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2. 해방 이후 미·소의 점령정책
  • 1) 분할점령과 미·소의 초기 점령정책

1) 분할점령과 미·소의 초기 점령정책

 미국은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세부에 대해 강대국의 완전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일단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자 점령군이 의지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의 마련, 한국문제의 처리원칙에 대한 내부적 방침의 확정과 국제적 승인의 확보가 정책담당자들의 현안이 되었다. 특히 미군정과 동경의 맥아더사령부011)정식 명칭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Allied Powers)였지만, 내용적으로는 미 극동군사령부(GHQ, FEC: General Headquarter, Far East Command)였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맥아더사령부로 불렸다.는 국무부에 군정을 위한 지침을 조속히 마련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미국 국무부와 육군부·삼부조정위원회(SWNCC)·합동참모본부(JCS)는 8월 하순부터 10월 중순에 걸쳐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한국에 적용될 정치·경제적 방침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그 논의의 결론으로 맥아더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에게 전달된 것이<SWNCC 176/8,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내 민간행정에 관해 미육군 태평양지구 사령관에게 주는 초기 기본지령>(이하<기본지령>)이다. 이 문서는 남한의 점령통치와 民政에 관한 최초의 정책지침이었다. 이 문서는 1945년 10월 13일 삼부조정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승인하였고, 10월 17일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먼저<기본지령>은 ‘일본 항복 이후 신탁통치 수립 이전’에 한시적으로 한국의 민정에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국무부는 처음부터 점령이 신탁통치로 대체될 것임을 점령당국에게 전달하였다. 다음으로<기본지령>은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완전한 정치적·행정적 분리, 일본의 사회적·경제적·재정적 통제로부터 한국의 완전한 자유 획득을 민정의 주요 목표로 제시하였다. 또<기본지령>은 일본통치의 잔재와 비민주적 요소의 점진적 해소라는 단서를 달고 있으나, 위의 목표의 실현을 위해 기존의 행정기구와 실정법 등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였다.012)삼부조정위원회 십진분류 문서철,<SWNCC 176/8,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내 민간행정에 관해 미육군 태평양지구 사령관에게 주는 초기 기본지령>, 1946년 10월 13일(이하 이 문서철의 자료는 ‘SWNCC 분류번호, 문서제목, 작성일자’로 줄여서 표기).

 전체적으로<기본지령>은 해방 이전의 정책구상이 취하고 있는 해결방향, 즉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분리와 점진적인 독립획득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일본군의 항복 접수 이후 군정이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항과 임무를 제시하였다.<기본지령>은 구체제 해체,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한국사회의 민주화라는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초기 민정에 구체제의 기구·인적 자원의 부분적 활용을 제시한 약간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 문서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설치하기로 되어 있던 4대국으로 구성된 국제민간행정기구 대신에 미·소 양 군정을 통합하여 과도적 행정을 행하고, 이것을 ‘가능한 빠른 시기에’ 신탁통치 협정하의 中央行政機構(Central Administrative Authority)로 연결시킨다는 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013)<SWNCC 79/1, 한국민간행정기구의 구성과 구조>, 1945년 9월 27일 및<SWNCC 101/4, 삼부조정위원회 극동소위 보고서>와 첨부 “C”<한국의 국제신탁통치에 관한 미국의 정책>, 1945년 10월 24일.

 미국은 종전 이전 전후기획 단계에서 구상하였던 신탁통치하의 국제민간행정기구 구상을 수립절차를 약간 수정한 채 점령 이후의 상황변동에 맞추어 그대로 적용하려 하였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할 때 국제연합의 틀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삼부조정위원회는 신탁통치의 형태, 시행조건과 방법을 결정하면서 국제신탁통치 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헌장에 의거하여 한국을 비전략지역으로 분류하였다. 또 신탁통치 조건을 총회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함으로써 국제연합의 감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방식하에서는 한국인이 총회에 訴請을 제출할 수 있는 권한도 일정하게 인정되었다.014)<SWNCC 101/4, 삼부조정위원회 극동소위 보고서>와 첨부 “C”<한국의 국제신탁통치에 관한 미국의 정책>, 1945년 10월 24일. 한국을 비전략지역으로 상정함으로써 미국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은 비전략지역의 경우가 전략지역의 경우보다 미국의 주도권 관철이 용이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연합 헌장에 의하면 전략지역은 강대국이 비토권을 갖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비전략지역은 총회의 결정에 의존하였다. 미국은 미·영·중·소 4대국을 ‘국제연합 헌장 79조가 규정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로 간주하였고, 이들이 행정당국이 되어 신탁통치 협정을 성립시키고,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015)<SWNCC 101/4, 삼부조정위원회 극동소위 보고서>, 1945년 10월 24일.

