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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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연극·영화
  • 3) 1930년대-대중극·신극과 영화의 발전

3) 1930년대-대중극·신극과 영화의 발전

 1930년대 들어서면 연극과 영화의 양과 질이 향상된다. 그 이유는 일본 유학생들이 속속 귀국해서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중의 교육수준도 향상되었기 때문에 관객수준도 그만큼 성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기술적 수준도 나아질 수밖에 없었고 자본의 축적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전통극을 보면 唱劇이 괄목할 발전을 한다. 圓覺社 시대에 처음 시작된 창극이 1930년대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의 연극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적 자원과 극장조건, 그리고 재정적 뒷받침 등이 바로 그러한 배경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1930년대 들어서면 우선 제대로 된 전문극장이 두 개씩이나 생겨나고 인적 자원도 크게 늘어나는데 그것은 유학생들의 귀국과 그 동안 훈련받은 예술인들이 극장무대를 만나 자신들의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으며 연극을 후원하는 사람도 나타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먼저 전통극 분야를 보면 호남지주 金鍾翊이 서울에다가 큰집을 한 채 마련해서 명창들에게 마음껏 쓰도록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의 명창들이 모이게 되고 朝鮮聲樂硏究會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1934년의 일이었는데, 이듬해(1935년)에는 동양극장과 부민관이 개관함으로써 원각사 이후 실험해온 창극을 그런대로 정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창극이 정립되는데는 신극인들의 참여가 절대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사실 명창들은 연기와 연출을 모르고 무대미술가도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극 전문연출가와 무대미술가 등이 명창들을 지도해서 창극 실험 30여 년만에 오늘에 전승되고 있는 창극의 기본틀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朝鮮唱劇團·東一唱劇團 등 대여섯 개의 직업적인 창극단들이 속출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많은 인기를 끌면서 공연을 가졌고 관객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레퍼토리는<춘향전>등 판소리의 다섯 바탕과 고전소설 각색물이었고 이광수의 역사소설도 창극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창극에 대한 신파극의 영향이다. 동양극장 연출가 朴 珍이 창극 연출을 하면서 명창들의 연기를 지도했기 때문에 창극이 자연스럽게 신극형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형태의 창극을 관중이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최고 인기 공연물은 단연 개량신파, 즉 토착화된 대중극이었다. 근대연극사에 있어서 소위 대중극의 전성기는 역시 1930년대 후반서부터 1940년대에 걸쳐서 였고 그것은 단연 본격 전문극장이라 할 동양극장 개설부터라 하겠다. 여기서 동양극장 개설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동안 유랑극단처럼 정처없이 떠돌던 신파극단들이 동양극장에 와서 비로소 직업극단으로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신무용가 裵龜子가 설립한 동양극장은 처음부터 연극·무용 등 무대예술 전문공연장으로 지어졌고 650여 석이었기 때문에 연극 공연장으로서는 적당했다. 더욱이 동양극장은 대관극장 아닌 본격 공연장으로서 청춘극장과 호화선이라는 전속극단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극작가·연출가·무대미술가 등 전문가들을 소속시켜서 작품을 제대로 만들었고 연중무휴 공연까지 한 것이다.

