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1) 식민지시기 민속의 변화

1) 식민지시기 민속의 변화

 식민지시기의 민속은 그 동안 조선이 발전시켜온 기존의 생산체계를 부정하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이식하려는 일제의 영향으로 왜곡·변형되고 또 새로 형성되는 등 과도기적 양상을 나타내었다. 당시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구식과 신식’, ‘봉건과 근대’ 등으로 대조되는 이중적 구조 속에서 사회집단의 성격에 따라 그 수용방식도 달랐다.

 당시의 어떤 지식인은 1920∼30년대의 문화적 상황을 외래어인 ‘모던(modern)’이라는 말로 설명하면서 선진국에서는 경제적 조건인 자본주의에 의해 생활양식이 문화적으로 발달하지만 조선에는 그와 같은 물질적 기초가 마련되지 않아 ‘모던’한 문화는 기형적으로 이식된 병적인 문화에 불과하며 거기에 야만성도 나타난다고 보았다.629)임인생,<모더니즘>(≪별건곤≫1월호, 1930). 그러나 한편으로는 “… 하루 속히 서울에 댄스홀(dance hall)을 허락하시어, 우리가 동경 갔다가 ‘후로리다홀(Florida Hall)’이나 ‘帝道’홀, ‘日米’홀 등에 가서 놀고 오는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 시민들로 하여금 맛보게 하여 주소서”630)이서구 등,<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월호, 1937)(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현실문화연구, 1999, 67쪽에서 재인용).라고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대중문화를 동경한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나 해당하는 현상으로 대부분의 농촌에서의 삶은 크게 변한 바가 없을 정도여서 도시와 농촌간의 문화적인 격차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벌어졌다. 서울의 민속, 또는 대중문화는 이제는 ‘모던’이라는 고유명사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그 근본이 바뀌고 있었으나 농촌의 삶은 그렇지 않아 일제의 영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외래적 문화요소가 섞이고 이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서도 전통의 모습을 유지하였다.

 도시 안에 공존하는 ‘구식’과 ‘신식’은 도시와 농촌간에도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켰다. 예컨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 중에는 자기가 태어난 농촌에서 구식으로 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도시로 나온 후 그곳에서 사귄 신식여성과 재혼하는 자들이 많았다. 봉건을 상징하는 구식여성을 버리고 신식여성과 연애하는 것은 전형적인 지식인의 갈등의 표상이었다.631)김진송, 위의 책, 117쪽.

 반면에 버림받은 아내와 같은 처지에 놓인 농촌에도 일제자본이 침투하여 화학비료의 투입, 농지정리, 수리시설의 개선 등이 농업생산력에 영향을 주어 1930년대 전반까지 새로운 추가 잉여생산을 발생시켰고 이중 일부는 ‘민족자본’화하였으나 결국 식민지제도의 틀 안에서 대부분은 다시 일제자본으로 흡수되었다. 1932년 이후의 일제에 의한 농촌진흥운동 또는 農山漁村更生運動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농촌의 피폐에 따른 소작쟁의 등이 식민지저항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만주사변에 따른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시행되었다.632)농촌진흥운동의 주요 내용은 ‘지도부락’ 선정, 농사개량, 근검저축, 공동경작 등이다(박현수,≪日帝의 朝鮮調査에 관한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3, 86∼87쪽).

 조선시기 지방은 군·현을 단위로 운영되어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은 군·현의 중심지인 邑治에 설치한 관아에 머물렀다. 그러나 1914년의 지방행정개편 이후 행정의 기초운영단위가 면 단위까지 내려가 각 면마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소가 설치됨으로써 농민들은 좀더 직접적인 행정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 때 농촌에서는 이와 같은 행정체계의 변화 외에도 시장의 재편, 교육체계의 변화, 양력의 사용 등 다방면에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新作路라고 불렀던 도로의 개설과 이에 따른 교통수단의 변화도 그 중 하나다.

