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1. 해방 이전 미·소의 대한정책
  • 1)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형성

1)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형성

 태평양전쟁에서 일제에 대항해 연합국의 군사적 대응을 주도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질서 재편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 무렵 정식화된 미국의 ‘대지역(Grand Area)’ 구상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대체할 만한 것이었다. 미국은 구제국주의체제의 식민지 분할방식이나 태평양전쟁 이전 동아시아에 대해 미국이 취했던 세력균형책과 질적으로 다른 단일한 세계체제의 수립에 입각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상정했고, 여기에서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은 전후 신질서를 위한 핵심지역(a key world area)으로 간주되었다.002)미국의 전후구상에서 ‘대지역’ 개념이 등장하여 전후 ‘신세계 질서’에 대한 구상으로 발전하고 또 이것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정용욱,≪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12∼32쪽 및 Laurence H. Shoup and William Minter, Imperial Brain Trust: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and U.S. Foreign Policy(New York:Monthly Review Press, 1977), 125∼141쪽 참고.

 미국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부터 전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신세계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전후구상에 들어갔다. 미국의 전후구상을 선도한 것은 미국의 독점자본가집단의 이해관계를 대외정책으로 정식화하는 기능을 맡고 있던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였고, 이들이 주도한 ‘전쟁과 평화’ 기획(‘War and Peace’ Project) 참여자들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국무부 전후 대외정책에 관한 자문위원회(The 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y)’에 대거 참가하여 전후 미국의 세계전략과 대외정책을 구상하고 입안하였다. 아래<표>는 미국의 기획집단에 의해 전후 대한정책 구상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미국측 중요 문서들을 중심으로 개괄한 것이다.

각 단계 총론적·원칙적
토론 단계
정책 준비 단계 정책 결정 단계
해당시기 1942년 2월∼
1943년 6월
1943년 3월∼1945년 1월 1945년 3월 이후
문서제목과
작성시점
<P31, 정치소위
원회 잠정견해:
한국과 사할린>,
1942년 8월 1일
<T318, 한국의 내
부 정치구조>, 1943
년 5월 19일
<P-B81, 한국의 독
립정권 수립문제>,
1944년 5월 28일
<H200, 한국:정치
문제:국제적 감독기
구의 필요성>, 1944
년 11월 13일
SWNCC 77, 78, 79,
101 계열의 점령, 군
사, 군정, 국제민정기
구에 관한 일련의 정
책문서들
작성목적 한국에 대한 전후
처리 원칙의 제시
관련 사실 수집과
조사·분석
정책 작성을 위한 잠
정 지침의 제시
정책요강(Policy
Summary) 제시
정책 지침 작성
주요내용 전후 식민종속지
역에 적용할 신탁
통치안의 일반 원
칙 마련과 지역별
적용 방안 점검.
한반도 국제 신탁
통치안 제시
독립 실현 방안, 국
내 정치구조, 주변
강대국의 태도, 경
제자립 전망, 영토
와 국경선 문제 등
한반도 신탁통치안
의 실시와 관련된
구체적 문제 검토
① 정령-독립 사이
의 과도기에 적용될
정책계획 제시:군정
실시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이후는 군정
실시단계와 유엔의
민간행정단계로 구분
② 국제민간행정부의
구성, 관리, 운영방법
제시
③ 4강대국의 협정에
의한 군사적 안전보
장 장치 마련의 필요
성 제기
한반도의 독립과 관
련하여 ① 국제적 측
면 ② 안보문제 ③
한국인의 독립능력의
세 측면을 구체적으
로 검토, 연합국의
공동 점령·공동 관리
를 지향
점령군의 구성, 군정
에 의한 한국인 취급
원칙, 군정청 행정에
한국인 이용문제, 과
도적 국제기구 등의
개별 사안들에 대한
실무적인 정책 지침
논의
담당기구 자문위 정치소위 자문위 영토소위 협의회 ‘기획’ 정치소
위원회
국무부 정책기획위원
회 한국소위원회
삼부조정위원회 및
산하의 극동소위원회
비고   카이로선언 한국관
련 조항의 기초
  얄타회담을 위한 요
약보고서의 성격
최종 지침은 1945년
9월∼10월에 완성