 동양극장이 생겨나기 전에는 극단들이 일본인 소유의 영화관을 빌어 공연을 가졌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도 문제였고 특히 대관료를 과다하게 빼앗아감으로써 극단들은 생존조차 힘들었다. 그런 때 동양극장이 등장하여 연극인들에게 넉넉한 급료까지 제공했기 때문에 대중극이 꽃필 수 있었다. 林仙圭라든가 李瑞求·李雲芳·金 健 등과 같은 재능 넘치는 대중극작가들도 여러 명 탄생했지만 그보다도 黃 澈·車紅女·池京順·변기종·沈 影 등과 같은 명배우들도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을 아우르고 가르쳐서 성숙된 작품을 만들어 낸 조련사로서 연출가 洪海星과 박 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홍해성이 제대로 된 연출과 연기를 가르치면서 동양극장 연극이 전 시대보다 진일보했기 때문이다. 동양극장에서 비로소 연기훈련 같은 시스템도 생겨났는데, 이는 순전히 일본 츠키지(築地)소극장에서 연수받은 홍해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동양극장의 활동으로 연극관객도 대폭 확대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매일 밤 600여 명 이상이 연극을 즐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 시기에 또 하나의 공연장 부민관이 문을 연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민관이 비록 조선총독부가 세운 다목적 홀이었다고 하더라도 1,200여 명의 관객을 포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항상 극장부족에 허덕여 온 극단들로서는 대형 무대에서 마음껏 공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민관이 연극활성화를 북돋았고 또 대형화도 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의 중요성이 반드시 대중극의 번창에만 있지 않고 정통 서구근대극을 이식하려는 지식인 연극이 나름대로 역할을 한 시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3·1운동 직후 동경에 유학해서 외국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학교와 신문사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식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서 뭔가 해보자는 의미로 문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 모델은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운동이었다. W. B. 예츠라는 시인이 주동이 되어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은 문학보다는 동적인 연극이 주였다. 더블린의 애비소극장을 중심으로 숀 오케이시라든가 씽그 등이 민족적 색채가 농후한 드라마를 만들어냄으로써 피압박 민족의 저항심과 독립의욕을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그에 자극받은 인텔리 청년들이 연출가 홍해성의 귀국을 계기로 극예술연구회(약칭 劇硏)라는 연극단체를 출범시켰는데, 그 창립멤버는 홍해성(일본대 예술과)·윤백남(동경상대)·柳致眞(입교대 영문과)·徐恒錫(동경대 독문과)·崔涏宇(동경대 영문과)·曺喜淳(동경대 독문과)·李軒求(와세다대 불문과)·鄭寅燮(와세다대 영문과)·異河潤(법정대 영문과)·金晋燮(법정대 독문과)·咸大勳(동경외대 노문과)·張起悌(법정대 영문과) 등 12명이었다. 이처럼 명문대학에서 외국문학을 공부한 엘리트들이 당시까지만 해도 천시받은 연극운동에 나선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가령 유치진이 극예술연구회 창립배경과 관련하여 “연극의 전통이 단절된 이 땅에 건전한 연극의 씨앗을 뿌려, 연극 그 자체의 예술적 형태를 탐구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올바른 연극문화를 가지게 하자는 뜻에서 일을 만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따라서 극예술연구회 창립 선언문을 보면 “극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 극단의 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우리 신극’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신파를 토착화시킨 대중극과 전통극이 아닌 서구근대극의 한국 이식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홍해성과 윤백남을 제외하고 연극창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연수생들과 기성 배우 몇 명을 보태서 창립공연을 가졌는데, 그것이 1932년 5월초 조선극장에서의<검찰관>(고골리작, 홍해성연출) 공연이었다. 세련된 작품은 아니었으나 정석대로 가져간 진지성에서만은 당시의 상업적 대중극보다는 신선한 공연이었다. 창립공연이 언론의 주목을 끌자 지식 청년들이 여러 명 참여해왔는데 毛允淑, 盧天命 등 여류시인들도 무대에 섰던 것이다. 처음에 서구근대극본을 무대에 올린 극예술연구회가 유치진의<토막>으로 데뷔하자 창작극도 곁들여 공연하기 시작했고 잇달아서 李無影·金鎭壽·咸世德 등이 가세함으로써 균형잡힌 레퍼토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극예술연구회는 시인 朴龍喆 회원의 도움으로 잡지(≪劇藝術≫)까지 발간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는데,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졌음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그런 증조는 극예술연구회 공연의 심한 검열에서 잘 나타났다. 