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2. 해방 이후 미·소의 점령정책
  • 2)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

2)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처리와 관련하여<한국의 통일행정(Unified Administration for Korea)>이라는 특별비망록을 사전에 소련측에 전달하였다. 미국이 제안한 비망록의 주요 내용은 ①교통·통신·체신·교역·산업 등 일체의 현안을 취급할 남북간 통일행정부의 조속한 수립, ②한국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 등 2가지였다. 신탁통치안의 주요내용은 ①4개국이 행정·입법·사법 기능을 수행하여 한국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 그것은 5년간 연장할 수 있다, ②신탁통치하에서 행정을 담당할 국제민간행정기구로 1명의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과 4대국을 대표하는 4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執行委員會(Executive Council)를 구성한다는 것이다.043)FRUS 1945, Vol. Ⅱ, 641∼643쪽. 최상룡은 집행위원회에서 소련에 비해 미국이 3 대 1의 우위를 보장받을 수 있고, 고등판무관이 미국인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는 점에서 이 제안이 ‘미국 우위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최상룡,≪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 나남, 1988, 175쪽).

 미국측은 미군정의 반탁 입장을 숙지하고 있었으나, 회담대표들이 미국측 제안으로 제출한 비망록은 국무부가 구상하였던 신탁통치안과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044)국무부는 소련과의 한국 신탁통치안 협정이 일련의 신탁통치 협정 중 첫번째인 만큼 다른 협정들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가급적 자세한 서류를 작성하였다(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 극동국 내부비망록>, 1945년 11월 14일). 국무부가 미군정측의 과도정부형태 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신탁통치안을 다른 지역에 광범하게 적용하려던 국무부측의 의도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에 앞선 행정부의 통합은 미국이 이전부터 구상하였던 것이었지만, 동시에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 개막 이전에 인위적인 38선 분할을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 조치들을 모스크바회의에서 마련하여 줄 것을 강조해 옴에 따라 이를 수렴한 것이었다.045)<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에>, 1945년 12월 16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169∼172쪽). 그러나 소련은 신탁통치에 선행하는 통일행정부의 설치를 거부하였고, 미국의 제안을 검토한 뒤 포괄적인 역제안을 제출하였다.046)NARA, RG 59, 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Lot 60-D-330:Records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Briefing Books), 1943∼1954, Research Project 62. 국무부 정책역사조사국 작성, Handbook of Far Eastern Conference Discussions(1949. 11), H-13∼15.

 소련은 ‘先 정부수립, 後 신탁통치’를 대안으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신탁통치기간은 최소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해방 이전만 해도 계속되는 미국의 신탁통치안 주장에 대해 소련은 마지못해 동의하는 태도를 취하며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 소련은 이제 먼저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미국측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은 비정치적·행정실무적 문제를 우선시키고, 국제적인 해결방식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과 우세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반면 소련은 해방 이후 한국 내의 정세나 좌·우세력관계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보다 본질적인 정부수립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미·소간 정부수립 방안의 차이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양국의 접근방법의 차이를 보여줌과 아울러 해방 이후 한반도 내부에 조성된 정치정세를 반영하였다. 미국은 점령 이후 군정을 설치하여 직접 남한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후 신탁통치하에서 집행위원회라는 국제행정기구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인들을 행정요원으로 참여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반면 소련군은 북한점령 이후 인민위원회에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曺晩植과 金日成의 합작을 성사시키는 등 자신의 조정과 비호하에 일찌감치 정부수립을 위한 토대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한에서도 좌익세력이 우익에 비하여 조직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타결된 ‘한국047)이 글에서 ‘한국’은 남·북한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용례로는 ‘한국’ 보다는 ‘조선’이라는 용어가 보다 널리 사용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당시의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한국’으로 통일하였다. 양자 모두 영어로는 ‘Korea’로 표기되었고,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에 관한 결정’은 소련측 제안을 원안으로 하고, 여기에 사소한 내용·표현상의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12월 28일 발표된 최종 결정문안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기간에 걸친 일본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신속히 청산할 조건들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창설한다. 임시정부는 조선의 산업·운수·농촌경제 및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②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응한 방책들을 예비 작성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군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대표로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들, 사회단체들과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③ 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민주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또는 조선국가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하는 방책들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소·영·중 각국 정부의 공동심의를 받아야 한다.

④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미군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사령부간의 행정·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방안을 작성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 서기국 편,<蘇米共同委員會에 關한 諸般資料集>, ≪韓國現代史資料叢書≫13, 돌베개, 1947, 37쪽의 원문을 현대어법에 맞추어 부분적으로 수정 인용).

 위의 모스크바 3상결정이 규정한 ‘朝鮮民主主義臨時政府’ 수립방안은 미국의 원래 구상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국제적 처리방식 일변도의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이 정당·사회단체를 통해 한국인들의 의지와 요구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선 임시정부’ 수립안으로 변경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은 철회되었다.

 또 미·소 양측 점령군 사령부 대표들로 이루어진 미·소공동위원회가 한국문제 해결의 매개기구가 됨으로써, 미국과 소련이 한국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부각되었다. 위 결정은 비록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상정하였지만, 한국의 장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소련이라는 것을 과시하였다. 이것은 모스크바결정이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이라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측 제안이나 위의 결정문 모두 신탁통치를 상정하였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달랐다. 미국측 제안은 정부수립 이전 국제행정기구 관리하의 신탁통치를 의미하였지만, 모스크바결정의 신탁통치안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4대국의 협정에 의해 실시되는 것이었다.048)최상룡, 앞의 책, 177쪽. 즉 임시정부의 수립을 전제로 한 신탁통치의 실시는 신탁통치의 성격이나 통치권의 행사라는 측면에서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자신의 제안을 포기하고, 내용상 현격한 차이가 있는 소련측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로는 우선 한국 내 정세가 미국으로 하여금 소련측 제안을 거부할 명분이 없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군정은 본국에 한국인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거듭 환기시켰고, 국무차관 애치슨(Dean G. Acheson)은 미군정의 위와 같은 요청을 모스크바에 가 있던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에게 전하면서 신탁통치는 국제연합 기구의 후원을 받는 것이고, 행정부에 관한 잠정협정임을 강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049)740.00119 Control(Korea),<애치슨이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전문>, 1945년 12월 20일. 미국측 스스로 자신들의 제안을 원안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으로 미국은 모스크바협정의 운용 여하에 따라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050)최상룡, 앞의 책, 180쪽. 모스크바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과제로 제시하였지만,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일종의 절충의 결과였다. 모스크바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가 협의하여 임시정부 수립 권고안 제출→4대국 심의→임시정부 수립→임시정부는 미·소공동위원회 밑에서 구체적인 신탁통치 협정의 작성에 참가→4대국의 신탁통치 협정 공동심의’라는 복잡한 절차를 예상하였다. 여기서 임시정부 수립안이나 신탁통치 협정 모두 4대국이 심의하기로 되어 있고, 임시정부 수립은 특히 美·蘇共同委員會(이하 ‘미·소공위’)의 활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다단계 수립절차를 통해 미국측 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모스크바 3상결정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에 독립을 부여한다는 1943년 카이로선언 이래 한국 독립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애매모호한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또 모스크바결정은 임시적 성격이긴 하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주권문제 해결의 경로를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하려는 근대 이래 한국 민족운동사상의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안이 5년간의 신탁통치(또는 후견)를 예상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역량의 전면적 개화를 통한 자주적인 정부수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안은 일정한 제한성을 가진 것이기도 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한국에 관한 결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미·소 양 점령군 대표로 미·소공위가 구성되고, 여기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구체적 절차와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모스크바결정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에게 독립에 관한 국제적 규정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이제 한국 내 각 정치세력들에게는 미·소공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완전독립의 실현과 통일정부 수립에서 주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한편 모스크바결정은 미·소공위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은 미·소 양국에게 한반도에서 자기측의 구상과 정책을 관철할 수 있는 지지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현실적인 과제로 제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미·소공위는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내정치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말 모스크바결정의 한국관련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국내에서는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시기 우익진영 일반, 그 중에서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은 반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대대적인 선전작업을 통해 반탁운동을 확산한 것은 韓國民主黨(이하 ‘한민당’)의 기관지로 일컬어지던≪동아일보≫였다. 우익은 신문을 앞세워 신탁통치 주창자는 소련이며, 모스크바결정을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는 소련의 앞잡이이자 매국노이고, 반탁운동은 즉시 독립을 위한 애국운동이라는 등식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고,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몰아갔다.051)윤해동,<반탁운동은 분단·단정노선이다>(≪역사비평≫, 겨울호, 1989), 170∼180쪽.
찬·반탁운동의 경과와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고할 것.
이수인,<모스크바 삼상협정 찬반운동의 역사적 성격>(≪한국현대정치사≫1, 실천문학사, 1989).
오연호,<미군정의 분열조작 ‘신탁통치파동’>(≪말≫3월호, 1989).

 모스크바 3상회담의 한국관련 내용을 국내에 최초로 보도한 것은≪동아일보≫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이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정오이니 이 기사는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서가 발표되기 만 하루전, 주한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발표되었다. “소련은 信託統治 주장, 미국은 卽時獨立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分割占領”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는 모스크바 3상회담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며칠간 모스크바 3상회담과 그 결정 내용에 대한 국내신문의 보도 태도와 보도 방향을 결정하였다.

