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5) 신앙과 의례

5) 신앙과 의례

 유교·불교·도교·무속 등 조선시기에 존재했던 여러 종교 및 신앙형태 중에서 조선의 멸망과 함께 가장 먼저 쇠퇴한 것은 바로 도교다. 유교적 질서 속에서 행해지던 국가의례나 군·현 단위의 의례도 향교제례 말고는 국권상실과 함께 사라졌다. 무속신앙도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비록 일제 말기에는 탄압을 받았지만 조선시기보다 번성하였다. 일제말기에는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가운데 일본종교가 침투해 들어왔다.

 중국 민간도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三帝君에 대한 신앙은 조선후기 이후 유행하였는데, 특히 삼제 중 關聖帝君(즉 蜀漢의 關羽)을 모시는 關王廟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서울과 지방에 세워졌고 이를 국가 및 지방관아에서 관리하였다. 善陰騭敎·칠성·직성 등 별자리와 관련된 신앙, 그리고 入宅할 때 날을 택하고 방위를 가리는 등의 신앙행위도 모두 민간화한 도교신앙이다. 그런데 관우신앙을 유지해온 집단은 서울의 경우 중인층·상인층 및 하급무관들이었고, 지방의 경우는 향리층이었다. 양반이나 상민, 또는 일반 농민들은 일제에 들어와서도 기존생활의 틀을 크게 바꾸지 않은 반면 농촌에 뿌리를 두지 않았던 이들 집단들은 도시 안에서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빠르게 변신하였고, 그 결과 이들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신앙들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무속에 대한 통제는 시기별로 차이를 보인다. 무단통치기에는 일본이 자국내 유사종교를 단속하기 위해 제정하였던<경찰범처벌규칙>(1912년 3월 25일 제정)을 근거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통제하였고640)최석영,≪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서경문화사, 1999), 87쪽., 3·1운동 이후인 문화통치기에는 ‘숭신인조합’ 등 무속인조합을 허가하는 등 완화된 방식으로 통제하였으며, 황민화정책을 강화하면서부터는 이를 신사신앙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 시기에 걸쳐<경찰범처벌규칙>은 계속 적용되었으며, 일제는 물론 조선인 단체에서도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무속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였다.

 ‘숭신인조합’은 일제가 천도교도 등 독립운동세력에 대항시킬 목적으로 합법화시킨 단체였지만, 무당들의 입장에서는 생계유지를 위해서도 일제가 허가한 이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에는 무속이 조선 전통의 신앙임을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신사신앙에 의한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꾀하려는 정책이 시도되었다. 그래서 무당들로 하여금 일본신도의 天照大神을 자신들이 모시는 다른 신령들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게 하였고, 또 그것을 전제로 巫業을 허가하였다.

 일제시기가 사회경제적으로는 물론 가치관이나 세계관 등 사상적인 면에서도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음을 반영하듯 이 시기 동안 많은 신종교가 출현하였다. 말세의 도피처로 널리 알려진 계룡산 신도안의 인구는 1918년 말에 585호에 2,667명에서 1923년 말에 1,639호에 7,256명이 되어 5년 사이에 약 3배의 인구가 늘어났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이곳에 신종교의 집회처가 많이 들어서고 신도들이 그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城隍祭·厲祭·기우제 등 유교적 질서 속에서 행해지던 군·현 단위의 의례들은 이를 뒷받침하던 제도가 소멸하고 이를 담당해 온 향리층들이 기존의 향촌조직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자연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향교 및 서원·사우에서 지방의 유림집단에 의해 행해지던 享祀들은 대부분 지속되었으며, 특히 서원·사우에서의 제향은 대원군 집정 때 훼철된 것들이 일제에 들어와 대부분 복설되면서 오히려 이전시기보다 활발해졌다.

 군·현 단위의 의례가 쇠퇴한 반면 마을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洞祭는 일제말기 이전까지는 크게 위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되었다. 또한 향리층이 주도해 온 성황제나 오거리당산제와 같은 읍치를 중심으로 행해졌던 의례 중에는 마을단위로 축소되어 그 명맥을 유지해온 사례도 보인다. 동제가 위축된 것은 농촌의 경제형편이 열악해진 1930년대 후반 이후부터로 일제는 이러한 공동체 신앙행위가 ‘황민화’나 신사신앙을 강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고 정책적으로 탄압하였다.

 일기≪紀語≫의 다음 기사들을 보면 농촌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기존의 신앙체계가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7월 1일:늦가뭄이 불과 같이 심해 곡물이 말라죽으니 손해가 두렵다. 기우제를 지내자는 의견이 가뭄이 심한 들에서부터 있었다(≪紀語≫, 1928년).

7월 5일:면사무소에서는 용두강 용추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紀語≫, 1928년).

7월 9일:면사무소에서 古例에 따라 문수동 용추에 호랑이 머리를 던져 넣은 지 몇 일이 되었으나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고 한다(≪紀語≫, 1928년).

7월 11일:內竹의 덕천정에 가서 관내의 모모한 사람들과 기우제 건에 대해 상의하였는데 오는 13일로 기우제 날짜를 정하고 밤에 돌아왔다(≪紀語≫, 1928년).

7월 12일:구장 등 임원들로 하여금 기우제 제수 및 모든 일의 준비를 하게 했다. 제관은 이남의 및 이응현, 정기이다. 나는 감독을 맡았다. 제문은 정기가 지었다(≪紀語≫, 1928년).

6월 7일:관내 당골과 용두진의 뱃사공이 와서 1말씩을 주었다(≪紀語≫, 1929년).

9월 22일:광촌부인을 반곡 천동 선산 아래에 장사지냈다. 김정주의 집에서 노제를 지냈는데 우시장터에서는 노제를 금하기 때문이었다(≪紀語≫,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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