 다음으로 점령 이후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행정을 담당할 기구를 4대국 국제기구에서 미·소 양군의 점령 통합으로 대치한 데에서 나타나듯이,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위에서 다음 행동방안을 모색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영향력 행사가 군사점령을 매개로 보다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현실적 상황을 이후 한국문제의 처리에 반영시킨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한 행정의 조직에서 현지 사령관은 그 권한을 소련과의 협정에 따라 전 한국에 확대할 수 있게 그 구조를 만들 것”을 지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남한에 수립된 군정하의 행정기구를 이북으로 확대함으로써 분할점령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즉 미국은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미국의 주도하에 미·소 양군의 점령을 중앙집중화하고, 미국이 남한에서 수립한 행정부를 토대로 중앙집권적 행정부를 마련하겠다는 공세적인 구상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엽적인 군사적 사안 외에 점령통치를 중앙집중화 하거나 정치·경제정책과 관련된 원칙적인 문제들을 미·소 양 점령군 사이에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미국정부도 이러한 현지의 사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016)740.00119 Control(Korea),<베닝호프가 국무장관에게>, 1945년 10월 1일.
<SWNCC 79/2, 보튼이 빈센트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5년 10월 18일.
이제 소련과 정부 차원의 구체적 협정이 현지의 군정당국이나 본국이 부딪힌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통과점이 되었고, 위의 접근방법은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담에 가져간 협정 초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017)United Government Printing Office,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1945, Vol. Ⅱ, 641∼643쪽(이하 FRUS로 줄임).

 국무부는 신탁통치를 위한 국제적 협정을 고집하면서 이를 공공연하게 내비치고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Carter Vincent)의 신탁통치 발언이 1945년 10월 언론에 흘러 나오자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국무부도 분할점령으로 야기된 점령통치상의 어려움과 이것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알고 있었고, 신탁통치안을 한국인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의 기본 틀을 유지한 채 이 기구에 최대한 한국인을 참여시킨다는 정도의 수정을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하였고, 신탁통치 협정을 조속히 마련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018)<SWNCC 101/1, 한국의 임시국제행정기구>, 1945년 9월 11일 및<SWNCC 101/4, 삼부조정위원회 극동소위 보고서>, 1945년 10월 24일.

 하지의 24군단은 매우 위압적인 자세로 38도선 이남지역의 점령에 임하였다.019)미육군 태평양방면군 사령관 명의의 포고문 1호와 2호에는 戰勝軍 사령관으로서 정복자적인 태도가 포고문 전반에 스며있었다. 포고문 전문은 FRUS 1945, Vol. Ⅵ, 1043∼1044쪽 참고. 한국의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처할 것이 진주 이전부터 강조되었지만020)군사실 문서철, 상자번호 41,<Annex “F” to Estimate of the Enemy Situation, Blacklist-Baker “Forty”>, 1945년 8월 15일. 하지가 부딪힌 남한의 혁명적 열기는 전술군 사령관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남한의 정세를 ‘불만 댕기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으로 묘사한 하지의 수선스러운 보고서는 과장이 아니었다.021)점령 직후 미군정의 한국 정치상황 보고서는 어느 것이나 한국의 혁명적 열기, 특히 좌익세력의 활성화와 조직적 활동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군사실 문서철, 상자번호 65,<하지와 베닝호프의 전문들>, 1945년 9월 12·15·18일). 물론 군정의 실시에 따른 초기적 혼란과 행정적·실무적 문제들이 하지를 괴롭혔지만, 이러한 점들은 요원을 보강하고 지역상황에 익숙해지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오히려 하지가 당면한 중요한 문제점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태평양의 섬들에서 전투에 몰두하였던 야전군 사령관 하지가 군정의 수립, 과도적 행정 이후의 한국의 장래에 관한 미국의 구상과 계획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국내의 폭발적인 정치적 열기에 대처하는 문제였다.

