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3. 식생활
  • 1) 식생활 환경의 변화
  • (3) 일본의 곡물 수탈

(3) 일본의 곡물 수탈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은 일본은 다음 단계로 미곡 수탈하기 위하여 산미증산계획을 세웠다. 1920년부터 15년간 계속되었는데 산미증산계획 이후인 1930년에 일본에 가져간 쌀은 1910년대의 8배에 달하였다. 일본인 학자 야기(八木芳之助)는 이에 대하여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반하여 수출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지적하고 있다.707)八木苦之助,≪米穀統制論≫, 81쪽.

 무리한 미곡의 대일 수출은 국내의 쌀 소비를 격감시켜 서민들을 식량난에 허덕이게 하였다. 산미증산계획 이전에 일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0.7188석이었는데 1930년대 들어서서 0.4017석으로 무려 44%가 감소하였다.708)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편,≪한국문화사대계≫Ⅱ(1965), 906쪽 도표 참조. 일제는 국내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밭곡식인 보리·콩·조 등의 개량과 증식에 주력하였다. 양질의 잡곡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한국에는 저질의 수입 곡물을 대치하여 들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민들은 대부분 산야에 있는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난은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군량에 필요한 곡물을 공출당함으로써 더욱 혹심하여지고 조선인은 감자류를 식량을 대신해야 했다.709)강인희, 앞의 책(1990), 411쪽. 1941년 일제의 전쟁 도발이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는 그들의 군수물자 조달지로 바뀌어 특히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