 한민당은 반탁의 깃발 뒤에서 친일파라는 비난을 피하였고, 자신들의 정치적 복권을 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면에선 가장 큰 수혜자였다. “흥미있는 것은 반탁소동으로 빨갱이와 백파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양쪽이 다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052)<사관기장>, 1946년 1월 2일(鄭容郁 편, 앞의 책, 174쪽).는 하지의 지적처럼 우익은 반탁운동으로 좌익과의 세력 불균형을 일시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의 지적이 암시하듯이 이러한 사태는 미군정으로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이전부터 본국에 신탁통치가 국내 정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며 신탁통치라는 용어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할 것과 나아가 신탁통치 구상 자체의 변경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의 시도는 모스크바 3상회담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신탁통치 자체의 수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태의 전개를 주시하고 있던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회담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미국측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가져 올 정치적 곤경을 예상하고, 미국에 쏟아질 비난의 방향을 소련측으로 돌리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053)하지는 이후 타스통신이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자, 국무부를 향해 제때에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에>, 1946년 2월 2일, 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앞의 책, 215∼216쪽). 그러나 국무부는 모스크바 3상회담에 참석한 미국측 대표단에게 하지의 요청을 그때그때 전달했으며, 하지는 모스크바 3상회담에 임하는 미국측 입장을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다며 하지의 불평에 대해 오히려 불쾌감을 표시하였다(<국무장관이 육군장관 패터슨에게>, 1946년 4월 1일, 같은 책, 247∼248쪽). 정작 하지가 놀란 것은 모스크바결정이 미국측 원안과 다른 방향으로 타결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미군정은 반탁운동이 격화되자 반탁운동에 따른 국내 정세의 격화에 대해 상부에 우려를 전달하였다.054)<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에>, 1946년 1월 23일(미국무부 편·김국태 역, 위의 책, 198∼199쪽). 그러나 미군정은 국무부에 모스크바결정의 正文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지≪동아일보≫왜곡보도의 진위를 확인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 왜곡보도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미군정은 이 무렵 한국에 신탁통치를 강요하고자 한 것은 소련이며 따라서 소련이 이에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한국인들 사이에 조장시키려 노력하였고, 국무부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였다.055)C. Leonard Hoag, 신복룡·김덕원 역,≪한국분단보고서≫상(풀빛, 1992), 266·268∼272쪽.

 미군정은 모스크바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야기된 반탁선전과 반탁운동을 방조함으로써 그것이 남한정치에 미치는 효과를 십분 활용하였다. 즉 우익의 반탁운동이 반소여론을 조성하고, 남한에서 우익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한 미군정측에 결코 해로울 것이 없었다. 이는 적절히 이용한다면 미래의 회담에서 미국측 입장을 강화해줄 수 있었다. 반탁운동을 거치며 남한에서는 반탁=반소, 친소=찬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으며, 좌·우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말, 1946년 초의 반탁운동을 계기로 국내에서 찬·반탁 대립구도를 좌·우 대립구도와 결합시킬 수 있었다.056)1945년 말, 1946년 초의 반탁운동은 해방 직후의 정치적 대립구도가 반공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한 이념적 대립구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 金星淑은 반탁운동을 거치면서 좌우대립은 골육상쟁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모리 요시노부는 모스크바결정 발표 이후의 반탁운동이 한국에서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한다. 즉 일제 식민지시대만 해도 공산주의는 단지 천황제파시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대항이데올로기로서 한국민족운동의 한 조류로 인식되었을 뿐이지만 이 시기의 반탁운동을 거치면서 좌우 대립구도가 국내정치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 좌우 이념대립은 그 자체 아무런 내용성이나, 역사적·철학적 기준 없이 소련 내지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되었고, 또 미·소간의 국제적 대결구도가 조기에 국내에서 재생산되었다(모리 요시노부,<한국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한국과 국제정치≫5-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89). 그러나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무한정 허용하였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반탁운동이 군정에 대한 반대운동, 또는 좌·우 어느 정치세력이든 한국인들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독자적인 정부수립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은 반탁운동을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정부수립운동으로 연결시켰다. 모스크바결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임정의 주도로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9개조 ‘행동강령’에는 ‘임정의 절대수호’와 ‘외국군정 철폐’ 요구가 들어있었으며, 임정은 ‘國字 1·2’호 포고를 발표하여 정권 접수를 선언하였다.057)≪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 이러한 시도에 적잖이 당황한 미군정은 임정의 기도를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단호한 태도로 저지하였다.

 하지는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만나 임정의 기도를 저지시켰다. 하지는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김구를 겨우 진정시켜, 반탁시위가 군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해 행해졌다”는 것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밝히도록 설득하였다.058)1946년 1월 1일 김구와 면담 자리에서 하지는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면담 직후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은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사관기장>, 1946년 1월 1일∼2일, 정용욱 편, 앞의 책, 174쪽). 이 일화에서 주목할 것은 하지가 김구를 위협하면서 강조한 내용이다. 하지는 반탁운동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반탁운동이 미군정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홍보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임정의 법통성과 정부로서의 위상을 한층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미군정은 이후 ‘임정의 해체와 새로운 정당으로의 재편’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059)정용욱,<미군정의 임정관계 보고서>(≪역사비평≫, 가을호, 1993), 364·375쪽.

 1946년 1월 24일 소련이 타스통신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경과와 탁치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미국은 심각한 정치적·도덕적 타격을 입었다.060)타스통신 전문은 FRUS 1946, Vol. Ⅷ, 201∼203쪽. 즉 반탁운동이 가지고 있던 반소여론의 조성, 우익측의 정치적 입지 강화라는 정치적 효과는 그 근거가 사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용은 크게 실추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 조항의 의미를 축소 해석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미·소공위 회담의 전 과정을 통해 미국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고집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국무부와 미군정은 신탁통치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었지만, 막상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이 타결되자 워싱턴 당국자들과 미군정 모두 신탁통치 조항의 의미를 축소하는 작업을 벌였다. 이러한 반응은 미국이 처한 입장과 앞으로 미국이 취할 태도를 시사하는 것이다. 미국은 모스크바결정의 실행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실행을 적극적으로 반대할 처지도 아니었다.

 워싱턴의 삼부조정위원회는 1월에 모스크바결정 제2항이 상정한 임시정부 수립계획을 마련하였다. 1946년 1월 28일 삼부조정위원회가 최종 승인한<SWNCC 176/18, 한국에 관한 정치적 방침>이 바로 그것이다.061)<SWNCC 176/18>의 결론은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2월 11일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최종승인되었던 1월 28일경, 이미 주한미군사령부는 스폴딩(Sidney P. Spalding) 장군을 통해 이 문서의 초안인<SWNCC 176/15>를 전달받았다.
<주한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국무장관 대리에게>, 1946년 1월 28일(FRUS, Vol. Ⅷ, 213∼214쪽).
이 문서는 미·소공위의 권한과 기능, 임시정부 수립계획의 마련과 관련해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단이 취할 입장과 대응책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였다.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은 미·소공위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 지침을 본국으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현지에서의 대표단 구성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권한에 속했고, 또 대표단은 하지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미·소공위를 위해 본국으로부터 보강된 인원은 데이어(Charles C. Thayer)가 유일하였다. 나머지 대표단원들은 모두 현지에서 충원되었다.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의 초대 수석대표는 아놀드(Archibald V. Arnold)였다.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이하 ‘대표단’)은 국무부 방침을 보다 구체화시켜 회담 개시 이전에<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을 마련하였다.062)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 일자미상. 작성자와 작성일자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미·소공위 개막일인 3월 20일 이전에 작성되었다. 작성자는 데이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원 가운데 가장 유능한 對蘇협상 전문가였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소련과 독일에서 8년간 국무부 소속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육군부와 OSS에 차출되어 1944년부터 유고와 루마니아 등에서 정치공작을 담당하였다. 유고에 있는 동안 그는 ‘미군부파견 독립사절’이란 직함으로 티토와 교섭을 담당하였다. 소련인들과 교섭 경험이 많은 소련전문가였다. 미·소공위에 대비하여 그를 한국에 파견하도록 추천한 사람은 駐蘇대사 해리만이었다. 해리만은 데이어의 공작수완과 대소 강경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1차 미·소공위는 거의 그가 막후에서 조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6년 6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미·소공위 때에도 미군정은 그를 원하였으나,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는 후에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 책임자(1948∼1949년)를 지냈다. 이 문서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대소전략의 관점에서 전 한국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파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은 조기에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설사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이 정부에는 제한된 권한만 부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즉각 독립은 親蘇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반면 임시정부 수립은 어떤 형태든 일정 기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력의 확보방안 마련이 대표단의 중심적 임무가 되었다.

 다음으로 국무부나 미군정 모두 신탁통치 내지는 그것에 준하는 위장된 통제책이 당분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본국의 지침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미·소공위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반탁감정을 의식하고, 조기에 회담이 난관에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고, 국무부가 실제로 신탁통치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전에 미군정이 반탁입장을 밝혀왔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미군정의 태도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①유엔의 국제적 보장, ②미국의 차관공여, ③한국의 외교와 국방을 제한하는 방법 등을 예상하였다. 이 지침은 현재 시점에서 ①은 불가능하므로 임시정부 구성에서 미국측 영향력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②, ③과 연결시키는 방안을 대안으로 상정하였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일찍부터 유엔의 개입을 신탁통치를 대신할 수 있는 보장장치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또 구체적인 협상에 임해서는 미·소공위의 ‘1차적이고 긴급한 정치적 임무’가 임시정부 수립이지만 남북의 민간행정기구 통합이 시간적·논리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선행하며, 협상에서 민간행정기구 통합 문제를 임시정부 수립 문제와 동일한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논의할 것을 결정하였다.063)<SWNCC 176/18, ‘결론 4-a-(3)’ 및 첨부물 B ‘토론사항 1’>.
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미·소공위의 목적>·<한국임시정부 구성조건에 관한 제안>.
이러한 협상방침은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소련에 의해 거부당했던 것이고, 모스크바결정 내용과도 어긋났지만 미국은 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협상 위치를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의 협의는 이들 단체와 직접 협의 대신 한국인 대표로 구성·설치될 별도의 협의기구를 이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 방침은 모스크바결정이 규정한 임시정부 수립방법과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 이 방침은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담 이전까지 견지하였던 국제민간행정기구 수립구상과도 다른 것이었다. 미국이 구상한 임시정부 수립방안의 특징은 이 ‘협의대표기구’의 구성과 설치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남한의 협의대표기구로서 南朝鮮代表民主議院(이하 ‘민주의원’)을 조직하였다.

 미국측 임시정부 수립방안의 핵심은 한국인 지도자들로 구성될 협의대표기구 문제였다.<SWNCC 176/18>은 협의대표기구의 구성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고, 대표단은 본국의 지침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절차를 작성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남조선대표민주의원 구성.

② 민주의원은 이에 상당하는 이북의 대표기구와 함께 자문기구의 기초를 이룰 한국의 대표적 민주주의 지도자들의 포괄적인 명부를 제출. 이에 입각해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라 통합자문기구(Korean Advisory Union)를 구성.

③ 통합자문기구는 임시국무회의(Council of State) 후보자 명부를 작성. 미·소공위는 이 명부를 검토, 승인 또는 적절히 수정한 뒤 한국임시정부안으로 미국과 소련정부에 제출.