<표>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구상 발전과정

 이러한 전략적 구상에 입각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전후 미국이 이 지역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전후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패권과 주도권을 상정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지역 문제 해결의 일반적 방침으로 마련된 것이 신탁통치안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는 전후 유럽의 구제국주의국가들 및 여타 강대국의 동아시아 지배를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이 지역의 각성한 민중들에 의해 민족주의운동이 점차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독립 열망을 어느 정도 개량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안전밸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003)미국측 전후구상 주창자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미국의 의도를 잘 나타내준다. “식민지 민중은 자치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 이들 지역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이는 세계안보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밸브가 없으면 보일러는 터져 버릴 것이다.”(미국 국립문서관, RG 59, Notter File, 상자번호 55,<정치소위원회 회의록, 제50차 회의 의사록>, 1943년 4월 3일). 신탁통치안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게 될 조건에서 미국의 안보와 미국 자본의 자유롭고 안전한 전세계적 활동을 위한 장치이자 식민지역에 대한 새로운 관리방식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기간 중 당면한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동시에 전후구상 실현을 위한 조건 마련에 골몰하였다. 미국은 카이로회담·얄타회담·포츠담회담 등 전시 연합국 회담에서 영국·중국·소련으로부터 신탁통치안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려 하였고, 종전이 다가오면서 특히 소련으로부터 확약을 받아두려고 하였다. 전후 한국의 장래에 대한 최초의 국제공약인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미국의 주도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004)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 3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그 결과 카이로선언을 발표(11월 27일)하였다. 이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의 박탈, 만주·대만·澎湖諸島의 중국 반환, 조선 해방 등 연합국의 對日戰 목표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영국·중국·소련은 한국의 독립에 대해 원칙적 동의를 표시하였으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태도를 취하였을 뿐이고 미국은 종전까지 명문화된 국제적 협정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005)신탁통치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미국측의 외교노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Department of State, “United States Policy Regarding Korea, Part Ⅱ, 1941∼1945”(≪미국의 대한정책 1834∼1950≫,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1, 1987) 2부.
Michael C. Sandusky, America's Parallel(Alexandria, Virginia:Old Dominion Press, 1983).
영국·중국 및 소련의 반응에 대해서는 구대열,≪한국국제관계사연구 2≫(역사비평사, 1995), 3∼5장 참고.

 또 종전시 이 지역의 군사정세가 이후 한국문제 처리에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므로 미국의 발언권과 주도권 확보를 위해서 정치·군사상황을 미국 측에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는 현실적 대비책이 필요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군사적으로 대항했던 것은 주로 미국이었으며 다른 연합국들의 전쟁 수행에서도 미국의 군비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막강한 소련 지상군의 존재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동북아시아에 초래할 정치적 영향력은 미국으로서는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미국 군부는 이러한 불투명성에 대비해 연합국 공동점령·공동시정 방침 내지 분할점령안을 마련하였다. 38도선 분할점령도 이러한 고려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현실적인 군사력 배치상의 애로, 소련의 대응을 조화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006)미국 군부의 전후 대비책 논의과정 및 계획내용에 대해서는 정용욱, 앞의 책, 32∼42쪽 참고.

 또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통해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과의 관계를 조절하려고 하였다. 태평양전쟁기에 미군 OSS는 重慶 臨政 산하의 광복군과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고,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필리핀에서 원주민 게릴라의 반일투쟁을 지원하는 등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과 부분적으로 연대하였다.007)한국인 독립운동세력의 참전을 둘러싼 한미간 교섭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용욱, 위의 책, 42∼67쪽 참고. 신탁통치안은 이러한 제한적 연대를 전후에도 지속시키며 아시아 민족운동의 열기를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개량적으로 흡수하려던 시도였다.

