1926년 순종황제의 승하와 일본 천황의 서거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이듬해인 1927년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아악부에서 두 번째 정재 재현은 1930년 7월의 일이었다. 영친왕 내외분이 환국할 때에 맞춰 이루어졌다. 당시 궁중정재는 모두 50여 종이었으나 선을 보인 것은 10종이었다. 즉 처용무·춘앵전·무고·보상무·봉래의·가인전목단·향령무·장생보연지무·수연장·萬壽舞 등이었다. 궁중무용은 그 후 갈수록 위축되었다가, 1936년경에는 처용무·향령무·장생보연지무 만이 전수되는 등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가 파쇼체제로 전환되는 1930년대 이후 궁중무용의 존재는 갈수록 축소와 소멸의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궁중무용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몇몇 궁중악사들에 의해 궁중무용의 전통과 제래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례악이었던 종묘의 佾舞가 당시 아악사장 김영제에 의해 1930년대 장악원 소장의≪時用舞譜≫를 기초로 재정리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종전까지 약식으로 행하던 일무를 체계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601)성경린, 앞의 글,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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