 전자에 대해 하지와 상급자 맥아더가 받은 초기의 지침은 “초기의 두 지역 점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4대국에 의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로 대치되어야 하고, 이어서 같은 4대국에 의해 국제신탁통치로 대치되어야 한다. 전국에 걸친 정상적 정치·경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소련군사령부와 연락 여하에 달렸다”는 일반적 방침에 대한 확인뿐이었다.022)<OPD/ 2971, Memo for Record:International Agreements as to Occupation of Korea(SWNCC 176)>, 1945년 8월 24일(신복룡 편,≪한국분단사자료집≫Ⅳ, 원주문화사, 1991, 80∼82쪽). 맥아더사령부와 육군부는 군사적 점령과 일본군 항복 접수 이후 남한의 정치·경제 문제들에 관한 방침을 조속히 하달해줄 것을 거듭 국무부측에 재촉하였다. 특히 점령군 당국은 인위적인 38도선 분할점령의 불합리성에 대해 점령 직후부터 우려를 나타냈다.023)<SWNCC 176/1 첨부 비망록, 육군부 차관 맥클로이가 삼부조정위원회 의장에게>, 1945년 8월 24일.

 후자의 문제, 즉 한국 내의 정치적 열기와 한국인의 ‘조급한 독립요구’에 대처하는 문제는 더욱 화급했다. 진주 직후에 미군정이 접한 한국인의 반응은 미국에게는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소련에 대한 보루의 구축을 점령목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하지는 잘 조직된 급진세력의 존재와 그에 비해 조직도 인기도 없는 보수세력 사이의 역관계를 점령목적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024)<사관기장>, 1946년 3월 8일(鄭容郁 編,≪解放直後 政治·社會史 資料集≫1, 1994, 196쪽).

 미군이 진주하여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정부의 형태를 가진 국내의 ‘朝鮮人民共和國(이하 인공)’, 해외의 ‘大韓民國臨時政府(이하 임정)’의 처리였다. 미국은 해방 이전부터 임정의 정부자격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진주 이후 미군정이 부딪힌 인공은 그 실체를 간단히 부정해 버릴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의 활동력이나 지방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의 광범한 존재, 일본 항복 후에 중앙이나 지방에서 보여주었던 자치의 경험 등은 이들의 실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였다.025)미군정의 한 관리는 미군의 물리력이 없었더라면 인민공화국세력은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History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2, 17쪽, 이하 HUSAFIK).

 수립과정의 졸속성이나 조직의 성격·위상 문제 등을 별도로 한다면 인공은 해방 직후의 시점에서 임정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치조직의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임정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정부승인 외교를 적극 펼쳤던 것과 비슷하게 해방 직후 국내의 첫 움직임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매개로 한 완전독립의 성취라는 방향이었다. 미국은 국제민간행정기구를 통해 독립 이전의 과도기에 대처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앞질러 매우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인 정부수립과 국가건설에 착수하였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미군정 이외 일체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외에 천명함으로써 일단 인공과 임정 모두를 부인하였다.026)미군정은 10월 10일과 12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인민공화국 부인성명을 발표하였다. 또 임정 요인들에게는 귀국 이전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HUSAFIK 2, 35∼37쪽).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정부자격 부인이 인공과 임정에 각각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인공의 부인은 지방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동반한 조직 및 활동 전반에 대한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부인이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인공·각지의 인민위원회 등 자생적 조직들을 모두 좌익세력의 소비에트화 기도로 간주하였다. 점령 이후 각지에 전술군을 파견하여 직접통치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이들을 해체하고 대신 이전의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와 친일관리, 경찰을 부활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점령초기 미군정은 반소·반공체제의 구축이라는 목표하에 점령통치기구를 수립하였다.027)점령초기 미군정 통치기구 수립과정의 구체상에 대해서는 朴璨杓,≪韓國의 國家形成:反共體制 樹立과 自由民主主義의 제도화-1945년∼1948년≫(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5), 3장 참고.