 해방 직전 동아시아 정세를 결정한 기본적 대립축은 파시즘 대 반파쇼세력의 대결이었고 이러한 기본적 역관계 안에서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미국의 전후구상이 대결하였다. 그리고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점차 후자가 전면에 대두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세력에게는 적잖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이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에 대한 전면적 억압의 논리였다면, 신탁통치 구상은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과의 부분적 제휴와 연대를 통한 민족주의운동의 제한적 분출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동아시아에서 반제반파쇼투쟁은 민주주의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대항하는 반파시즘진영은 한 힘이 아니었고 일제의 무조건 항복은 여러 세력의 공동노력의 결과였다. 반파시즘 진영은 자본주의체제를 대표하는 미국, 사회주의체제를 대표하는 소련, 반제반일투쟁 과정에서 성장한 동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세력들은 대동아공영권의 붕괴 후 동아시아의 전후 신질서를 놓고 내부 대립과 세력 재편을 겪게 되었다. 이미 대일전 수행 과정에서부터 미국의 전후 처리방안을 놓고 미국·영국·중국·소련 사이에 이해관계의 대립이 잠복해 있었고, 이들 사이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장과 주도권 확보를 위한 견제와 경쟁이 계속되었다. 또 한반도의 민족해방운동세력 역시 전후 독자적인 국가건설노선을 가지고 미국의 신탁통치안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 군부는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자, 對日작전의 일환으로, 또 전후 한반도의 정치적 처리와 관련하여 점령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군부의 군사적 고려에 깔린 생각은 그 이전 단계의 전후기획의 연장선상에서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의 주도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급적 중요한 지역을 조기에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8선 분할점령은 대일전 조기종결이라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러한 자신의 구도를 관철시키려던 노력의 결과였다.

 해방 이전 미국은 해외 한국인 민족운동단체와 그 지도자들을 광범하게 접촉하면서 한국인 민족운동세력들의 내부 정세에 적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이 시기 미국의 對韓人政策은 한국의 민족운동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미국이 한국 민족운동세력의 동향을 항상 ‘독립능력’의 측면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국이 이들의 동향을 전후 정세와의 관련 속에서 예의 주시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은 각 지역의 한인단체들을 평가할 때 지도력(지도자)의 제공과 주민들의 행정실무적 능력의 양 측면을 분리하여 평가하였다. 전반적으로 미국은 해외의 한국 독립운동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이 국내의 지도자들보다 독립과 해방 이후 정부수립에 관해 비교적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반면 정부운영과 관련된 실무적 능력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련 영토 내의 귀화한인들과 만주지역의 한인들 일부 정도이고 그 외의 해외세력들은 근대적 행정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만 일제에 의해 고용되었던 한국 내 관리들은 전후에도 한국의 행정에 하급관리로 고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미국은 해외의 모든 한인단체들이 가능한 빨리 독립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하고, 그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방법과 수립되어야 할 정부의 정확한 형태라고 평가하였다. 즉 미국은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조기독립 열망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 사이의 차이가 전후 새로 수립될 정부의 형태와 수립방법을 둘러싸고 집약적으로 표출될 것이라는 점을 익히 예상하였다.

 더하여 미국은 한국 독립운동단체들이 주재해 있는 각 지역의 정치적 동향과 이것이 각 단체들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 해당 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정치적 관련성을 예의 주시하였다. 미국은 중국정부가 臨政에 끼치는 영향력을 의구심을 가지고 지켜보았고, 만주와 소련 연해주지역의 한인단체와 소련의 관계가 이후 한국 정치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였다.

 전체적으로 미국은 중국과 미주지역의 한인 독립운동단체들의 정치적 성향 차이, 조직적 분화나 지도자 개인들 사이의 반목 등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중국 화북지역과 만주·소련령 연해주지역의 단체들 및 한국 내의 정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그 동향을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들 각 단체의 정치적 지향성이 갖는 국내적·국제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들 내부 정세와 미국의 전후 정책구상의 조응 문제가 종전이 다가오면서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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