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2. 의생활
  • 1) 의생활 변화의 흐름과 양상

1) 의생활 변화의 흐름과 양상

 근대 우리 나라 의생활 변화의 첫 단계는 개항이후 1884년 衣制改革과 1895년 乙未改革을 정점으로 시작된다. 특히 을미개혁의<斷髮令>과 함께 1899년 외교관 복장의 洋服化, 1900년에는 관원의 大禮服까지 양복으로 바꿈으로써 신라통일 이후 1300여 년간 國制와 中國制가 혼용되었던 二重構造의 틀에서 벗어나서 다시 국제와 西洋制라는 새로운 이중구조를 형성하였다.<단발령>과 함께 외국제 수용이 전재되었던 의제개혁은 민간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官과 민간주도로 전개되는데 구체적으로 생활개선이라는 명분에서 한복개량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때 민간인 주도자들은 주로 신교육을 받은 층과 신종교인이었다.

 한편 이러한 개혁과 변화들에 대하여 일부 班家나 儒林측에서는 존비·상하의 붕괴와 전통윤리의 상실 등에 대한 우려를 구실로 반발을 일으킨다. 이런 와중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수구세력과 이에 대립된 개혁세력 사이에서 우리 옷과 양복이 혼용되는 이중적인 양상이 대두하였으나, 서양복은 이 시기에는 일부 소수층에서만 이용되었다. 이런 세태속에 특히 1900년 초에는 아직 서양옷이 낯선 때이므로 “어떤 여인이 양복을 입고 洋鞋까지 신었는데 그 위에 장옷을 썼다. 장옷을 쓰면서 왜 양장은 입었으며, 양복을 입으면서 왜 장옷을 썼는지 기괴한 일”641)≪帝國新聞≫, 1906년 7월 23일.이라 하여 어설픈 혼용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의례를 대표하는 冠婚喪祭와 이에 따른 복식은 그 변화의 비중이 매우 컸다. 이 가운데서도 혼례는 신식과 구식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혼용되는 가운데 “新舊절충으로 하되 대례복은 폐지하도록 하자”642)≪매일신보≫, 1932년 1월 7일.는 안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가 강점하자 일본옷 기모노가 일부 친일파와 유학생들에 의해 서서히 침투되면서 다시 한복·양복·일본옷의 혼용이라는 삼중구조를 이루기도 하였다. 특히 衣服改良運動과 함께 우리 옷은 비실용적이며 비경제적이라는 미명하에 잠시 외면당하면서 원형은 다소 잃었지만, 그 맥은 남게 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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