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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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조선주택영단의 설립과 영단주택의 건설

4) 조선주택영단의 설립과 영단주택의 건설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의 식민통치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반도내에 군수산업을 비롯한 산업시설들을 건설하게 되었고, 여기에 근무하는 노무자들을 고용하기 위하여 많은 농촌인구를 도시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일제에 의한 토지수탈정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에서는 인구가 갑자기 팽창하게 되었다. 1925년에 서울의 세대수가 6만 7,530세대이던 것이 1944년에 22만 938세대로 19년만에 3.3배가 증가한 것은 이러한 농촌인구의 도시이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구이동에 따라 도시에서는 점차 심각한 주택부족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1944년 서울에서는 거의 절반 정도가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세를 얻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주택부족 현상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새로이 공업도시가 된 청진이나 원산에서는 서울보다 더 심각하였다고 한다.

구분 주거(호) 세대 인구 부족률 부족률 1호당인구 備考
1925년
1931
1933
1935
1936
1938
1939
1941
1944
63,802
69,453
70,767
?
?
?
132,000

 
67,530
77,710
79,519
131,239
138,583
148,856
154,233
173,162
220,938
302,711
365,432
332,491
636,955
677,241
737,124
930,547
974,933
1,078,178
3,728
8,248
8,920
29,472
30,637



88,938
5.5%
10.6
11.2
22.5
22.1



40.3
4.45
4.70
4.80
4.85
4.88



 
日本人不足率
4.97%
韓國人不足率
26.8%

<표>경성부 호구 누년표

조선총독부,<조선연감 1925∼1944판 인구란>(≪주택공사 20년사≫, 1979, 163쪽에서 재인용).

 이때까지 도시에서의 주택공급은 일본인들이나 한국인 집장사들이 맡아 하였는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는 건축자재가 부족하여지고 주택가격이 통제되어 많은 양을 지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 총독부에서는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1941년 朝鮮住宅營團을 설립하여 계획적으로 대량의 주택을 공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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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구 도림동 영단주택단지 배치도
<그림 5>구 도림동 영단주택단지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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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택영단은 설립과 동시에 주택건설을 위한 4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매년 5,000호씩 모두 2만 호를 짓기로 하였다. 이러한 주택을 짓기 위해 신시가지로 개발된 곳에 많은 주택이 들어 설 수 있는 주택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토지구획 정리로 조성된 주택단지는 6∼8미터 폭의 격자형 도로망으로 街區를 구획하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만들어졌다. 대가구 내에는 2∼3미터 폭의 사도를 계획하여 2∼4개의 소가구를 구성하였다. 대가구의 중심에는 공지를 마련하여 소공원의 기능을 부여했다. 한편 단지 내에는 공중목욕탕과 이발소·상점·의원 등 근린생활시설을 위한 대지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주택단지의 형성은 최초의 근대적 주택단지가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직선화된 격자형 도로망과 소공원의 설치, 근린생활시설의 계획 등 단지계획에 의한 주거설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단지계획의 방식은 해방이후 까지 도시 주거단지계획의 전형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기하학적 틀 속에서 반복적으로 건설된 주택의 외관은 전통적인 도시경관을 변질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경사가 심한 자연지형 안에서 이러한 형식의 단지개발을 위해 지형의 훼손도 예고되어 있었다.

 주택영단은 그러한 단지 안에 많은 주택을 반복적으로 건설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주택형의 표준설계를 만들었다. 갑·을·병·정·무로 분류된 다섯 가지 유형은 본래 수요자의 경제계층에 따라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규모가 큰 甲과 乙형은 일본인 관리나 직원들을 위한 단독주택이었고, 작은 규모인 丙형 이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위한 연립주택이었다. 즉, 한반도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고, 곁들여 한국인 노무자에게 사택을 제공하여 생산력 확대를 꾀하기 위한 이중적 방책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주택들은 ‘營團住宅’이라 하여 서울을 비롯한 지방도시에 까지 대규모 주택단지 안에 건설되었고 1942년에는 3층 아파트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표준주택은 기본적으로 일본식의 주거에 근거한 것이었다. 1동의 건물안에 모든 주거공간을 갖추고 현관을 통해 출입하며, 중복도로 각 공간이 연결되는 폐쇄적 집중형 평면이다. 여기에 다다미 규격을 모듈로 사용하였으며, 일본식 미닫이 장지문을 내부구획으로 둔 점이나 마루바닥에 철제 가마솥을 설치한 욕실 등 일본주거의 내부공간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한국적 기후상황에 따라 온돌방이 일부 설치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식의 주생활을 염두에 둔 공간구성이었다.

 외관 또한 일본식 건물을 기준으로 디자인되었다. 일본인들이 개발한 大壁式 구조가 사용되었는데, 대벽식 구조는 3.5촌의 기둥사이를 대나무로 얽어 거기에 시멘트 혹은 흙을 발라 채우고 다시 철망을 덮어 기둥 채 몰탈을 바르는 공법이었다.739)대한주택공사, 앞의 책, 181쪽. 유리창과 콘크리트 구조의 기초가 사용되었고, 내부는 회칠로 마감되었다. 여기에 시멘트 기와를 얹은 양만 경사지붕을 사용하여 일본 근대도시주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것은 한반도에 이식된 식민도시의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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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영단주택 표준설계도
<그림 6>영단주택 표준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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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상도동 영단주택의 외관
<사진 5>상도동 영단주택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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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단주택 건설은 최초의 공공주택사업이며, 단지계획을 통한 집합주거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급속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주택의 공급이 정책적 차원에서 다루어진 것이다. 조선주택영단은 해방이후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이 되어 주택정책을 실행하는 공적기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한주택공사의 주요한 주택공급방식인 집합주거단지의 개발 또한 영단주택의 계획이 그 효시가 된 것이다.

 영단주택은 또한 근대건축의 요소를 일반화 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철과 유리·시멘트 등 공장에서 생산된 건축재료가 사용되면서 대량공급을 위한 시공의 경제성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재료의 사용은 새로운 구조와 형태로의 전환을 동반하였다. 그것은 전통적 주거형태를 대체시키는 새로운 건축양식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영단주택의 건설은 주택의 정책적 공급이나 근대적 주거로의 전환 이외에 식민지배정책의 일환이었다는 부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일제는 주거형식의 변환을 통한 식민지배의 영속화를 꾀하고 있었다. 1939년 경성부에 주택대책 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그 취지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주거양식이 국민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실생활에서의 內鮮一體의 구체화를 꾀하는 최대로 유효한 방법으로 재래 조선식 주택양식의 개량방책을 장려하기 위한 것”740)≪동아일보≫, 1940년 3월 1일.이었다.

 이는 주거양식의 개조가 생활과 정신의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증거이며, 일제는 주택의 개조를 식민화 정책의 최유효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즉, 주거문화는 한 사회집단의 생활양식이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주거문화가 변질될 경우 다른 사회집단에 쉽게 동화될 수 있다는 실증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姜榮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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