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4. 주생활
  • 1) 주생활 개선을 통한 주택개량운동

1) 주생활 개선을 통한 주택개량운동

 개항 이후 새로운 외국문물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주생활의 개선을 통하여 근대화를 이루려 노력하였다. 그것은≪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도시와 건축환경에 대한 개혁도 주장되었다. 도시와 주택환경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주로 위생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근대적 도시기반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전통도시에서 불량한 도시환경이 미치는 공중보건의 위협은 중요한 개혁대상으로 대두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가 ‘도로배수가 위생상의 제1방책’이라는 주제의 대중토론회를 시작한 이후,≪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하여 수원지·목욕탕과 공중변소의 설치를 주장하는 등 도시의 위생설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되었다.724)김순일,<개화기 住意識에 관한 연구>(≪건축학회지≫26-106, 대한건축학회, 1982. 6), 28쪽에서 재인용. 이 중에는 도시화에 따른 다층건물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도 있었다.725)盧基崇,<我韓不衛生的家屋觀>(≪서북학회월보≫1-14, 1909년 7월). 이러한 생각들은 도시화에 의해 새롭게 대두되는 도시 환경의 변화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도시환경문제만이 아닌 주거환경에 대하여도 비위생적 요인들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코자 하였다. 재래식 화장실의 개선은 주거환경의 차원을 넘어 도시환경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또한 일조와 통풍의 중요성을 분석하여 남향 거실과 높은 처마의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창호에 통기구를 설치하여 환기를 개선하거나, 산소를 얻기 위해 정원에 초목을 재배하자는 주장도 제기 되었다.726)김순일, 앞의 글, 28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생활개선운동은 도시와 주거환경에 대한 주체적·근대적 인식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근대적 의식의 성장과 함께 전통적 관습의 시대적 모순을 파악하고, 서구문물을 참조하면서도 서구화에 경도되지 않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민중의 생활환경을 개선함으로써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 지식인들은 건축교육을 받은 전문인들이 아니었고,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일제 식민지기로 전이되면서 실천적 힘을 결여하고 말았다.

 전통적 주거환경과 근대화된 생활양식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일제 중반기에 다시 그 맥을 잇게된다. 1922년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교화회가 발족되고, 1923년≪동아일보≫를 필두로 한 신생활운동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가족제도 및 의·식·주 등 이중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식 주택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위생을 위한 채광,환기의 고려, 주부 노동동선의 편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식당의 설치 등 전통주택의 개량에서부터727)≪동아일보≫, 1922년 1월 1일∼1928년 1월 7일., 서양식의 의자식 생활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728)≪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까지 다양한 제안도 나타난다.

 이러한 운동에는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건축전문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23년 건축사 李醺雨는 완전히 경험적 반복에 의존하고 있던 재래의 집 짓는 방식에 대하여 불합리함을 언급하면서 전체설계, 구조, 모양의 아름다움, 이 세 가지가 알맞게 되어야 이상적인 주택이라고 주장하였다.729)≪동아일보≫, 1923년 1월 1일,<재래주택의 문제점>. 이는 구조·기능·미라는 건축의 근대적 가치가 논의된 최초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서구적 생활양식으로의 전환에 따른 새로운 주택의 제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金惟邦은 그의 논문<문화생활과 주택>730)≪開闢≫ 32∼33(1923년).에서 우리생활의 단점을 제거하고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에서 서구인 생활의 장점을 취하여 이로써 새로운 생활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래주택의 장단점을 들어 현재 구미의 소주택 경향과 견주면서 2가지의 주택모델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건축가 중에는 서구문화의 맹종을 비판하면서 한국 주거환경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朴吉龍은 1930년<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731)≪조선일보≫, 1930년 9월.에서 당시의 주택유형을 첫째 구미식의 맹종, 둘째 일본식의 가미, 셋째 재래식과 서양식의 혼합, 넷째 재래식의 고수로 분류하였다. 그는 우리의 신문화 주택이 서양식도 재래전형도 서양식의 혼성체도 아니라고 비판했다. 요컨대 장구한 생활이 낳은 재래형식을 토대로 하여 과학적인 양식의 구축법을 구성수단으로 하고, 우리의 취미로 장식하여 현대 우리생활의 용기가 될 기구가 우리생활의 표현이라고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 주택에 대한 피상적 논의와 즉흥적인 유행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였고, 도시적 차원에서 생활과 관련시켜 주택지를 설정할 것과 순수 계획적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의 주택을 계획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건축기준 또는 방법의 제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박길룡의<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여>에서 제안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택지면적과 건축면적:집중적 평면채택과 건폐율 4할 제안

② 각실의 배정:ㄴ, 矩형 평면채택, 주거부분과 종속부분의 분리

③ 각실의 방향:주거부분은 동·남향, 종속부분은 북·서향

④ 간 단위의 통일:8척

⑤ 대문과 현관:일본식 현관 제안

⑥ 행랑의 폐지

⑦ 다락의 폐지와 반침의 설치

⑧ 장독대:최소화, 부엌과 가까이에 배치

⑨ 변소:현관부분에 배치

⑩ 기초와 장대:장대의 폐지와 콘크리트 기초 사용

⑪ 문지방:미닫이는 없애고 여닫이 1치 정도

 (최순애,<박길룡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연구>, 홍익대 석사논문, 1982, 93∼110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제안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주거건축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근대적 주생활을 수용하려는 건축가의 의지로 평가된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와 극심한 주택난에 처하면서 이러한 전통논의는 지속력을 상실하게 된다. 전통논의보다는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규격화된 소주택의 대량공급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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