④ 자유·민주·비밀선거에 의해 정부가 선출될 때까지 국무회의가 임시정부의 역할을 담당.

 (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과<한국임시정부 구성에 관한 제안>,<자문기구와 한국임시정부 구성에 관한 미국측 제안>).

 협의대표기구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방안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수립절차와 1945년 가을 이래 미군정측이 주장해 온 과도정부형태의 유사성이다. 위의 수립절차는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이 제시한 ‘정무위원회(남한 또는 남·북한의 정치적 대표기구)→과도정부(임시정부)→선거를 통한 정부 선출’이라는 경로와 사실상 다를 것이 없다. 또 정무위원회 구상이나 협의대표기구 설치구상이나 모두 그 구상의 중심은 최초의 정무위원회·협의대표기구의 구성문제였다.

 수립절차에서 눈에 띄는 다른 한 가지 특징은 남한측 협의대표기구인 민주의원의 주도적 역할을 예상하였다는 점이고, 이것 역시 정무위원회 구상과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은 인구와 행정구역을 더 많이 포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민주의원의 주도성을 관철시키려 하였고, 미국측 지지세력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본국의 지침에서도 만약 공동협의기구 구성에 실패하여 남과 북에 각각 협의대표기구를 만들 때에는 인구비례 또는 도별 숫자비례(남:7½ 대 북:5½)를 따를 것을 지시하였다.064)<SWNCC 176/18, 첨부물 B 토론사항 5·7>. 미국대표단은 민주의원의 대표성이 시비거리가 될 경우 협상이 가능하다는 태도였지만,065)“민주의원을 지지하는 목적의 하나는 우리들에게 충분한 협상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이지 최후통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소련측이 인민당(공산당)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 조만식과 교환조건으로 여운형(박헌영)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 5∼6쪽). 남한의 보다 온건한 세력들이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미국은 협의대표기구를 통해 “소련이 조종하는 소수파가 우세를 점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보장”받고자 하였다. 직접 협의방식이 조직과 활동력에서 우세한 좌익에게 유리한 방식이라면, 자문기구방식은 좌익에 비해 대중적·조직적 기초가 취약한 반면 명망있는 정치인들이 많았던 우익에게 유리한 방식이었다.

 위의 임시정부 수립절차는 임시정부가 법적으로 고정되는 절차로 선거를 상정하였으나, “선거가 반드시 즉각적인 완전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한국인들에게 납득시켜야 하고,” 이와 관련해 국제적 차관공여와 같은 위장된 통제책을 마련할 것을 구상하였다. 또 현재 남한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부를 모델로 일반적인 조직체계를 수립하며, 임시정부가 기능하기 이전에 38선을 철폐하여 한국의 행정·경제를 통합할 것을 예상하였다. 이렇게 수립된 임시정부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연합국 정부가 미·소공위의 권고를 승인하였을 때부터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임시헌법의 실행에 따르는 모든 행동 권한은 미·소공위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이때 정부의 몇몇 권한, 예컨대 외교와 국방문제 등은 당분간 미·소공위가 장악할 것을 예상하였다.

 위와 같은 절차와 방법을 좇아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면, 이는 비록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통치권이나 주권 행사가 제한된 행정기구에 가까운 것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미국측 임시정부 수립방안은 전체적으로 임시정부의 위상과 권한을 축소하고, 미·소공위 내지 다른 수단을 통해 당분간 한국의 내부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미국대표단이 구상한 임시정부의 위상과 성격을 고려할 때 미국측 임시정부 수립방안은 모스크바결정 이전의 원래 신탁통치안에 담긴 계획과 의도를 여전히 관철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임시정부 수립절차에서 협의대표기구를 임시정부 수립의 매개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미국은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이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이미 소련측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관철시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결정대로 정당·사회단체와 직접 협의를 통해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희박했다. 미국이 협의대표기구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려 한 것은 이러한 내외적 조건을 평가한 위에서 행해진 결정이었다. 이것은 국무부가 이전에 미군정이 주장하였던 과도정부형태 구상을 정부수립의 현실적 경로로 수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임시정부 수립의 절차와 방법에 논의를 집중하고, 정부각료 선출은 한국인들에게 맡긴다는 입장이었지만 소련은 모스크바결정이 수정 불가능한 최종결정이며, 미·소공위의 임무는 모스크바결정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토의를 임시정부 구성에 집중시킨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즉 미·소공위가 정당·사회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정부 각원을 직접 선발함으로써 바로 임시정부 구성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몰로토프(V. M. Molotov)는 미·소공위 개회 직전인 1946년 3월 16일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단에게 보낸<전한국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소미공동위원회 소련군사령부에 보내는 훈령>제1호에서 “①내각제의 한국임시정부 수립, ②내각은 남북에 균등하게 배분하되, 남한대표 중 절반은 좌익이 차지, ③신탁통치 후 내각제 정부수립과 단원제 국회를 구성할 것 등”을 미·소공위에 임하는 소련측 대표단 지침으로 하달하였다.066)김성보,<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 구상>(≪역사비평≫, 봄호, 1994) 및≪중앙일보≫, 1995년 2월 14일. 소련측은 회담 이전부터 임시정부 요원의 선출과 안배를 위해 고심하였다. 소련은 개별인물의 정치적 비중과 성향을 면밀히 따져 회담이 시작될 무렵에는 나름의 임시정부 내각명단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표>는 소련측이 준비한 내각명단이다.

각료직위 성 명 현 직 책
수   상 呂 運 亨 조선인민당 당수(南)
부 수 상 朴 憲 永
金 奎 植
조선공산당 당수(南)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민주의원 부의장(南)
외 무 상 許   憲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 위원장(南)
내 무 상¹ 崔 庸 健
(金 日 成)
민주당 지도자, 북조선임시인위 보안국장
공 업 상 金 武 亭 북조선 공산당 조직국 간부부장, 북조선임시인위 위원
교 육 상 金 枓 捧 신민당 지도자, 북조선임시인위 부위원장
선 전 상 吳 淇 燮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노 동 상 洪 南 杓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민전 중앙위 부의장(南)
계획경제위원장 崔 昌 益 신민당 부위원장, 농림국 차장
농 림 상 미국 추천 副相 2인[미국측 1·소련측 1(명재억)]
재 정 상 부상 2인[미국측 1·소련측 1(朴文圭)]
교 통 상 부상 2인[미국측 1·소련측 1(한희진)]
체 신 상 부상 2인[미국측 1·소련측 1(安基成)]
보 건 상 부상 2인[미국측 1·소련측 1(이상숙)]
상 업 상 부상 2인[미국측 1·소련측 1(이지엽²)]
임시정부예비후보 金起田(南), 金桂林(南), 홍기주, 현창형, 김명희
국 방 상¹ 金 日 成 북조선공산당 제1서기, 북조선임시인위 위원장

<표>소련이 구상한 ‘전한국임시정부’ 내각명단

소련군 정치사령부 본부 제7국장 부프체프가 전러시아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빠뉴쉬킨에게(1946년 3월 15일),<단평--조선임시정부 각료 후보들에 대하여>;<조선임시정부의 구성원에 대한 쉬티코프 동지의 초안>(1946년 3월 7일)을 토대로 작성.
 1. 내무상 최용건과 국방상 김일성, 양자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쉬티코프장군의 추천에는 국방성이 들어있지 않고, 내무상으로 최용건 대신 김일성을 추천하였다.
 2. 이지엽은 이두엽으로 발음되기도 한다.

 소련측은 모스크바결정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정당·사회단체와의 협의과정에서 제외하려 하였고, 정부의 구성은 좌우연립정부 형태를 취하였지만 각료들 선발에서 ‘1과 1/2’을 확보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였다. 즉 소련은 이북지역의 대표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 중심으로 선발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남한에서는 좌익세력이 대표의 절반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067)미국은 이북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치, 이남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출현을 소련측이 자신의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를 완료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740.00119 Control(Korea),<맥아더가 국무장관에게>, 1946년 2월 24일;<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6년 3월 19일. 소련은 이러한 각료선발을 통해서 한국에 자신에게 유리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소련이 반탁단체 제외를 고집한 것은 신탁통치 조항을 전적으로 지지해서라기보다068)소련은 해방 이전부터 모스크바 3상회담까지 계속 미국측의 신탁통치 제안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고,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거나 그 시기를 단축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유지하였었다. 반탁단체의 임시정부 참여를 처음부터 제한함으로써 협상에서나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한다는 계산이 작용하였다.

 양측의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비교하면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당면과제에 한해서는 소련측 방식이 보다 직선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반면에 미국측 접근태도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었으며, 임시정부 수립의 절차와 방법이라는 형식상의 문제에 집착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방안은 한국에 대한 양측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장치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고 양측 구상의 실현 여부는 협상 이전에 한국 사회 내부에서 그 실현기반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크게 좌우되었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설치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이전부터 추구하던 한국인 대표기관을 설치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목표를 온전하게 달성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민주의원이 한국인 정치세력의 대표기구를 자처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민주의원에 북한대표를 포함시키는 문제는 ‘비실제적’이라는 이유로 구상단계에서 제외되었고, 남한의 좌익을 참여시키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하지의 정치고문 굳펠로우(Preston M. Goodfellow)는 呂運亨을 좌파의 대표로 민주의원에 끌어들이기 위해 마지막까지 집요한 공작을 펼쳤지만 끝내 성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좌익은 민주의원이 설치된 바로 다음 날인 2월 15일 民主主義民族戰線(민전)을 수립하였고, 민주의원은 우익의 대표기관으로 그 위상이 고정되었다.

 국무부는 협의대표기구의 구성을 지시하면서 ‘좌우익의 극단주의자가 아닌’ 정당의 지도자들이 다수를 점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069)<SWNCC 176/18>. 초안에는 ‘중간파와 중간좌파’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간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미국 정부가 친공적 정책을 구사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육군부 차관 피터슨의 지적에 따라 문구가 수정되었다(<SWNCC 문서철, 피터슨 비망록>, 1946년 1월 28일). 그러나 미군정은 민주의원의 설치를 통해 이승만 중심의 우익 통합을 관철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이승만은 민주의원 설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일시 우익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임정의 非常政治會議籌備會 사이의 통합을 절충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미군정의 구상을 한국인 정치지도자들에게 실어 나르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였다.