 한편 미군정은 임정의 정부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임정의 대중적 명성과 임정 요인들을 이용하여 국내정치에 대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는 진주한 지 1주일 만인 9월 15일, 맥아더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重慶 망명정부를 환국시켜 간판으로 활용’하게 해줄 것을 건의하였다.028)미국무부 편·김국태 역,≪해방3년과 미국 I≫(1984), 59∼60쪽.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再送하였다.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는 하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국무부에 교섭하였고, 9월 하순 미군정·맥아더사령부와 국무부 사이에 임정의 귀국과 활용 문제를 둘러싼 교섭이 계속되었다.029)<작전국 기록:미국과 중국으로부터 한인 귀환건>, 1945년 10월 13일(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23, 1993, 330쪽).

 하지와 맥아더의 건의를 받자 국무부는 개인별 송환을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있으나, 임정을 승인하거나 하나의 단체로 송환해서는 안된다는 회답을 보내왔다.030)740.00119 Control(Korea),<미육군 태평양사령부에서 주한미군사령부에>, 1945년 10월 1일. 이 전문에서 맥아더는 미주에는 임정과 협조하기를 원하는 약 50인 가량의 보수적 인사들이 있으며, 중경에도 그 정도의 숫자가 있으니 필요하면 이들을 개인자격으로 보내겠다며 논평을 부탁하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상부에 재차 李承晩·金九·金奎植의 조속한 개인자격 입국을 권고하였으며, 이들이 현재의 顧問會議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031)<작전국 기록:미국과 중국으로부터 한인 귀환건>, 1945년 10월 13일(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330쪽). 미군정 고문회의는 9명의 ‘저명한 보수주의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金性洙·金用茂·金東元·宋鎭禹·李容卨·姜柄順·吳泳秀·尹基益·全用淳으로 모두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다. 애초에 미군정은 11명을 임명하였는데, 曺晩植은 북한에 있어 참석할 수 없었고, 呂運亨은 고문회의가 우익에 편중되었다는 점을 들어 임명을 거부하였다(HUSAFIK 2, 8쪽). 육군부도 현지의 의견에 동의하였고, 이것은 해방 이전에 군부가 한국의 전후처리를 위해 소련과 사전협정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점령 이후 군부는 현지의 견해에 따라 정책적 태도를 결정하고 있었다.032)<육군부 차관 맥클로이가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1945년 11월 13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140∼142쪽). 이 서한에서 맥클로이는 하지의 이승만·김구 활용 구상을 반대하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를 논박하며 하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국무부는 10월 16일 군정에 필요한 한국인들의 개인자격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언론에 발표하였다.033)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 극동국에서 주중 미국대사에게>, 1945년 10월 16일.

