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5. 연극·영화
  • 2) 3·1운동이후∼1920년대-소인극운동

2) 3·1운동이후∼1920년대-소인극운동

 신파극은 3·1운동에 따른 여러 분야의 획기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겨우 연쇄극이나 만들 정도였기 때문에 곧바로 젊은 아마추어 연극인들에게 밀려나서 변두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신파극으로서는 3·1운동 직후가 최대의 시련기였다. 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서 새 기운이 돋아나면서 일본 신파의 아류인 신파극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분야에서만 보더라도 玄 哲과 같은 선구자가 나타나서 서양근대극에 대한 소개와 번역대본도 내놓았으며 배우양성학원도 설립하는 등 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생도 많이 늘어나서 서구연극을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1920년 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 단체를 이끈 주역은 와세다 대학에서 영미희곡을 전공한 金祐鎭이었다. 때마침 동경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노동자단체인 동우회와 형설회 등에서 극예술협회원들에게 방학기간 동안 모금운동을 해달라는 요청이 옴에 따라 동우회순회극단이 출범했다. 김우진이라든가 洪海星 등이 素人劇運動의 리더였고 젊은 청년학생들의 애국적 연극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마추어연극이기 때문에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에 대중이 크게 호응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청년학생들이 너도나도 소인극단을 만들어 민중계몽에 나섰는데, 그런 단체들이 수십 개나 되었다. 마치 요원의 불꽃처럼 소인극운동이 퍼져나갔는데 그렇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민중의 호응 때문이었지만≪조선일보≫·≪동아일보≫등 언론과 불교·기독교·천도교 등 종교계의 후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이 내건 주제는 솔직히 자주독립이었고 부수적으로 신교육 고취라든가 금주·금연 또는 물산장려 등을 내걸었다. 따라서 일본 관헌이 그런 것을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이 탄압의 손길을 뻗친 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소인극운동은 1925년을 고비로 급속히 수그러들게 되었다. 이러한 소인극운동은 결국 학교 안에서의 학생극 활동으로 그 패턴이 바뀌게 되었다.

 한편 청년 학생들의 소인극단체 중에서 1923년 동경에서 조직되어 여름에 조선극장에서<吉植>(박승희작) 등으로 창단공연을 가진 토월회만은 곧바로 전문극단화 되어 1920년대에 있어서 과도기적 신극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즉 토월회는 朴勝喜 주도로 토월회를 통해서 서구의 근대극을 부분적으로나마 이식해보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다만 낭만극운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徐月影·朴齊行·卜惠淑·石金星 등 유능한 배우들을 배출했고 1930년대의 극예술연구회가 탄생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또한 김우진과 같은 뛰어난 연극인도 나타났는데 그는 서양의 첨단적 극작가들과 연극사조를 연구해서 이 땅에 선진 연극이론과 작품을 소개했다. 더 나아가 그는 표현주의 사조라든가 버나드 쇼의 개혁 사조 등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창작으로 실험도 했다. 당시 문단에서는 이제 겨우 리얼리즘을 실험하고 있을 때, 그는 그런 사조를 한단계 넘어선 표현주의를 실험하여<산돼지>와 같은 희곡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신파극과 전통극은 대단히 시련기였다. 왜냐하면 3·1운동이 계기가 되어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서양문물을 조금씩이나마 호흡한 사람들이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극과 신파극을 외면한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다만 박승필과 같은 고집스런 극장경영자가 있었고, 또 기량 뛰어난 남성명창과 기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극은 그래도 명맥을 이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통극도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로 대중을 붙잡으려니 정도에서 벗어나는 공연을 자주 하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없지 않았다.

 신파극의 경우는 윤백남이 1920년대 초기까지 극단운영을 했지만 곧바로 영화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김도산·김소랑·卞基鍾 등이 리더로서 聚星座와 같은 몇 개의 극단을 이끌었다. 그것도 중앙보다는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유랑극단으로서 였다. 다행히 신파극이 시련을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아갔으며 王 平과 같은 전문 극작가도 탄생시켰다. 신파극에서 전문 극작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것이 점차 일본신파의 답습에서 벗어나 토착화하는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것은 신파극단 취성좌로부터 였고 1929년에 창단된 朝鮮硏劇舍라는 극단부터는 더욱 진일보하게 된다. 池斗漢이라는 연극매니저가 만든 연극사는 연극을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는 지두한이 자신들의 손으로 극장을 하나 짓는 것을 목표로 삼은 데 따른 것이었다. 이 극단은 90여 명으로 구성된 맘모스 단체로서 음악연주단을 따로 둘 정도였다.

 이 시기의 영화도 1910년대에 비해서 많이 발전되었다. 가령 김도산의 신극좌가 연쇄극을 만든 이후 여러 편의 작품이 선을 뵈었었는데 이기세가 만든<知己>라는 연쇄극은 한국인 촬영기사 李弼雨의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진전은 尹白南이 직접 감독해서 만든<月下의 맹세>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국인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한 최초의 창작 무성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본인(早川松太郞)이<춘향전>을 영화로 만들었고 단성사 지배인 朴庭顯도<장화홍련전>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극영화들이 속속 성공을 거두면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도 생겨났는데 그것이 1924년 부산에서였다. 이 영화사는 윤백남 감독의<雲英傳>등을 만들었는데, 羅雲奎가 가마꾼으로 데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마꾼으로 데뷔한 나운규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주연한 민족영화<아리랑>이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역사적인 개봉을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큰 성공을 거둔 나운규는 계속해서<풍운아>·<들쥐>·<금붕어>등을 만들었고, 1927년에는 직접 나운규프로덕션을 만들어서<잘 있거라>·<옥녀>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영화는 대부분 나운규가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李慶孫이라든가 이필우·李奎卨 등 신인감독들이 등장하여 영화계의 폭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돋보이는 감독으로는<옥녀>·<잘 있거라>·<벙어리 삼룡>등을 만든 尹逢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배우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여배우로는 李月華·복혜숙·金蓮實·申一仙 등이었고 남자배우는 李錦龍·나운규·沈 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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