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4. 체육·무용
  • 2) 일제하 근대무용의 시련과 성장
  • (2) 일제하 신무용의 출현과 성장

(2) 일제하 신무용의 출현과 성장

 新舞踊이란 개항 이후 신문물과 함께 외국에서 유입된 서구 무용 등을 가리키는 말이나 그 뒤 국내에서 창작된 것까지 포함하여 신무용이라 하였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신무용이란 “思潮의 바탕을 현대적 감각에 두고 현대무용운동으로서의 새로운 이념과 방법으로 새로운 한국무용을 창조해 가려는 활동이자 그 체제이며, 그 결과로서 顯現되어진 실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606)안제승,≪한국무용사≫Ⅱ-한국예술사총서 Ⅳ(학술원, 1985), 447쪽. 그러한 의미에서 신무용이란 단순히 외국의 무용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외국의 무용이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21년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유학생들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음악과 러시아의 민속무용을 추어 관심을 끌었는데, 이것이 외국의 민속무용이 소개된 최초였다.607)≪매일신보≫, 1921년 4월 30일. 이때부터 러시아의 민속무용인 ‘코팍댄스(gopak dance)’가 유행되어 각종 음악무도회에 등장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체육댄스와 사교춤 등이 전파되어 유행하였다.608)≪매일신보≫, 1923년 6월 2일. 또한 당시 소개된 서양의 춤은 코팍댄스만이 아니라, 화란댄스·서반아댄스·유희댄스·흑인댄스 등이었다.609)≪동아일보≫, 1923년 10월 18일. 그러나 이러한 춤은 바르게 인식되지 못하였다. 춤이라는 것이 기생·광대·재인만이 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킬 정도였다.

 당시 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었는데, 무대무도와 사교무도가 그것이다. 무대무도 또는 무대무용의 경우에는 예술활동으로 평가되어 그나마 용인되는 분위기였지만, 사교무도 내지 사교춤에 대한 당대의 여론은 매우 비판적일 뿐 아니라 부정적이었다. 사교무용을 예술적 가치도 없을 뿐 아니라 식민지적 상황을 망각하고 제국주의를 흉내내는 타락한 행위로 간주했던 것이다.610)≪동아일보≫, 1923년 5월 26일. 사실 당시 소개되었던 서양의 춤은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춤의 본질면에서는 갖가지 민속춤이나 놀이, 그리고 사교적 차원의 춤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춤이 극장 무대에서 추어졌다는 이유만을 가지고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1926년 3월 21일부터 3일동안 경성공회당에서 벌어진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꾸(石井漠, 본명 石井忠純)의 공연은 그 이전까지의 외래 춤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611)≪경성일보≫, 1926년 3월 23일. 당시 언론에서도 그를 현대무용가로 소개하는가 하면,612)≪매일신보≫, 1926년 3월 16일. 세계적 무용가로 묘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613)≪매일신보≫, 1926년 3월 21일. 그의 무용은 현대무용이자 예술무용이었다는 데서 무용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의 공연은 종전까지 연락적·장식적 가치로서만, 그것도 다분히 필요악적인 성정으로 이해해 왔던 종전까지의 무용관을 벗어나,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춤이었다. 더욱이 이 공연을 계기로 형성된 인맥과 여기서 파생해 나온 문하들에 의해서 한국 신무용사의 태반이 점철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를 신무용사의 기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614)안제승, 앞의 책, 455쪽. 한편 안제승과는 입장이 조금 다르지만, 조동화는 이시이의 경성공연을 신무용 공연으로 풀이하고 있다(조동화,<신무용40년사>,≪한국연예대감≫, 성락문화사, 1962, 71쪽).

 실제 이시이의 공연은 조선내 무용지망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崔承喜가 무용에 투신하려고 결심하게 된 것도 이 공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615)최승희,≪나의 자서전≫(東京:日本書藏, 1936), 39∼40쪽. 또한 인기절정의 정구선수로 활약하던 趙澤元이 최승희보다 조금 뒤에 선수생활을 청산하고 이시이의 문하로 들어간 것도 역시 이 공연에서 받은 깊은 감명 때문이었다.616)안제승,≪신무용의 본질과 요람기가 남긴 영향≫(서울:세기사, 1972), 37쪽. 이시이는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내선일체라는 조선총독부식의 대의명분을 앞세워 조선 여자 2∼3명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617)≪경성일보≫, 1926년 3월 21일. 어쨌든 최승희 한사람으로 좁혀지긴 했지만, 이는 한국 신무용사의 태동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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