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2) 생산관련 민속

2) 생산관련 민속

 일제자본은 도로나 수리시설과 같은 간접적인 기간시설뿐 아니라 농업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화학비료생산에도 투입되었다. 일제 초기부터 주로 흥남비료공장에서 생산되어 보급된 암모니아비료는 한 가마가 쌀 5말에 해당하는 값이지만 그것을 논 3두락에 뿌리면 두 배의 수확량이 되므로 도지로 계약한 소작인들은 이 비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일인 농장이나 척식회사에서는 소작인들이 원하는 대로 비료를 쓰게 하여 이중으로 이익을 올렸다. 이와 같은 화학비료의 사용에 따른 추가 잉여분은 한인 지주에게도 영향을 주어 산업자본가와 농업자본가로 분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0∼30년대에 소위 篤農家가 나타나고 ‘천석꾼’, ‘만석꾼’ 등으로 불리는 대지주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나 고리대금업이 성행한 것도 이와 같은 농업부분에서의 확대재생산의 결과였다. 이 때 유난히 족보발행이 활발했던 것도 그 배경에는 이러한 잉여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후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으로서 생산과 관련한 민속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준 중요한 변화는 논농사에서의 여성인력의 투입이다. 이는 부분이농, 또는 징용을 통한 남성인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현상이지만 그 동안 논농사가 점차 확대되고 搗精이나 길쌈 등 여성 고유의 노동분야가 기계화·상품화에 의해 부분적으로 대치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인력이 모든 논농사 과정에 투입된 것은 아니며 해방 이후까지도 단계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인 편차를 가지면서 모찌기·모심기·김매기·벼베기 순으로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이후 논농사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남성 위주의 공동노동조직인 두레가 지역에 따라 공동체 성격을 잃고 풍물도 수반되지 않는 ‘작업반’으로 바뀌는 사례들이 나타나는 것도 일시적으로 품을 파는 고공인력의 증가와 함께 이와 같은 여성인력의 투입이 그 변수가 되었다.

 모내기 방식이 전래의 ‘허튼모’, 또는 ‘막모’ 방식에서 줄에 맞추어 모를 심어 노동강도가 높은 ‘줄모’ 방식으로 바뀐 것도 일제에 들어와서다. 제초기가 보급된 것은 1932년 이후인데 ‘줄모’ 방식으로 모를 낸 논에서 사용되었다. 논농사는 논갈이부터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절차는 모찌기와 모심기부터다. 이른 아침을 먹고 모판에 모여 모찌기를 하는데 여자들은 엉거주춤 앉아서 쪘고 남자는 짚이나 풀을 한 웅큼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했다.

 마을에 방앗간이 들어선 것도 일제 때부터로 이는 특히 쌀 수출과 관련된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석발풍구’으로 현미를 만들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벼팔이’라는 중간상인이 있어 마을을 돌며 벼를 사서 큰 방앗간에 넘기는 일을 했다.

 농촌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라고 할 수 있는 줄다리기는 일제에 의해 크게 변형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줄다리기는 어느 지역에서나 마을행사에서 그치지 않고 면 또는 군 단위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일시에 수많은 농민들을 한 장소로 모으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매우 위협적인 행사였다. 그래서 광역의 줄다리기는 일제의 전 시기를 걸쳐 통제의 대상이 되어 마을 단위의 축소된 행사로 존속되거나 아니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제 이후 확대된 교통체계는 기존의 유통체계에 영향을 주어 해안 마을이나 섬마을 주민이 이전시기보다 어업의 의존도를 더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어업의 확대는 유동인구의 흡수와 맞물려 雇工 방식으로 일하는 선원의 수를 늘렸다. 일반적으로 한 사리, 즉 보름동안의 임금을 정하여 선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를 ‘용’이라고 하였다. 고공노동은 煎熬鹽에서 천일염으로 전환한 염밭에서 특히 활발하였다.

 교통체계의 변화는 정기시장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농촌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장은 여전히 빈터에 場屋이 설치되어 있는 전통적인 5일장이지만 교통수단의 발달로 도시의 상설시장에 대한 이용도도 높아졌다. 또한 도시에서는 상가가 기존의 정기시장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늘어나면서 장의 규모가 커져갔다. 충청남도 대전시장의 경우 대전역에서 인동시장에 이르는 구간에 3층 건물의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면서 정기시장체계 속에서 급속히 상설화되어 갔다.

 1914년에<市場規則>이 반포되면서 시장세가 국세로 지정되었다. 정기시장은 제1호 시장으로 분류되어 과거의 관례에 따라 賣買高의 1/100을 징수하였는데, 행정당국의 위임을 받은 경영인의 명에 따라 시장관리인이 시장이 열릴 때마다 징수한 듯하다.637)文定昌,≪朝鮮の市場≫(朝鮮總督府, 1941), 100쪽. 또 일제는 음력으로 열던 장날을 1937년에 강제로 모두 양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시장터에서 亂場의 방식으로 벌어졌던 민속행사들은 해방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행사장소로는 장터 한가운데나 우시장 자리가 주로 이용되었다. 난장은 7월 백중이나 추석 무렵에 날을 잡았다. 경찰의 입회하에 씨름판이 벌어졌고 평소에 엄하게 금지되던 도박도 허가되었다. 또한 난장에서 술장사를 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했다.

 거래관행에 있어서도 1년에 한번 씩 면에 불려가 의무적으로 거래 때 사용하는 기구들에 대한 검사를 받는 등 일제의 통제를 받았다. 됫박·저울·말 등의 도량형은 기본적으로 官印을 받은 것을 사용해야 했다. 싸전에서 쌀을 잴 때 사용하는 밀대도 모서리에 관인이 찍힌 것을 사용해야 했는데, 밀대가 완전히 둥그렇지 않거나 또는 가운데가 굽는 등 바르지 못하면 상인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더 담거나 덜 담게 되기 때문이다.

 일제 때 거의 모든 농민들이 고리대로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사례를 들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의 경우 1930년대 초반까지 長利가 연 10할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후 연 5할로 떨어졌다가 1930년대 후반에는 3할까지 내려갔는데, 그것은 마을주민들 간에 금융조합을 결성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고리대를 놓던 지주층과 알력이 빚어졌다고 한다. 1936년 당시 부곡리 주민의 부채는 현금 11,823원(금융조합 5,467원, 私債 6,355원)과 곡물 55섬 7말로 총 119호 중 99호가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이 높은 고리대에 맞서 주민들이 금융조합을 결성하여 3인∼5인의 연대보증으로 돈을 빌었다. 공동재산을 확보하고 있는 宗中에서는 여유자금으로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채를 놓았는데 이자는 일반적인 장리의 수준인 연 5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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