 국무부는 임정의 정부자격을 승인해서는 안된다는 종래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임정 요인의 개인자격 귀국에 동의함으로써 사실상 임정활용에 대한 미군정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또 미군정은 임정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으나, 이러한 설명이 한국인들 사이에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미군정은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임정을 ‘정부’로서 대접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034)김구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11월 26일의 기자회견장에서 하지는 그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하였으며, 그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自由新聞≫, 1945년 11월 27일). 임정을 ‘간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계속 추진하였다. 즉 미군정의 임정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인 것으로서 임정의 정부자격과 법통성을 부인하는 한편으로 임정의 ‘독립운동의 화신’으로서의 명성을 남한의 정치적 대표자라는 대중적 이미지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미군정의 임정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인공을 타도하고 남한의 혁명적 정세에 대응하려는 미봉적 조치만은 아니었고, 미군정 나름의 뚜렷한 점령정책 구상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미군정은 10월에 들어 임정 요인들의 개별적 활용 또는 간판 활용에서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구상하였다. 그것은 맥아더사령부와 미군정이 간헐적으로 제기하였던 남한의 정계통합을 통한 ‘자문기구’와 ‘과도정부’ 수립 계획이다. 맥아더의 정치고문 앳치슨(George Jr. Atcheson)은 10월 15일 ‘장차 집행부 내지 행정부적인 정권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직’으로 全韓國人民執行委員會(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를 구성할 것을 국무장관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에는 현재 하지 장군의 고문회의가 고문으로 참여하거나 적당한 시기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이고, 초기단계에서는 이승만·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035)<재일본 정치고문 대리 앳치슨이 국무장관에게>, 1945년 10월 15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104쪽). 그는 공산주의세력의 활동에 비추어 보건대 한국인들에게 정부기구에 참여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미군정과 맥아더사령부는 민족혁명적 세력과 공산주의적 세력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은 채, 이들 모두를 ‘빨갱이(commie)’로 파악하고, 조기에 대결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앳치슨의 구상은 이후 하지와 그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하지는 앳치슨의 구상을 받아 과도행정부의 수립 경로를 보다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는 상부에 보내는 11월 5일자 전문에서 “고문회의를 확대하여 統合顧問會議(Coalition Advisory Council) 구성→군정 감독하에 고문회의 주도로 과도적인 한국행정부(AIB Korean Administration) 설치→총선거로 국민정부(Popular Government)를 수립”하는 경로를 제시하였다.036)<CA 54311, 더글라스 맥아더 육군대장이 참모총장에게>, 1945년 11월 5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위의 책, 127쪽). 하지의 전문은 미군정 나름대로 이후 한국에서 수립될 정부의 발전방향과 발전단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새로 수립될 과도행정부의 원형은 기존 고문회의의 확대판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그 기구의 정치적 성격을 암시하였다.

 미군정의 과도정부 형태에 대한 구상은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의 政務委員會(Governing Commission) 구상에 와서 한층 구체화되었다. 랭던은 “①군정 내에 김구를 중심으로 하여 회의체(Council)를 구성하고, 이 회의체가 정무위원회를 조직, ②정무위원회와 군정을 통합하고, 군정을 한국인 조직으로 대체, ③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로 군정을 계승, ④정무위원회는 국가수반을 선거로 선출하고, 국가수반은 정부를 구성”한다는 발전경로를 제시하였다.037)<재한국 정치고문대리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5년 11월 20일(미국무부 편, 김국태 역, 위의 책, 151∼152쪽).

 앞에서 지적한 하지의 전문이 미군정이 구상한 과도정부 형태의 논리적 발전경로를 제시하였다면,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은 한국의 내부 정세에 맞추어 정부수립의 경로와 방법을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랭던 구상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국무부의 신탁통치안과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을 내용적으로 대체하였다는 점이다.

 랭던은 정무위원회 구상을 건의하는 전문의 첫머리에서 공개적으로 신탁통치의 기각을 주장하였다. 또 랭던은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정무위원회 구상을 작성하였다. 오히려 랭던은 자신의 정무위원회 구상이 신탁통치안과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의 원안 노릇을 하였던<SWNCC 79/1>과<SWNCC 101/4>를 관련 근거로 하여 작성되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것임을 전문에서 밝혔다.

 다음으로 정무위원회 구상은 남한의 정계통합을 그 실현의 전제로 하였다. 미군정은 이 무렵 한국인의 정치적 통합 필요성을 거듭하여 공개적으로 표명하였고, 특히 임정의 귀국이 다가오자 정치적 통합의 중심으로서 임정의 역할을 암시하였다.038)빈센트의 신탁통치 발언에 대한 아놀드의 10월 30일 논평(≪每日新聞≫, 1945년 10월 31일) 및 하지가 맥아더에게 보낸 11월 5일자 전문<CA 54311, 맥아더가 합참의장 마샬에게 재송>(FRUS 1945, Vol. Ⅵ) 참고. 랭던이 정무위원회 구상을 상부에 전송한 시점은 김구가 귀국하기 사흘 전의 시점이었지만, 랭던은 김구로 하여금 정무위원회의 모태가 될 정치단체의 대표체를 조직케 할 것을 예상하였다. 랭던의 이러한 발상은 그 이전의 고문회의 설치, 미군정의 이승만·임정 활용 의도의 연장선상에서 미군정이 우익 중심의 남한 정계통합을 정부수립의 전제조건으로 인식하였고, 그 방향에서의 미군정 활동을 승인받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랭던 구상은 군정의 발전방향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해야 한다. 랭던은 미국인의 감독과 거부권을 전제로 군정을 한국인으로 점차 대체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 제안 역시 미군정이 진주 이후 우파 중심으로 통치기구의 충원을 꾀했던 조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앞으로 이 방향에서 계속 군정에 한국인을 충원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군정은 이후 이러한 조치를 군정의 ‘한국인화(Koreanization)’로 불렀다.