 임정계열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과도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자처하였으나, 민주의원에 합류함으로써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미군정의 최고자문기관’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金星淑·張建相·金元鳳·成周寔 등 임정의 일부 인사들이 임정의 해체를 통탄하며 임정을 탈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070)金星淑,<오호! 臨政 30년만에 해산하다>(≪월간중앙≫8월호, 1968).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담 이후에도 공공연하게 반탁입장을 표명하였다는 사실은 미국측이 내부적으로 미처 모스크바결정 이후의 국면에 대응할 수 있는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의원은 미군정이 이전부터 추구해오던 남한의 정계통합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모스크바결정 이후의 상황변화에 맞추어 민주의원을 새로이 미·소공위 협의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민주의원은 남한의 정치적 통합기구로서 대표성은 물론 참여단체들의 반탁성향으로 인해 이후 소련과의 협상에서도 그다지 유용한 협상수단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민주의원이 설립된 지 1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끝까지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기구를 진정한 합작기구로 전환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였음을 인정하였다. 하지의 말을 빌리자면 “만약 전자의 대안을 선택한다면 미국이 파시스트, 친일파를 지원한다고 비난받는 결과가 될 것이고, 후자의 대안을 선택한다면 결국 민주의원은 심하게 좌측으로 쏠려서 소련이 후원하는 그룹이 민주의원을 장악하게 될 것”이었다.071)740.00119 Control(Korea),<Tfgcg 301, 하지가 국무장관에게>, 1946년 2월 22일.

 하지는 처음부터 민주의원의 제한성을 인정하였지만, 소련과의 협상에 즈음해 민주의원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군정으로선 민주의원을 약간 손질하여 미·소공위에 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는 미·소공위 개회 전 이승만을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온건파인 김규식으로 하여금 의장대리를 맡게 함으로써 민주의원에 대한 좌익과 소련의 반발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072)손세일,≪李承晩과 金九≫(일조각, 1970), 226쪽.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개막되기 하루 전인 3월 19일 돌연 민주의원 의장직을 ‘稱病休職’하였다.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잠시 물러난 것은 소련과의 관계를 의식한 것이겠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승만의 광업권 매각 스캔들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전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정 대통령으로 행사하며 미국인 돌베어에게 광업권을 판 사실이 3월 12일≪조선인민보≫에 보도되었던 것이다. 돌베어는 한미협회 회원으로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실은 소련의≪프라우다≫지에도 보도되었다(≪조선인민보≫, 1946년 3월 15일).
이 사건은 원래 미주에서 발행되는≪독립≫, 1946년 1월 23일자에 처음 보도되었다. 이 신문은 민족혁명당 미주지회의 기관지 노릇을 하였던 신문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하지는≪독립≫신문사에 장서를 보내 이승만의 광산조차설이 사실이라면 법정에 내놓을 증거가 있는지를 물으며 신문사를 을러댔다. 당시 民族革命黨 美洲支會 회장이었던 곽림대는 이 사실의 발원지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서 얼리(Steven Early)였다고 전하였다(곽림대,≪못잊어 華麗江山≫, 인물연구소, 1973, 206쪽).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공위 회담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의 반탁입장과 취약한 협상기반에도 불구하고 미·소 양측이 3월 말에 작업 일정과 방법에 합의함으로써 회담 초반 협상은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외부에도 전달되어, 한국인들로 하여금 회담성사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다.073)미·소공위 제3호 공동성명에 대한 국내 각 정당·단체의 반응에 대해서는≪서울신문≫, 1946년 4월 1일 참고.

 그러나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 때문에 회담이 난관에 부딪히자 양측은 본질적인 차이점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을 문안수정이나 부분적 절충을 통해 관철시키려 하였다. 미국측은 남북한 행정의 통합을 임시정부 수립문제보다 앞세우거나, 민주의원을 임시정부 수립의 매개로 하는 것이 모스크바결정에 비추어 별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였다.074)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 미국측 제안문서 제3호,<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 3쪽. 미국은 소련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탁운동단체를 협의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을 버리지 않자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회담이 난항을 계속하던 4월 5일, 소련측 대표단은 과거에 반탁운동을 하였더라도 앞으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면 과거의 반탁활동을 불문에 붙이고, 협의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양보안을 제안함으로써 회담에 돌파구를 제공하였다.075)인민평론사 편역,<미·소공동위원회 휴회경위>(≪세계의 눈에 비친 해방조선의 진상≫, 1946), 11쪽. 이에 대해 양측은 협상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4월 18일 “미·소공위는 목적과 방법이 진실로 민주주의적이며 또한 모스크바결정의 한국에 관한 조항의 목적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한국의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는 취지의<미·소공위 5호 성명>을 공식발표하였다.

 미군정은 4월 17일 소련측과<5호 성명>에 합의한 뒤 우익단체들을<5호 성명>에 서명하도록 적극 설득하였다. 민주의원의 일부 의원들이<5호 성명>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자 하지는 심지어<5호 성명>의 취지에도 어긋나고 소련측을 자극할 수도 있는 성명을 발표하면서까지 반탁단체들을 협의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076)하지는 4월 27일, “5호 성명에 서명하더라도 신탁통치에 대한 의사를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고, 이 선언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사회단체가 신탁을 찬성하는 표시는 아니다”는 취지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동아일보≫, 1946년 4월 28일).

 미군정은 이와 같이<5호 성명>을 계기로 한국인 정치세력들에게 미국이 미·소공위 회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시사하였고, 하지의 성명 발표 이후 반탁단체들이 대거<5호 성명>에 서명하였다. 이승만도 ‘참여하의 반탁’ 전술을 승인하였고, 우익의 대표적 반탁단체인 한민당·민주의원·비상국민회의 소속단체가 협의 참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협의대표기구를 통한 협의를 포기한 순간부터 일찌감치 미·소공위를 결렬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은 일종의 이중행동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077)미국 대표단은 소련과 협상을 통해 미·소공위 5호 성명에 합의하였지만 그 이전에 이미 내부적으로는 미·소공위 결렬 방침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측 대표단 단장이 미국 대표들에게 보내는<분과위원회에 주는 지시>와 그 부록인<일정표>, 1946년 4월 6일 참고. 모두 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에 수록. 반탁단체가 대거 협의를 신청하는 사태는 다시 소련측을 자극하게 되었고, 5월 6일 소련대표단은 민주의원을 협의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협의에 참여한 단체들에게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응수하였다. 5월 8일 쉬티코프는 하지를 개인적으로 만나 마지막 절충을 시도하였지만 양측은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078)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7,<하지와 쉬티코프의 대화 비망록>, 1946년 5월 8일. 1차 미·소공위는 회의 개최 50여 일 만에 양측의 입장차이만 확인한 채 막을 내렸다.

 미국측이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와의 직접 협의를 받아들이면서 조기에 회담을 무산시키기로 결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미국측이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협의대표기구의 구성이 모스크바결정에 비추어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또 협의대표기구로 미군정이 내세운 민주의원이 대표성을 주장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민주의원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우익세력으로만 구성된 군정의 일개 자문기구에 불과하였고, 대표성도 없고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079)마크 게인,≪해방과 미군정≫(까치, 1986), 34쪽. 마지막으로 미군정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많은 우익단체들을 협의에 참여시켰지만, 협의에 임할 실무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국내 정치세력의 평가와 이용문제를 둘러싸고 국무부와 미군정 사이에 인식 차가 있었지만, 국무부는 대표단이 마련한 회담방침 자체에 대해서는 계속 지지를 표명하였다. 미군정이 반탁단체를 협의대상에 포함시키기 위해 동원한 ‘의사표현의 자유’ 원칙은 국무부로부터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그렇게 조기에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데 국무부가 동의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협상에 관한 전권이 거의 현지의 하지와 대표단에 주어졌던 만큼 미군정의 의사가 관철되는 가운데 국무부도 사후적으로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무부는 미·소공위의 결렬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재개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 신속하게 남한에서 미국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미국 국무부는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남한에서 정치·경제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소련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상황을 창출하지 못하는 한 소련과의 협상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국무부는 미·소공위 재개교섭을 전적으로 미군정에게 맡겨 놓았다. 미·소 양군 사령부는 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회담 재개를 모색하였다.

 1946년 가을로 접어들자 통일정부 수립의 현실적 출구로서 미·소공위 속개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감이 점차 높아갔다. 분단상태가 지속되자 이승만·한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과 일반대중들 사이에 분할점령 상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미·소공위 속개라는 현실적 태도가 점차 지배하였다. 좌익은 1차 미·소공위 결렬 직후부터 바로 미·소공위 속개운동을 펼쳤고, 좌우합작 추진세력은 합작의 성사를 통한 미·소공위 재개를 1단계 목표로 설정하였다. 또 우익은 반탁의 구호 아래 결집되어 있었고, 이승만·한민당세력은 미·소공위 재개 대신 미·소공위의 용도폐기를 주장하였지만 미·소공위 재개를 노골적으로 반대할 처지는 아니었다.

 미군정과 소련 민정청의 교섭과정에서 하지의 경제고문 번스(Arthur C. Bunce)가 1946년 10월 3일부터 7일 사이에 소련군 민정청 정치고문 발라사노프(G. M. Balasanov)의 초청으로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였다. 번스는 평양에 머무는 동안 발라사노프와 미·소공위 재개 조건을 문서로 작성하여 가능한 합의점을 모색하는 단계에까지 교섭을 진행하고 돌아왔다.080)740.00119 Control(Korea),<정치고문부 송달문서 51, 번스의 평양방문 보고서>, 1946년 10월 16일. 미군정은 번스·발라사노프 회담을 계기로 소련측이 미·소공위 재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기대하였다.081)미군정은 소련이 미·소공위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는 판단의 근거로 미·소공위 소련측 수석대표 쉬티코프가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임한 뒤 얼마 안 되어 발라사노프의 방문 제안이 뒤따른 점, 여운형이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김일성·김두봉의 미·소공위 재개에 대한 기대감을 전하고 있는 점, 좌익이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점 등을 들었다(740.00119 Control(Korea),<Tfurc 62,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6년 10월 8일 및<힐드링, 아놀드소장, 보튼의 대화 비망록>, 1946년 10월 16일).

