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2. 의생활
  • 3) 변화의 양상
  • (1) 두식(모발과 관모)

가. 남자

 남자의 두발과 모자는<단발령>을 기점으로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다. 단발을 함으로써 모발수습에 사용하였던 망건이 실용성을 잃고, 따라서 관모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투는 잘랐지만 冠을 중시하던 사람들 층에서는 집에서도 宕巾이나 程子冠을 쓰기도 하고, 외출할 때는 黑笠을 썼다.

 <단발령>이 심한 반발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자 1896년≪독립신문≫에는 “단발은 백성들의 자유 의사에 맡기는 것이 옳고, 관인과 군사와 순경은 단발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어느 정도 융화책을 쓰기도 하였다. 한편 신식군대의 영향을 받은 培材學堂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단발한 것을 격찬하면서 “교복과 단발은 개화의 상징이며 부국강병을 위한 희망”668)≪독립신문≫, 1896년 5월 26일, 6월 16일.이라고 하였다. 1913년 경남 陜川郡의 단발 찬양론자는 신문에 “상투야 잘 가거라. …위생에는 상적이 되고 사무에는 마귀로다”라는 상투작별가669)≪매일신보≫, 1913년 2월 5일.를 기고하기도 하였다.

 <단발령>과 양복착용으로 서양화하는 즈음 전통적인 衣冠整齊의 풍속은 1919년 2월 高宗이 승하하여 國喪을 당하자 난관에 부딪힌다. 成人은 국상기간 동안 白笠을 써야하는데 백립은 효용성이 없어지자 생산을 그만 두었으므로 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때 西洋帽를 고안하여 만든 純白中折喪帽, 純白鳥打喪帽670)≪매일신보≫, 1919년 2월 19일.가 나왔는데 이 서양모자들은 백립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대로 대용품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일본가게에서 팔고 있는 中折帽인 “나카오리”는 반일감정에 의해 국민들로부터 도외시되자 재빨리 기호에 맞게 바꾸어 팔기 시작하였다. 1926년 純宗 국상 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국상은 언제 날지 알 수 없으나 시중의 베깁과 흰 신 등은 평소에 팔리는 것보다 많다. 아침에 국상의 비보가 돌자 백립을 사러 나온 사람의 수효가 3배나 늘었으며, 한 개에 값이 육십 전 하던 것이 일 원 이십 전으로 갑절이나 올랐다. 작년 흉작으로 麻布 시세가 高價인데 李王殿下 환후가 위중하심을 듣고 시내 상점들은 마포 유입에 열중하여 그 시세가 폭등하였다”671)≪동아일보≫, 1926년 4월 27일.라고 하였다.

 서양모자의 수요는 일간지의 광고 빈도에서도 가름할 수 있다. 이는 양복·구두와 함께 가장 많이 광고되고 있는데 종류에 따라 가격이 제시되고 지방에서 구매할 때의 이용법까지 안내하고 있다. 종류는 파나마·맥고·중절모·조타모·방한모·일출모·운동모 등이 있었다. 관모는 의관을 중시했던 우리의 관습상 단발은 하였지만 의례와 외출할 때는 누구나 쓰기를 원했다. 마땅한 관모가 없었던 터에 국상 때 썼던 서양모는 어느 정도 욕구를 채워주기에 합당하였으며, 이에 새로운 관모의 풍속도가 생겨났다. 이 때도 난방용으로는 휘항·아얌·만선두리·남바위가 사용되었으며, 외출 때는 남바위 위에 흑립을 얹어 쓰기도 하였다. 노동시에는 日射와 비를 피하기 위한 삿갓이, 상주용으로는 方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발은 1940년대가 되면 대부분 대머리나 하이칼라머리로 정착되었고 전통 관모인 탕건이나 흑립은 일부 노인층의 전용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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