 마지막으로 랭던 구상은 소련과의 관계에서 공세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정무위원회 구상은 “국가수반을 선출하기 이전에 소련측과 양군 철수 및 정무위원회 권한의 북한으로의 확장에 관한 협정을 맺고, 회의체가 소련군 지역 내 인사를 정무위원회에 임명할 수 있게 위의 계획을 사전에 소련측에 통지할 것, 만약 소련측의 참여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38도선 이남만이라도 이 계획이 실행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련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은 미군정의 선제적·일방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미군정은 소련의 협조를 구하지 못할 경우 남한만이라도 이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랭던 구상이 정무위원회 권한의 북한으로의 확장을 통해 분할점령 상태를 해소하려 하였다는 점은<SWNCC 79/1>과<SWNCC 101/4>가 상정한 ‘양군 점령의 통합’이나 ‘통일행정기구’ 설치 방침과도 맥이 닿아 있었다. 다만 그 통합의 주체에서 국무부 案이 미군정을 염두에 두었다면 랭던 안은 정무위원회가 군정을 대신하였다. 미군정은 38선의 철폐와 남북의 행정적·경제적 통합을 위한 소련과의 사전협상을 상부에 여러 차례 제기하였다.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한국문제에 관해 사전에 2가지를 제안하였다. 그 하나는 신탁통치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북한 통일행정의 수립문제였다. 미군정은 미·소공위 개최 이전에 열린 미·소 양군 대표자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였고, 또 미·소공위 본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초기 입장으로 제시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정무위원회 구상의 핵심은 이후 정부를 장악할 정치적 대표집단, 즉 한국인 권력집단을 미리 구성하고 이를 육성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치적 대표집단에게 미군정의 정치적·행정적 권한을 일정하게 제공하자는 것이다. 미군정은 정치적 대표집단의 구성에서 가급적 광범한 세력의 참여를 희망하였으나, 여기에는 우익 보수세력의 주도권, 남한의 비례적 우세가 전제되었다.

 동경과 서울에서 구상한 ‘적극적인 조치’는 독립 이전의 단계에서 군정의 지탱점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군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한국인 ‘과도정부’의 설치로 모아지고 있었고, 정무위원회 구상은 그것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 주었다. 정무위원회 구상은 국무부가 제시하였던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을 부분적으로 참조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것과 전혀 다른 미군정 나름의 과도정부 형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구상에는 미군정이 점령 이후 취한 일련의 조치와 활동들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고, 또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의 국내정치에 대한 대처방향을 제시하였다.