 번스·발라사노프 회담은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그 논의내용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타협안을 찾는 과정에서 미·소공위에 참여시켜 주도적 역할을 맡길 한국인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절충을 벌였다. 번스일행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이승만·김구를 제외하고 미·소공위를 재개하는 문제가 논의되었고, 논의과정에서 소련은 여운형에게 호감을 표시하였다.082)여운형은 1946년 12월 4일의 정계은퇴 성명 발표 이후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일전 모 석상에서 군정청 모 요관을 만났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 저간 10월에 이승만, 김구 양씨를 반탁책임자로 회의에서 제외할 것을 조건으로 북조선과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하고 금후로는 현지교섭을 단념하였다고 한다”는 발언을 하였다(노획 문서철, SA 2007, 상자번호 10,≪週報批判新聞≫, 1946년 12월 9일). 또 미·소공위 소련측 수석대표 쉬티코프는 발라사노프로부터 번스와 회담내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여운형으로 타협을 보는 것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쉬티코프비망록>1, 1946년 10월 3일).

 둘째, 미·소공위 재개조건에 대한 문안 절충을 구체적으로 시도하였다. 발라사노프는 번스에게 미·소공위 재개의 기초로 하지와 치스짜코프가 받아들일 만한 초안을 만들어 볼 것을 요청하였다. 번스와 발라사노프는 번스가 만든 잠정성명을 놓고 절충을 벌였고, 번스는 서울로 돌아와 미·소공위 재개 초안을 미국측 대표단과 협의하였다.083)740.00119 Control(Korea),<Tfurc 64, 번스가 국무장관에게>, 1946년 10월 17일. 이 초안은 11월 1일 하지가 치스짜코프에게 보내는 서한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내용은 미국이 주장하던 의사표현의 자유와 소련측 주장인 정부구조와 조직 협의에서 반대를 조장하는 정당·사회단체를 제외시킨다는 점을 문서적으로 절충한 것이었다.084)서한의 전문은≪조선일보≫, 1946년 11월 7일 참고.

 셋째, 소련이 양군철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이다. 발라사노프는 번스와 회담 중 넌지시 이 문제를 끄집어냈으나, 번스가 서울로 돌아온 뒤 보고를 받은 미국의 반응은 민감하였다. 국무부는 번스의 보고를 받자 즉시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소련이 동시철군을 제기하였다는 사실을 환기시켰으며, 또 駐蘇대사 스미스(W. Bedell Smith)에게 전문을 보내 의견을 구하였다.085)740.00119 Control(Korea),<힐드링, 아놀드, 보튼의 대화 비망록>, 1946년 10월 16일 및<극동부 차장 펜휠드의 대담비망록>, 1946년 10월 31일. 미국측 내부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반응이 일각에 있었으나,086)740.00119 Control(Korea),<점령지역 차관보 힐드링 장군이 빈센트에게 보내는 부서내 비망록>, 1946년 11월 8일. 미군정이나 국무부 모두 임시정부 수립 이전의 동시철군은 불가하다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번스·발라사노프 회담에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회담에서 시도된 절충은 끝내 무위로 돌아갔고, 미군정은 이후 점령군 당국 차원의 현지교섭을 포기하였다. 번스·발라사노프 회담을 통한 양 점령군 당국의 절충이 실패한 것은 과도입법의원의 설치를 둘러싸고 표출된 남한정치의 혼란, 남한 내 좌익 3당 합당을 둘러싼 좌익 정치세력 내부의 분열, ‘10월항쟁’의 여파 등으로 남한정국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이러한 남한 내 정세를 보며 소련은 이전과 같은 비타협적 태도를 계속 견지하였다.087)치스짜코프는 10월 26일자 서한에서 종래의 소련측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하지의 11월 1일자 서한은 양측의 절충내용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으나 소련측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치스짜코프가 하지에게>, 1946년 10월 26일;<하지가 치스짜코프에게>, 1946년 11월 1일).

 미·소공위의 휴회상태가 장기화하고, 남한점령의 성과에 대한 비관적 평가가 늘어가는 가운데 하지는 1월 하순, 워싱턴에 한국문제의 해결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맥아더는 이 전문을 중개하면서 하지에 대한 지지의사를 나타냄으로써 하지를 응원하였다. 전문에서 하지와 맥아더는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한 4가지 선택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①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②한국상황을 다룰 비당사자국 중심의 위원단 구성, ③미국·소련·영국·중국 4대국이 회합하여 모스크바결정 제3항을 명확하게 한 해결안 제시, ④미·소간 고위 회담으로 전 한국이 하나의 정치·경제적 단위로 성공적으로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088)740.00119 Control(Korea),<Cx 69369, 맥아더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1월 22일. 하지의 전문은 전문번호<Tfgcg 98>로 같은 날 맥아더에게 전달되었다. 하지의 전문이 의도한 것은 미국정부가 정부 차원에서 한국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하지는 순서상 뒤의 대안으로 갈수록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았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4번째 안을 건의하였다.

 하지는 국내 정세를 보고하는 같은 날짜의 전문에서 1월 18∼20일 사이에 예정되었던 우익측 쿠데타계획의 배후와 경과·현재 진행상황을 보고한 뒤, 현재의 정세를 “①38도선 분할과 소련의 태도가 점령지역 차원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현지 차원의 협상으로 미·소 협조는 불가능, ②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경제사정은 절망적, ③우리의 점령통치는 勞力이나 경비의 지출에서 모두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고, 사기도 저하됨, ④2개월 이내에 미·소공위 재개에 성공하거나, 한국 상황에 대한 적극적 행동이 없으면, 한국에서 미국이 서약한 사명을 달성할 기회와 한국인의 신임을 잃게 될 것”이라고 요약하였다.089)740.00119 Control(Korea),<하지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1월 22일(?). 이 전문은 번호와 발신일자 미상이나, 전문 접수시간이 1월 22일 오후로 되어 있다.

 하지가 제시한 위의 4가지 선택적 대안이나 정세보고는 미군정의 정세판단과 비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이후 행동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는 이 시점에서 상부의 정치적 결단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한편, 워싱턴에 경제원조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하지의 전문을 전후하여 워싱턴의 대한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대한정책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새로 부임한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은 극동국장에게 당시 미국정부 내에서 추진 중이던 對韓 경제원조안에 대한 국무부의 찬성의사를 밝히면서, “남한에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그 경제를 일본경제에 결합시키기 위한 계획을 기초할 것”을 지시하였다.090)FRUS 1947, Vol. VI,<국무장관 마샬이 극동국장 빈센트에게>, 1947년 1월 29일. 한국경제와 일본경제의 결합을 지시한 마샬의 지시는 해방 직후 한국경제의 일본경제로부터의 분리를 공식화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지시를 들어 미국이 남한 단정수립을 본격화하였다는 지적이 많으나 이 지시의 전후문맥을 보여주는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고, 지시 그 자체도 매우 간단해서 마샬의 생각을 해명하기는 어렵다(李鍾元,<戰後米國の極東政策と韓國の脫植民地化>,≪近代日本と植民地≫, 岩波書店, 1993, 21쪽). 또 군부의 지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육군부 장관 패터슨(Robert B. Patterson)과 합동참모본부 의장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1947년 1월 말의 국무부·육군부·해군부 3부 장관회의에서 이 이상 소련과 협상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대안으로 남한정부 수립을 제기하였고, 국무부에 철군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을 요청하였다.091)삼부조정위원회 문서철, 롤번호 7,<삼부장관회의>, 1947년 1월 31일.

 이 무렵 워싱턴의 미국 대한정책 담당자들간에는 무언가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092)국무부 내에서는 새로 부임한 마샬 장관에게 제출할 대한정책 지침을 논의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현지 차원의 대소협상이 성과가 없으면, 정부 차원에서 미·소공위 재개를 교섭하거나 임시정부 수립 대신 4강 탁치를 4강들과 논의하자는 안이 제기되기도 하였다(740.00119 Control(Korea),<법률고문 미커가 일본과 앨리슨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7년 1월 17일). 이때 제기된 내용 가운데에는 점령 지속과 원조 확대에서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내지 4강대국 이관, 남한 단정안과 봉쇄구상, 조기철군론 등 모스크바결정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 이외에 미국이 상정할 수 있는 대안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었다. 이러한 대안들은 기존 대한정책의 전면적 수정이나 근본적 변화를 함축하는 새로운 내용들이었고, 위의 군부 지도자들의 견해는 그 가운데 가장 비관적이고 청산적인 견해를 반영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정책 관련자들이 한결같이 대한정책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관한 部間 특별위원회(이하 특위)’가 구성되었다. 이후 특위에서는 주한미군 철수와 남한단정 수립 문제를 포함하여 한국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하였다. 특위의 논의과정에서는 특히 군부의 철군 주장과 국무부의 철군 불가론이 대립되었다.093)특별위원회에는 국무부, 육군부 관리는 물론 예산국 관리와 미군정 대표들이 참여하여 논의를 거듭하였다. 또 고위층에서도 비망록과 보고서를 둘러싸고 의견조정이 거듭되었다(740.00119 Control(Korea)<마틴이 우드에게 보내는 한국계획에 관한 비망록>, 1947년 3월 31일;<빈센트가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7년 4월 8일;<육군장관 패터슨이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1947년 4월 4일).

 특위의 논의과정에서 나타난 군부의 조기철군 주장은 군사적 견지에서 對蘇 전면전의 경우 한반도에 주둔한 지상군은 활동에 제약을 가져올 뿐이며, 전후 동원체제가 해체되고 심각한 병력부족을 겪는 상태에서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다른 지역에 적절히 재배치되어야 하고,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균형예산에 대한 국내적 압력이 심각한 상태에서 계속 점령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어쨌든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조속히 철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094)위의<육군장관 패터슨이 국무차관 애치슨에게>, 1947년 4월 4일.