즉 극예술연구회가 선호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숀 오케이시의 작품공연을 일절 불허한 것이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기관지≪극예술≫을 폐간조치 하고 ‘연구회’라는 명칭을 단체 정비해산의 명목으로 설정하고 극예술연구회를 해산토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경찰 측에서는 극예술연구회를 일종의 사상단체로 몰면서 연극을 계속하고 싶으면 ‘연구회’라는 명칭을 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문적 직업극단으로 나아가되 극단 조직만은 무식자로만 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결국 극예술연구회 동인들은 순전히 타의에 의하여 단체이름에서 ‘연구회’를 떼어 내고 일본 직업극단처럼 劇硏座로 바꿨는데, 이 때(1938년) 대부분의 창립동인들이 떠나고 연극을 평생할 유치진과 서항석·장기제 3명만 남게 되었다. 물론 극연좌로 바뀐 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다만 순수보다는 흥행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동경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돌아온 李海浪·金東園·李眞淳 등 신인들이 가담함으로써 극단 보강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연좌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재출범 뒤 내분도 있었던 데다가 재정문제가 겹치는 등의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경찰의 해산명령으로 1년여만에 완전 해산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극예술연구회는 1932년 창립공연을 가진 이래 1939년 5월 해산당할 때까지 만 7년 동안 이 땅에 서구적인 근대극을 이식하는데 앞장서면서 신극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던 것이다. 그 공로를 몇 가지로 나누어 평가한다면 첫째 서양연극을 정통적으로 승계 이식해보려고 노력한 점, 둘째 연극을 문화의 차원으로 격상시키려 노력한 점, 셋째 저급한 당시 대중극을 크게 향상시킨 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문화계를 주도하다시피 했던 극예술연구회의 약점도 없지는 않다. 가령 연극을 아마추어리즘으로 한 것이라든가 설익은 번역극 일변도가 외화주의로 빠지게 한 점 등은 그들이 비판받은 대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당하면서 정통신극이니 민족극이니 하는 의식 넘치는 연극은 사라지고 영리만 추구하는 흥행 극단들만 우후죽순 솟아나서 전국을 순회하는 대중연극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193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카프산하의 프로레타리아 극단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1934년 일본경찰이 프로예술인들을 검거하는 등 탄압을 함으로써 국내에서는 소멸하고 소련과 일본에서만 겨우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 시기의 영화도 비교적 활기가 있었다. 영화는 아무래도 기계문명의 산물이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아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나운규 감독의 독무대였던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는 윤봉춘·李龜永·李奎煥 등 유능한 신인감독들이 여러 명 등장함으로써 영화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가령 1930년대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만 보더라도<큰 무덤>(윤봉춘 감독),<개화당 이문>(나운규 감독),<임자없는 나룻배>(이규환 감독),<청춘의 십자로>(安鍾和 감독) 등이 나왔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1930년대 영화의 진전은 발성영화가 등장한 점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발성영화가 이필우·李明雨 형제 감독이 만들어서 1935년 10월에 개봉된<춘향전>이라 볼 때, 이는 영화 발전의 轉機가 되는 것이다. 이 발성영화는 창작영화가 시작된 지 16년만의 일이었고 서양보다는 8년 뒤졌다는 점에서 우리 영화의 빠른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발성영화가 급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역시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서 발성영화를 만든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무성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1930년대에는 화제작이 적잖게 나왔는데, 가령 안종화 감독의<逆襲>이라든가 나운규의<아리랑 3편>·<五夢女>(李泰俊 원작소설) 등이 그러한 수작에 들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태준이라든가 이광수·鄭飛石 등이 쓴 소설과 유치진이 쓴 시나리오도 영화화되어 주목을 끌기도 했다. 또 하나 기록될만한 것은 민족지인≪조선일보≫가 영화제라는 것을 개최한 점이라 하겠다. 이기세·안종화·윤봉춘 등 영화계 인사들이 준비한≪조선일보≫영화제에서는<아리랑>·<심청전>등이 베스트 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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