 국무부는 미군정측의 과도정부형태 구상이 계속 발전하자 이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039)<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육군부의 비트럽 대령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5년 11월 7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129∼130쪽);<육군부 차관 맥클로이가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1945년 11월 13일(같은 책, 140∼142쪽);<극동국장 빈센트가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5년 11월 16일(같은 책, 146쪽). 대체로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 랭던을 포함한 현지의 관리들과 맥클로이가 하지를 지지하였고, 국무부 관리 빈센트·보튼은 미군정측 구상에 반대하였다. 국무부가 미군정측 구상에 반대하였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안이 신탁통치하의 국제민간행정기구 설치라는 국무부 안에 어긋나고, 국무부가 유지해 온 국제적 해결방식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군정측 제안은 소련과의 사전협상을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인 정치세력을 조기에 투입할 경우 정부수립 문제에서 한국인들의 주도성을 일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둘째, 미군정이 정무위원회의 핵심세력으로 상정한 임정인사들의 효용성에 대한 평가이다. 해방 이전부터 국무부는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 요인들의 국민적 대표성과 정치적 역량을 불신하였다. 게다가 국무부는 이전부터 임정의 정부자격을 부인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국무부는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면 다른 정치세력들이 반발하여 정치불안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이전에 유지하였던 공식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군정측 구상을 공개적으로 추진한다면 현실적으로 내외 여론의 비판과 소련의 반대를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10월과 11월에 맥아더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가 고안한 일련의 정부수립 구상은 국무부에 의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양자의 교섭과정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먼저 지적할 것은 맥아더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현지의 반소·반공 분위기의 조기 결집이다. 맥아더사령부는 미군정 전시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점령 직후의 정책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 초기 한반도 내부 정세에 대한 정보수집, 군정요원 및 군정에 필요한 미국인 고문과 한국인 정치가들의 차출과 충원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 하지와 마찬가지로 맥아더사령부도 해방 직후 자신의 역할을 장차 미·소대립에 대한 대비책의 마련에 두었고, 이 방향에서 해당지역의 정세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맥아더와 그의 측근들은 대체로 미국 내에서 전통적인 아시아 중시주의자들로 분류되었고, 또 격렬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점령초기에 맥아더사령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세력들은 기존의 정책목표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독자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 노선의 수정과 새로운 접근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과 인적 결합을 가지고 있었다.040)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군부, 정보계통, 전통적으로 아시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자본가집단 및 선교사집단의 동향이나 이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정가에서 이들의 움직임이 중요해지는 것은 중국정세가 격화하고 ‘차이나로비’가 강화되는 1949년 이후이고, 맥카시즘이 풍미하는 1950년대에 들어 절정에 달했으나 그 이전부터 이들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였다. 또 이승만의 미국인 지지자들은 대체로 이들과 중복되었다.

 다음으로 미군정 구상의 현실적 출발점이 자신이 실행하고 있던 우익 중심의 정계개편 노력, 조직적인 우익 육성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시기에 따라 고문회의·임정·이승만에 대한 강조의 차이가 조금씩 보이지만, 미군정 구상이 이들 한민당·임정·이승만세력의 통합을 자신의 정부구상 실현의 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미군정은 정무위원회 구상에 보이듯이 임정 귀국 후에는 이승만보다 김구에 기대감을 표명하였으나, 이 시기 미군정의 구상은 양자의 통합 내지 이승만과 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매개로 한 정계통합에 주된 목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군정의 구상은 소련의 반응 또는 소련과의 협상을 예상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무부의 신탁통치 구상을 부인하였고, 그런 측면에서 도발적이었다. 국무부는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을 반대한다는 것과 한반도 신탁통치가 미국의 공식 정책임을 미군정에게 환기시켰다.041)<국무장관이 재한국 정치고문대리 랭던에게>, 1945년 11월 29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159∼160쪽). 그러나 미군정은 이후에도 자신의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모스크바 3상회담이 열리기 전후에는 집중적으로 반탁의사를 상부에 타전하였다.042)<재한국 정치고문대리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5년 12월 11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위의 책, 164∼165쪽);<재한국 정치고문대리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5년 12월 14일(같은 책, 166∼168쪽);<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에>, 1945년 12월 16일(같은 책, 169∼172쪽);740.00119 Control(Korea),<육군장관 패터슨이 국무장관 대리 애치슨에게>, 1945년 12월 19일. 이러한 반탁입장은 모스크바협정 타결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미군정이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을 끝내 불신했던 이유로 미군정의 조숙한 반공주의와 국무부의 국제주의적·자유주의적 성향의 차이, 또는 양자의 對蘇 대응전술의 차이가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미군정이 신탁통치안으로는 남한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 있었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건설 열망을 무한정 부인할 수는 없었고,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적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독립정부에 대한 열망을 일정하게 만족시켜 주어야 했으며, 동시에 미국 대한정책의 지지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했다. 미군정은 자신의 주도하에 한국인 ‘자문기구’ 내지 ‘과도정부’를 만들고, 이것을 우익세력 육성과 결합시킴으로써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갔다.

 미국이 공식적인 대한정책으로 가다듬어 온 신탁통치 구상은 적용 첫 단계부터 한국인들의 반발과 현지 집행자들의 재고 요청을 받았다. 이제 신탁통치안이든 정무위원회 구상이든 구체적 정책은 미·소간 교섭과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점령초기 대한정책의 적용과정에서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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