 대외원조의 우선 순위를 둘러싼 전반적 재평가, 미군 병력의 지속적인 감축과 국방비 지출의 감소에서 나타나듯이095)1948년이 되면 병력은 종전시의 1/10, 군비지출 규모는 1/9로 감축되었다(이원덕,<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연구-1947∼1949의 경우를 중심으로->(서울대 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 1987), 18∼23쪽). 종전 후 군사예산과 군사자원은 계속 감소되는 추세에 있었다. 군부는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군사전략의 일정한 수정과 병력의 재배치로 극복하려 하였다. 이 주장의 배후에는 소련측의 협상태도를 보건대 한국문제의 조기해결은 불가능하고, 남한의 상황을 보건대 남한에서 미국측 입장을 지탱하기는 점점 더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평가가 깔려 있었다. 군부의 주장은 군사적 견지에 선 立論으로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이후의 사태전개와 상관 없이 미국의 對韓公約을 철회하고 한국을 포기하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국무부는 철군을 반대하였고, 이러한 국무부의 입장은 특위 보고서에 잘 나타난다. 특위가 작성한 3월 말의 한 보고서는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에 대한 군부의 평가를 인정하면서도, “소련이나 소련이 지배하는 군대에 의한 전 한국 장악은 극동에서 미국의 이해에 전략적 위협이 될 것이고, 특히 일본에 매우 심각한 정치·군사적 위협이 될 것”임을 지적하였다.096)삼부조정위원회 문서철, 롤번호 8, 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Korea 1947,<한국에 관한 특별위원회 보고서>, 1947년 3월 31일. 이 지적은 군부의 조기철군 주장에도 불구하고 특위가 한국의 전략적 지위에 대해 해방 이전부터의 평가를 유지하였음을 보여준다.

 특위는 남한단정안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특위는 단정안이 최소한 미국이 지고 있는 성가신 짐의 일부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나 이것이 미국과 한국인들이 직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였다. 우선 전반적인 역관계를 볼 때 이러한 조치는 남한을 소련의 통제권하에 넘기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극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손상하고, 미국의 지위를 불리하게 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 단정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과정적으로 소련과 사전협정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모스크바결정 위반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097)FRUS 1947, Vol. VI,<한국에 관한 部間특별위원회 보고서 초안>, 1947년 2월 25일.

 다음으로 수립된 단독정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과 평가가 필요하였다. 단정안은 한국 내 지지세력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 이외에 다른 지지기반을 형성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미국은 이들의 보수적 성향, 정치적 기반의 허약성 때문에 이들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따라서 남한단정을 수립한다 해도 이 정부에 대한 모종의 지원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것은 군부가 단정안의 장점으로 꼽고 있던 한국에 대한 점진적인 지원의 철회라는 방향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는 특위와 정책협의를 위해 워싱턴에 체류할 때, 의회와 육군부, 심지어 국무부의 일부 관리들조차 한국에서 빨리 손을 떼야 한다는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나타냈다.098)웨드마이어 문서철, 상자번호 2,<하지 장군이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행한 구두보고>, 1947년 8월 27일. 하지가 특위와 정책 협의를 위해 워싱턴에 체류할 때, 육군부 관리들은 일본으로부터 철군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을 하지에게 질문하였다. 질문자의 의도는 각 지역별로 기회비용을 산출하면서 감군 효과를 따져보기 위한 것인데, 하지는 이 질문에 대해 매우 당황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철군한다면 한국에 머물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는 일본과 한국 어느 한쪽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한국이 되겠지만, 결코 한국에서 철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099)주한미군사령부 문서철, 상자번호 63/96,<하지와 육군부·국무부 관리들의 회의록>, 1947년 3월 3일.

 당시 미국 정가나 일반여론 가운데에는 전후 세계 각지로 확대되는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 그것을 감내할 수 없는 미국의 처지에 비추어 원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100)각국별 원조 우선순위의 재검토는 모두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FRUS 1947, Vol. I,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보고서<US Assistance to Other Countries from the Standpoint of National Security>, 1947년 4월 29일 참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트루만 독트린에 반영된 그리이스·터키에 대한 미국의 원조 확대에 나타나듯, 미국의 세계전략과 대외정책 실현을 위해 군사력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남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워싱턴의 군사력 재배치에 대한 고려와는 달리 점령당국은 1946년 후반 이래 군사력 증강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 왔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소련군 감군 첩보와 더불어 북한 인민군의 증원 사실을 꾸준히 보고하였다. 보고 내용이 들쭉날쭉하여 사실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지만101)일례로 1946년 10월 28일자 전문은 이북에서 30만 명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첩보를 전하고 있으나, 불과 며칠 뒤인 10월 31일자 전문에는 그 숫자가 50만 명에 이르고 있다(육군부 정보참모부 전신철, 상자번호 114,<Tfgbi 494>및<Tfgbi 502>). 중요한 것은 하지가 이러한 징후를 북한군대에 의한 남한 혁명 원조와 연결시키며 지속적으로 상부의 주의를 촉구하였다는 점이다.102)주한미군사령부 전신철, 롤번호 247,<Tfgcg 522, 주한미군사령관이 맥아더 장군에게>, 1946년 10월 28일.

 미군정의 병력증강 요구는 현지의 유동적 정세에 대해 워싱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가 배어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군정이 우려하는 바를 잘 나타낸다. 즉, 남한의 정치적 혼란상태에 이어 이북으로부터의 남한 좌익에 대한 무력원조는 전 한국을 좌익의 수중에 넣게 만들 것이므로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군사력이 증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지의 입장이었고, 상부로서도 이러한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47년 봄의 철군논의에서 워싱턴의 군부 지도자들의 입장이 주로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나 병력전개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조기철군의 조건을 모색하였다면 미군정 당국이나 국무부는 미군 철수로 초래될 힘의 공백이 한국의 급진세력에게 권력 장악의 길을 열어주고, 이것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전체적으로 특위는 남한단정 수립이나 주한미군의 조기철수를 반대하였다. 특위는 1947년 5월까지 활동하였고, 이들의 논의내용은 그때그때 정책결정에 반영되었다. 이 위원회가 논의과정에서 추구한 행동방침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⑴ 미·소공위 재개를 위해 소련과 정부 대 정부 차원의 논의를 다시 추진

⑵ 남한의 정치·경제·문화적 발전을 위해 ‘적극적이고도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 점령비용 이외에 추가적으로 3년 간 6억 불을 원조

⑶ 적절한 선거법이 만들어지면 가능한 빨리 ‘남조선과도정부’를 수립

 (FRUS 1947, Vol. VI,<한국에 관한 부간 특별위원회 비망록>, 1947년 2월 25일;삼부조정위원회 십진주제분류 문서철, 롤번호 8,<한국에 관한 부간 특별위원회 보고서>, 1947년 3월 31일;같은 문서철, 롤번호 7,<삼부장관회의>).

 군부의 철군주장과 같이 대한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는 분위기가 일각에 존재하였지만 특위가 제시한 위의 행동계획은 워싱턴의 고위당국이 하지가 제시한 미군정의 현실적 처방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대한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수행할 만큼 미국측 내부에 정책적 준비가 이루어졌거나 정책결정집단 내부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기본적으로 이러한 정책변화가 당시 남한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대안이나 근거들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미국은 남한 내 대중적 지지의 상실, 철군시 남북간 무력대결의 가능성, 미·소공위 결렬에 따른 미·소관계의 악화와 국제적 비난여론의 초래를 감수하면서까지 정책변화를 수행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고위 정책결정집단 내부의 대한정책에 관한 논의과정과 논의내용이 대소선전에 충실히 이용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위는 6억 불 원조안을 작성하면서 이미 이 제안의 의회통과가 쉽지 않으리라 예상하였다.103)FRUS 1947, Vol. VI,<한국에 관한 部間특별위원회 보고서 초안>, 1947년 2월 25일. 그렇지만 정책의 실현 가능성 여부에 상관없이 대한정책을 둘러싼 정부 내의 논의는 그때그때 언론에 반영되었다. 애치슨·힐드링(John H. Hilldring)과 같은 고위층 인사들의 발언은 용어의 선택까지 고려한 매우 신중한 것이었으나, 비교적 정확하게 내부의 논의내용을 확인하여 주었다. 또 언론에 의해 이러한 발언들이 대소 강경자세로의 선회에 따른 대한정책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104)모스크바 4상회담이 개최되는 3월 10일을 전후하여 이러한 취지의 발언과 보도가 빈발하였다. 예컨대 3월 10일 힐드링의 디트로이트 경제구락부에서의 연설, 애치슨의 3월 12일자 기자회견, 3부 장관회의에서의 6억 불 경제원조안 심의에 대한 보도 등을 참고. 각각≪동아일보≫, 1947년 3월 12일·13일·21일.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정부는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종의 대소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여러 통로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고한 개입의지를 시위하였다. 특위에서 일단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정부 차원의 교섭을 결정하자, 미국정부는 소련정부와 미·소공위 재개교섭 과정에서 이러한 강경한 자세와 미국의 개입의지를 의도적으로 과시하였다.105)몰로토프에게 미·소공위 재개를 제안하는 서한 초안에 대한 애치슨의 논평과 수정 참고. 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에서 주소 미국대사관에>, 1947년 4월 2일.

 미국의 마샬 국무장관은 모스크바 4상회담 말미인 4월 8일에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미·소공위 재개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양측은 서신을 교환하여 미·소공위 재개조건을 교섭하였고, 마침내 미·소공위를 5월 20일에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106)미·소 양국 정부 사이의 교섭경과에 대해서는 740.00119 Control(Korea),<마샬이 몰로토프에게 보내는 서한>, 1947년 4월 8일;<몰로토프의 답신>, 1947년 4월 9일;<마샬 회신>, 1947년 4월 30일;<몰로토프 회신>, 1947년 5월 8일 참고. 마샬과 몰로토프 사이에 교환된 서신의 내용은 번스·발라사노프 회담 이래 양측이 모색하였던 절충의 방향, 즉 의사표현의 자유를 관철하려는 미국의 입장과 반탁단체를 제외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서두르는 소련의 입장을 임시 봉합한 것이었다.107)소련측이 미·소공위 재개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1946년 11월 26일자 치스짜코프 서한과 이에 대한 하지의 12월 24일자 하지의 답신이었다. 미국도 12월 24일자 하지의 답신을 미·소공위 재개의 기초로 삼는 데 동의하였다. 하지의 12월 24일자 서한은 ‘의사표현의 자유’ 원칙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모스크바결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단체·개인을 정부협의에서 배제한다는 취지의 문안을 포함하였다. 즉 양측이 비록 미·소공위 재개일자에 합의하였지만 근본적인 입장 조절이나 어느 일방의 획기적 양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측은 모두 서한에 나타난 문구를 회담석상에서 자기측 입장에 유리하게 전술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고, 어느 한쪽도 회담의 장래와 타협 가능성을 낙관하지 않았다.108)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가 삼부조정위원회에>, 1947년 5월 7일;<정치고문실 송달문서 100,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1947년 5월 11일;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 소장,<소·미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단에게 보내는 훈령>, 1947년 5월 18일. 양측은 회담 재개 자체에 기대를 걸었고, 회담과정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최대한 양보를 끌어낸다는 입장이었다.

