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3. 식생활
  • 2) 식품의 종류와 유통
  • (8) 조미식품

(8) 조미식품

 소금:민간에서의 제염은 염수를 조리는 방법(煎熬式)이 쓰였으나 연료가 부족하고 생산비가 높아져 조선조 말기에는 값이 싼 중국 소금이 들어와서 발전이 저해되었고, 천일염은 官營으로 생산되었다. 색이 검은 원염은 장 담을 때, 김장할 때, 또는 어류의 염장에 많이 쓰였다. 원염을 정제한 식탁염이라 하는 고운 소금은 일본이나 외국에서 수입하여 공급되었다. 1921년부터 부안의 공장에서 만든 우량 소금이 시장에 나와 많이 팔리자 시설을 더 확장하여 생산량을 급증시켰다. 천일염은 평남 용강군 광량만에서 많이 났고 재제염은 인천 만석동과 궁동에서 많이 났고, 고양군 한지면·부산 영선동·김해군 명지면·청진의 포항동에서도 산출하는 것이 많았다.

 장류:전통적으로 집집마다 콩으로 만든 간장과 된장으로 음식의 맛을 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많이 이주하면서 일본 된장과 간장을 먹게 되었고, 새로운 장의 맛에 익숙해져 이들 장을 사서 먹는 양이 늘어났다. 일본 간장은 재래 간장과 구별하여 왜간장이라 불렀는데 공장은 대전과 강경에 많이 세웠다. 간장 생산은 1910년에 2만 석이었고, 1924년에는 6만 3,000석으로 증가하였다. 1910년에 일본에서 8,000석을 사들였지만 1924년에는 3,000여 석으로 감소하였다. 1924년에는 2,400여 석을 일본에 수출할 정도로 간장 생산이 많아졌다.

 조청:전통적으로 엿을 만드는 기술은 어느 가정에서나 잘 전승되어 왔다. 곡식을 엿기름으로 당화시켜서 만든 감미료로 묽은 것은 造淸이라 하고, 되게 조린 것은 갱엿이라 한다. 전쟁 중에는 식량 기근을 겪어서 엿을 만들 여유가 없었고, 설탕 배급은 쌀보다 얻기가 더 어려워 유아의 우유에 넣을 설탕조차 크게 곤란하였다. 그래서 엿을 시골에서 몰래 만들어 시장에 내오면 날게 돋친 듯이 팔렸다고 한다.

 꿀:淸蜜이라 하여 감미료로 오래 전부터 쓰여 왔다. 자연산으로 강원도를 꼽고 평북의 강계산도 유명한데, 이 들 산간지방에서는 반야생으로 꿀벌을 양봉했다. 꿀은 꿀의 종류와 채취 방법에 따라 石淸·白淸·熟淸으로 나뉘는데, 그 중 석청은 심산유곡의 바위 구멍에 벌이 집을 짓고 고산식물의 꽃에서 모아진 꿀로 독특한 향이 나며 값이 가장 비쌌다.

 양봉은 벌통을 꽃이 많이 핀 곳으로 옮기면서 꿀은 모으는 것으로, 채집하는 식물에 따라 아카시아꿀·유채꿀·싸리꿀·메밀꿀 등으로 나뉜다.

 설탕: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무(甛菜)의 재배가 한국 풍토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06년부터 권업모범장이라는 것을 전국에 만들어 시험 재배를 한 결과 평남·황해도 등 서부지방이 우수하였다고 한다. 1917년 조선제당주식회사를 평양에 세우고, 1919년에는 일본제당 주식회사와 합병하여 평양 대동강변 선교리에 공장을 만들고 제당 작업을 개시하였다. 평남·황해도 농민에게 사탕무 재배를 계속 추진하였는데 수확량이 적어서 한국에서 수확한 사탕무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공장에서 제당을 하고, 그 외의 계절에는 대만과 하와이에서 粗糖을 수입하여 精製糖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만든 설탕은 국내는 물론 일본·남지나까지 수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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