 신작로란 기존의 도로를 넓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한 도로를 말한다. 한말에서 일제에 걸쳐 작성된≪是言≫(1851∼1922)과≪紀語≫(1898∼1936)라는 일기에는 이와 관련한 생활상의 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633)이 일기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에 살던 柳濟陽(1846∼1922)과 손자 柳瑩業(1886∼1944)이 작성한 것으로≪求禮 柳氏家의 생활일기≫(上·下,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1)로 정리하여 출간되었다. 일기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의 신작로 사업은 1912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신작로 교량목에 쓸 소나무를 헐값에 强買당하고 전답을 손해보는 것은 물론 가옥이 파손되고 분묘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또 공사나 보수 때에도 인부로 차출되었으며, 사업에 드는 비용도 부담하였는데 호별로 나눈 등급에 따라 배정되었다. 길이 닦이고 난 다음 자동차가 그 길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일대에서는 1914년에 자동차운수회사가 설립되자 이전의 장삿길은 완전히 끊기고 그에 의존하던 기존 상권도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출입이 잦은 일부 부농들은 자동차를, 그리고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차를 이용하는 혜택을 누렸다. 육로교통체계의 변화에 따라 정기시장의 위치나 개시일이 바뀌고 재편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농업기간시설이 확보되어감에 따라 일제의 농촌에 대한 착취는 더욱 가혹해져 이농 농가가 늘어났고 농촌인구는 감소하였다. 이농자가 많아지고 도시에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도시의 빈민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다.

 1927년에 간행된≪京城府 管內 地籍目錄≫에 따르면 경성부 토지의 70% 이상은 일제 및 일본인들이 점유한 것으로 나타난다.634)姜秉植,<일제하 서울(京城府) 토지소유실태와 사회상에 대한 연구-1920년대를 중심으로->(≪실학사상연구≫3, 무악실학회, 1992), 219쪽. 서울 동대문이나 창신동 등지에서 움집을 짓고 사는 빈민 237호(남자 540명, 여자 425명) 중 직업이 있는 사람은 모두 341명으로 지게꾼이 92명, 직공이 83명, 행상인이 45명, 荷車夫가 2명, 날품팔이꾼이 22명, 쓰레기꾼이 15명, 人力車夫가 13명, 목수·미장이가 11명, 차장·운전수가 9명, 상점고용인이 7명, 나머지는 기타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635)≪동아일보≫, 1924년 4월 3일(姜秉植, 위의 글, 269쪽에서 재인용). 서울 시내에 집이 없어 헤매는 빈민들은 산비탈, 강 언덕, 토굴 속에서 몸을 담고 겨울을 났다. 1930년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0인 이상이 고용되어 있는 공장에서 46.9%의 노동자가 하루에 12시간 이상 노동하였으며 남자노동자의 경우 하루 임금은 대개 60∼80전이었고 여성노동자의 경우는 남자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당시 서울의 시내버스나 전차 요금이 5전, 전화가 5전, 택시 80전, ‘모던보이’들이 드나들던 카페의 커피가 10∼15전, 맥주가 40전이었다.636)김영근,<식민지 노동자의 삶>(≪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2, 역사비평사, 1998), 133쪽.

 도시의 민속, 특히 서울의 대중문화는 자체의 물질적인 토대도 없이 이러한 계급적인 모순을 안은 채 이식된 외래문화의 영향 속에서 형성·확대되었다. 일년을 주기로 하는 농촌의 생활경험을 안고 도시가 만들어 낸 주 단위의 생활주기에 적응해가면서 대중들은 마당극 대신 신극이나 영화를 즐기고 민요나 창 대신 唱歌를 들었다. 1908년 이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어간 창경궁에서 벚꽃놀이를 즐기게 된 것도, 전차를 타고 다방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벗을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도시의 대중들이 겪게 된 새로운 민속이다. 중매가 아닌 연애를 통해 배우자를 만나 예식장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가신 부모를 선산이 아닌 공동묘지에 묻게 된 것도 대중들이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살면서 새롭게 경험하는 민속이 되었다.

 이농을 통해 겪게 되는 도시생활에 대한 체험은 歸農者들에 의해 농촌으로 환원되어 농촌 민속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농촌에서의 변화는 이전시기에도 그러했듯이 외부적 요인보다는 변화된 농업생산여건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으며 그 중에는 역으로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여 이를 강화하는 현상도 그 결과로서 함께 나타났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