 국무부는 미·소공위 재개시 미국대표단이 따라야 할 공식지침을 5월 12일 미군정에 하달하였다. 국무부는 1차 회담시 지침이었던<SWNCC 176/18>을 2차 회담에서도 그대로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109)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가 주한미군사령부에>, 1947년 5월 12일. 대표단은 2차 회담 사전기획 과정에서 미·소가 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할 경우와, 그렇지 못하고 미국측이 회담 교섭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행동해야 할 경우 양자에 대비하여 예상계획을 수립하였다.110)<미·소공위 미국측 대표단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의 일반적 조직구조>, 1947년 4월 28일;<미·소공위 재개시 행동지침에 관한 싸전트의 비망록>, 1947년 4월 21일. 모두 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9. 1차 미·소공위의 미국측 기획자가 데이어였다면, 2차 미·소공위 미국측 협상기획에서는 주로 싸전트와 웨커링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2차 회담을 최종회담으로 간주하였고, 출발점에서부터 소련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미국측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것은 2차 회담에 와서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측 태도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미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신탁통치 내지 그것에 준하는 위장된 통제책의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2차 회담 개시 직전 대표단에 의해 제시된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은 “신탁통치는 한국의 주권을 최소한의 범위에서 침해하는 단지 필요한 명목상의 것이어야 하고, 미·소공위나 유사한 기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며, 이 기구는 강력한 미국외교사절단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태도변화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이같은 변화는 미국의 대한정책 전반 및 그 수행방식과 관련해 주목해야 한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국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 주도하의 4강구도에 묶어 놓겠다는 구상이 보다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한국정부의 설립과 이에 대한 미국의 보다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련은 협의대상 문제에서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양보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제2차 미·소공위에 임하였다. 소련은 7∼8월까지는 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한 추천서를 제출한다는 방침에서 임시정부 수립방안의 마련을 초미의 과제로 삼았다. 소련은 미·소공위와 협의할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의 명단 작성시 북 45%, 남 55%의 비율을 지킬 것이나, 남북의 인구비례를 감안 북 40% 대 남 60%로 양보할 수도 있다고 내부적으로 방침을 정하였다. 단, 남에서 좌우의 비율이 50:50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1차 회담과 다름없었다.111)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소장,<소미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단에게 보내는 훈령>, 1947년 5월 18일. 소련은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와의 협의 단계에서 소련을 지지하는 좌익계열 단체들의 수적 우위와 비례적 우세를 확보함으로써 이를 임시정부 수립에서 주도권 확보로 연결시킨다는 방침을 계속 견지하였다.

 기타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소련의 구상은 1차 회담과 대동소이하다. 단지 임시정부 이외에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임시인민회의의 창설을 예상하였다는 점이 1차 회담과 다른 큰 특징이다. 소련은 임시인민회의에 자문·협상기관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1차 회담에서 미국측이 협의대표기구를 선호했던 것을 의식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소련측도 2차 회담을 최종적인 회담으로 간주하였고, 임시정부 구성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이 문제를 한국인 당사자들에게 맡기고 외국 군대는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즉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추구하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한국인 스스로가 정부 수립에 나서게 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선거가 급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선거가 실행될 경우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112)<레베데프비망록>, 1947년 5월 22일.

 미·소 어느 쪽도 어느 일방의 주도하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거나 수립될 임시정부에 상대방의 영향력이 주도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협상과정에서 방지한다는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방안과 관련해서는 양쪽 모두 1차 회담과 비교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측은 임시정부 수립의 절차와 방안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와의 협의 대신 선거절차를 임시정부 수립의 기본방안으로 중시하였다. 또 회담 결렬시 미국은 한국문제를 4강대국 내지 유엔에 이관한다는 방침이었고, 소련은 한국인들의 자체해결에 맡긴다는 내부적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2차 미·소공위 개시 직전 미군정은 회담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 반탁단체를 협의에 최대한 참여시키고, 이들을 미국의 계획 내에서 자제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은 미국측 입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우익계열 단체들을 가급적 많이 참여시켜 협의대상 단체의 선정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최소한 반탁단체들이 노골적인 반탁활동으로 회담석상에서 미군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태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정은 사전에 우익측 단체들의 미·소공위 참여를 적극 유도하였고, 회담 개최 직전에는 미군정 고위당국자까지 나서서 우익측 지도자들에게 협의 참여와 공개적인 반탁활동의 자제를 요청하였다. 특히 이승만과 김구의 참여와 협조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므로 하지와 브라운(Albert E. Brown)은 이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브라운은 이승만에게 가능한 행동노선은 “①그의 정당을 이끌고 모스크바결정을 달성하고 합법적으로 미국을 지원하여 독립을 얻거나, ②범법자가 되어 법망 밖에서 4강대국과 공개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방법 뿐”이라고 위협하였지만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결정을 통한 정부 수립은 미국의 공식정책이 아니라 일부 미국인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응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남한단독정부안을 고집하면서 힐드링도 이 방안에 동의했으며, 이 방법이 자기의 노선이라고 답하였다.113)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브라운 작성;이승만과의 회담>, 1947년 5월 17일.

 미군정은 회담 직전 중도파로부터도 미국측 입장에 대해 전적인 협조를 끌어내지 못하였다. 중도 좌·우파는 전반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한 계기로써 미·소공위 재개를 크게 환영하였지만, 미국측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은 김규식과 안재홍에게 협조를 부탁하였지만, 김규식과 안재홍은 먼저 미군정에서 조병옥과 장택상을 해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정으로부터 번번이 정치·사회적 개혁 요청을 거절당하였던 김규식과 안재홍은 정계은퇴 의사를 내비치며 브라운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114)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브라운 작성;5월 19일 현재 정치상황>, 1947년 5월 19일.

 브라운은 미·소공위 개최 직전 하지에게 미·소공위 개최조건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⑴ 우익정파들의 비협조 위협, 이들은 사실상 이승만이 이끄는 남한만의 독립정부를 원한다.

⑵ 중간파는 조병옥과 장택상이 해임되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으려 한다.

⑶ 극좌파는 사실상 소련이 지배하는 정부를 원한다.

 따라서 다음의 행동노선이 채택되어야 한다.

⑴ 미·소공위와 협의를 위해 선택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며 미·소공위를 진행시킨다.

⑵ 초청을 수락한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하고 총선거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브라운 작성;5월 19일 현재 정치상황>, 1947년 5월 19일).

 미군정은 미·소공위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사전에 남한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위의 보고서 (1)·(2)항에 나타나듯 2차 회담의 개최 시점에서 미군정은 좌익은 물론 우익과 중도파 어느 세력으로부터도 전적인 협조를 확보하지 못한 채 회담을 맞았다. 브라운은 회담 개최가 임박하였으므로 일단 미·소공위를 재개시킨 뒤, 협의에 가급적 많은 단체를 참여시키도록 노력하는 한편 총선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미국측 입장을 회담에서 견지할 것을 제시하였다.

 1947년 5월 2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었다. 양측은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현격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게 회담에 임하였으며, 겉으로 나타난 회담 초반의 분위기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115)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5, 버취 작성<제25차 미·소공위 회의 요약>, 1947년 5월 23일. 6월 7일 마침내 양측이 공동결의문 12호 작성에 합의하였고, 그 내용을 6월 11일<미·소공위 11호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미·소공위 11호 성명>은 미·소공위 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각 정당·사회단체들에게 “①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고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를 고수하며 신탁통치(후견)에 관한 제안을 작성하는 데 협력한다는 내용의<선언문>에 서명날인하고 그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를 제출할 것, ②임시정부의 조직 및 그 원칙에 관한 자문서 및 임시정부 정강에 대한 자문서에 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16)北朝鮮民戰中央書記局 편,<蘇米共同委員會에 관한 諸般資料集>(≪韓國現代史資料叢書≫13, 돌베개, 1947), 140∼141쪽. 따라서 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사회단체는<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 임시정부에 관한 두개의 답신서를 제출해야 했다.

 6월 11일의<미·소공위 11호 성명>발표 이후 미·소공위는 정당·사회단체들의 협의 신청을 접수하였다. 접수 결과 협의를 신청한 단체의 수는 이남에서는 425개, 정파별로는 우익 158개(58.1%), 좌익 70개(26.9%), 중간파 42개(15%), 정체불명의 군소단체 153개였다.117)740.00119 Control(Korea),<ZGCG 929, 제이콥스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6월 24일. 미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총 단체수는 425개이지만 정치성향별로 분류해 놓은 총 단체수는 423개이다. 분류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체불명의 군소단체는 대부분 유령단체인 것으로 보인다. 이북에서는 총 38개 단체가 협의를 신청하였으며, 정치적 성향은 좌익 일색이었다. 양 지역을 합해 463개 단체가 협의를 신청하였다. 남·북을 합한 협의 신청단체의 정파별 숫자와 비율은 우익 158개(51.3%), 좌익 108개(35.1%), 중간파 42개(13.6%)였다.

 협의 신청서를 접수한 6월 하순까지만 해도 미·소공위는 순로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신청서의 접수가 끝난 뒤 미·소공위는 6월 말과 7월 초에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협의신청 단체들과 회합을 갖고 협의의 목적과 절차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그러나 7월 초순,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의 명부작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단계에 접어들자 재차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소련은 특히 反託鬪爭委員會 가입단체의 협의 배제를 요청하였고,118)反託鬪爭委員會는 반탁운동의 과정에서 1947년 1월 24일 우익단체의 통합을 위해 조직되었다. 위원장으로 김구, 부위원장으로 조성환·조소앙·김성수가 선임되었다. 이승만은 최고고문으로 추대되었다(≪조선일보≫, 1947년 1월 24일·26일). 미국은 非常國民會議, 獨立促成國民會, 民族統一總本部 등 우익진영의 주요 단체들이 망라되어 있던 반탁투쟁위원회 소속단체의 배제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협의대상 단체명부의 작성이 벽에 부딪히자 미국은 상호합의를 통한 미·소공위 성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일방적 행동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은 7월 중순부터 현지와 본국에서 일방적 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119)FRUS 1947 Vol. VI,<제이콥스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7월 16일. 미국측의 이러한 행동은 미·소공위 재개 이후 두 달이 채 못된 시점에서 미국이 사실상 미·소공위 실패를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회담을 지속해 보았자 한국 내 정치세력의 협조도, 소련으로부터의 양보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도달하였다.

 미국이 일방적 행동을 결심하게 된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측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였다. 미국측 대표단장 브라운은 소련군 당국에 강력하게 요청하여 7월 1일 曺晩植과 회견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브라운은 조만식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조만식은 미국만의 신탁통치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미·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120)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브라운이 하지에게;조만식 회견기>, 1947년 7월 2일. 조만식은 이 회견에서 남한에 내려가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싶다는 강렬한 희망을 표시하였다. 브라운은 주로 북한의 상황과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에 대해 의견을 구하였고, 조만식은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미국대표단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큰 유감이라고 답하였다.121)위와 같음. 조만식은 5월 하순에도 밀사를 통해 하지에게 이승만의 반탁활동이 미·소공위 사업을 방해할까 우려된다는 취지를 전한 바 있다(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이묘묵이 하지에게>, 1947년 5월 27일). 또 조만식은 선거나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남한에도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까지 강경한 반탁론자로 알려져 있던 조만식이 이 시점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황인식을 표명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만식의 반응은 미·소공위에서 미·소가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이승만·김구진영의 반탁운동이 미·소공위의 성사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또 조만식이 신탁통치 실시 이전이라도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 것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자신의 점령정책의 취약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좌익은 1946년 봄 이래 이북의 토지개혁과 그 성과를 남한에서 미군정의 경제정책과 비교하여 남한의 민중들에게 널리 선전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고 있던 시점에서도 입법의원에서 토지개혁법안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여전히 계속되었고, 이 문제의 해결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였다.

 미국대표단의 조만식 면담 의도는 북한에도 정치적 반대자가 광범하다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반탁단체의 협의참여 문제나 미국측이 주장하던 ‘의사표현의 자유’ 원칙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조만식의 위와 같은 반응으로 미국측은 의도하던 바를 제대로 달성할 수 없었다. 또 미군정은 평양에서 귀환한 대표단원들에게 보고 들은 것과 방문소감을 빠짐없이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보고서들은 이북에는 이미 인민위원회 정권이 확립되었고, 전반적으로 정치적 통제가 완벽하다는 인상을 받았음을 지적하였다.122)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Pyongyang Trip-American Delegation, June∼July, 1947>. 일반적으로 1947년 후반이 되면 이북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해방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기조로 들어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징표로 1947년 12월 실시된 화폐개혁을 들 수 있다. 여러 경제지표를 통해 해방 이후 이북의 경제변화를 분석한 방선주,<1946년 북한 경제통계의 일 연구>(≪아시아문화≫8,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2) 참고.

 미국은 회담 이전 남한의 우익과 중간파로부터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입장은 회담이 진행될수록 더욱 난처해졌다. 미국이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 의지를 완강하게 내비치자 우익세력의 상당 부분이 협의를 신청하였고, 여기에는 이승만세력도 일부 참가하였다. 협의를 신청한 우익의 주요 단체들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臨政樹立對策協議會(이하 ‘임협’)를 구성하였다.123)臨協은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를 신청한 우익단체들의 협의체 조직이다. 협의회에 소속된 일부 단체의 반탁운동을 문제삼아 이후 소련 대표단은 이들을 협의에서 제외할 것을 미국측에 요청하였다. 臨協에 대해서는 사전트 작성,<특별보고서 7,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資料集≫12), 471∼480쪽 참고. 그리고 협의에 참가한 단체의 숫자가 남한에서는 우익이 좌익을 훨씬 상회하였지만, 정작 반탁진영의 핵심인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입장을 고집하였다.

 미국대표단은 회담 석상에서는 ‘광범한 협의’의 원칙에 따라 반탁단체를 협의에 참여시킬 것을 완강하게 고집하였고, 회담장 바깥에서는 반탁단체를 협의에 참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반탁운동의 광범한 존재를 들어 ‘의사표현의 자유’ 원칙과 반탁단체의 협의 참여를 정당화하려는 미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124)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6,<버취가 브라운에게;반탁운동>, 1947년 7월 8일. 미군정은 반탁진영의 정부수립 운동을 자신의 계획 아래 통일시키거나 회담과정에서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였다.

 미국은 미·소공위 개최기간 중 모든 정치적 집회를 금지시킴으로써 반탁진영의 노골적인 대규모 반탁운동을 적절히 통제하였다.125)미군정은 5월 17일 미·소공위 개최기간 중 모든 정치적 집회를 금지시키는 行政命令 제3호를 발표하였다. 民政長官 安在鴻의 말을 빌면, 이 조치는 임시정부 조직 협의에 어떤 단체든지 자격을 상실케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서울신문≫, 1947년 5월 20일).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안 선전은 노골적이었고, 이승만의 우익 내 위상이나 이승만의 선전내용 때문에 미군정은 그를 견제하느라 애를 썼다. 이 무렵 이승만은 전투적인 반탁구호와 미국정부 고위층의 남한단정 밀약설을 이용하여 소련, 미·소공위, 하지에 대한 반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 김구는 6월 23일, 우익 청년단체의 반탁시위와 소련대표단에 대한 投石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었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협도 협의에는 참여하고 있었으나, 반탁입장을 완전히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파 정당·사회단체가 제출한 답신서들에 나타난 중간파의 지향 역시 미국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국은 제출된 답신서를 토대로 임시정부의 조직과 구성에 관해 각 정파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미국이 답신서 분석에서 주목한 것은 중간파의 동향이다. 분석에 의하면 중간좌파는 지나치게 공산주의노선에 경도되어 있었고, 정부의 조직에서 중간파 대부분이 지명에 의한 입법기구의 설치를 원하였다. 또 개혁에 대해서는 실시시기의 선택이 문제였지, 좌익·우익·중간파의 어느 정파나 사회·경제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중간파와 좌익은 특히 즉각적인 개혁 실시를 요구하였다.126)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9, 미·소공위 미국대표단 작성,<전한국임시정부의 헌장·정강에 대한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의 답신서 분석>, 1947년 9월 30일.

 미국은 분석이 끝난 뒤 보고서의 공개를 금지하였다. 그 이유는 위의 내용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답신서의 내용들이 미국의 구상과 차이가 있었고, 공개된다면 미·소공위 회담에서 미국측에 불리하게 이용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미국대표단 간사 웨커링(John Weckerling) 준장은 답신서들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거의 전적인 이해부족을 나타내고 있고, 이것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르치려 했던 것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다.127)미·소공위 문서철, 롤번호 9,<웨커링이 브라운에게;한국인 정당·사회단체의 답신서 분석의 공개>, 1947년 10월 10일.

 협의대상 단체명부의 작성을 놓고 실랑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소련은 미군정이 남한의 우익진영으로부터 전적인 협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오히려 더욱 완강하게 반탁단체의 협의 배제를 고집하였다. 소련은 이승만에게서 떨어져 나와 협의를 신청한 우익단체들을 위협하거나 위신을 실추시킴으로써 미국측을 곤경에 빠뜨리고, 이들을 협의에서 제외하거나 최소한 우익의 발언권을 봉쇄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128)소련이 제외시키려고 한 것은 한민당 김성수의 지도하에 있는 臨協 산하의 단체들이었다. FRUS 1947 Vol. VI,<Zgcg 907, 하지가 힐드링에게>, 1947년 7월 16일 및<제이콥스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7월 16일. 반탁투위 산하단체의 제외 요청, 6월 23일의 반탁시위와 관련된 단체들의 반소행위 비난, 임협 산하단체들 중 반탁투위 연루단체들에 대해 절연 성명 요구 등을 통해 소련은 반탁단체들을 제외하기 위한 파상적 공세를 펼쳤다.

 미국은 소련의 이러한 공세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한편 7월 중순 이후 미·소공위의 결렬을 예상하면서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측 대표단은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129)미국대표단의 일원이었던 피셔는 대표단을 방문한 좌익단체 대표들에게 ‘진행중인 회의는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한국인은 애국자가 아니다, 김구나 이승만을 지지해야 한국인들의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발언하였다(<쉬티코프비망록>, 1947년 7월 18일). 미·소간 합의에 대해 기대를 버리자 미국은 이후의 회담과정에서는 자기측에서 구상하였던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제기하여 이것을 선전하고, 미·소공위 결렬 이후를 대비하는 데 보다 치중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미·소공위 결렬 이후에 취할 행동계획으로 한국문제의 4강 회부 내지 유엔 이관을 구상하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소련은 반탁단체 제외문제가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내부논쟁을 거쳐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8월 5일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소련 수석대표 쉬티코프(Штыков Т. Ф.)는 7월 말 소련측 대표단원들에게 회담 정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①협의대상 문제 해결을 수석대표와 제1분과위원회 대표에게 위임하고, 임시정부의 조직과 구성에 관한 토의를 2·3 분과위원회에서 즉각 개시하거나, ②한국인들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참모들은 이전의 입장을 고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제안 ①을 대표단 의견으로 결정하였고, 모스크바로부터 승인을 받아냈다.130)<쉬티코프비망록>, 1947년 7월 30일·31일.

 하지만 8월에 들어 미·소공위는 이미 ‘전략적 이유 외에는 더 이상의 지속노력이 무의미한 상태’에 접어들었다.131)FRUS 1947 Vol. VI,<Zurc 1071, 제이콥스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8월 26일. 이때부터는 소련도 회담 자체보다 가급적 서울에 오래 머물러 좌익에 대한 테러를 막아줌으로써 이들의 세력약화를 방지하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132)<쉬티코프비망록>, 1947년 8월 2일. 일찌감치 결렬이 예상되었지만 미·소공위가 공식적으로 결렬된 것은 10월 18일이었다. 이것은 미·소공위 결렬의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먼저 정회를 제안하지 않으려는 양측의 태도와 회담을 지속하여 좌익에 대한 탄압을 막아보려는 소련의 의도가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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