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2. 해방 이후 미·소의 점령정책
  • 3) 점령에서 분단으로

3) 점령에서 분단으로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단은 7월 중순 이후 미·소공위 결렬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이후의 대비책을 본국에 촉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하지는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소공위의 결렬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것이라면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안하였다. 하지가 제시한 방향은 “①미·소공위가 실패하면 이를 지체 없이 선언하고, 그 이후의 행동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②미·소공위 결렬 이후 신속하게 남한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GARIOA133)GARIOA 원조는 2차대전 이후 독일·일본·남한 등 미국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기아, 질병, 사회불안 등을 방지하여 민생안정과 경제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제공되었다. 이 원조는 물품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대부분이 미국 예산법 1항의 점령지역구제원조(Government Appropriation Relief in Occupied Areas)를 위한 항목에서 지출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GARIOA원조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③본 사령부의 전투부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134)하지 장군 문서철, 상자번호 1/96,<C 54133, 하지가 합동참모본부에>, 1947년 7월 18일.

 이 무렵 워싱턴에서도 미·소공위가 결렬될 것이라는 전망이 점차 지배적으로 되었고, 심지어 군부는 노골적으로 ‘한국으로부터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군부는 “미국이 보살펴야 할 것은 독일과 일본이고, 미국이 전세계에 걸친 부흥계획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35)하지 장군 문서철, 상자번호 1/96,<러취가 하지에게>, 1947년 7월 2일·7일. 일단 한국문제의 일방적 처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도달하자 미국의 대한정책 담당자들은 1차적인 목표로 남한단정의 수립, 그 처리절차로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문제의 처리절차가 아니라 단정수립 이후의 현실적 대비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국정부 내 관련 부서들로 만들어진 특별위원회는 한국문제의 처리를 위해 미국은 ①이승만과 그의 단체, ②남한선거, ③남한 임시 또는 과도정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특별위원회는 한국문제의 처리절차에 관한 세부적인 일정과 행동계획을 7월 말에 비망록으로 제출하였고, 이것은 이 시기 이후 대한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기초적 정책문서인<SWNCC 176/30, 한국에 관한 특별위원회 보고서;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136)FRUS 1947 Vol. VI,<동북아시아부 차장 앨리슨의 비망록>, 1947년 7월 29일;<SWNCC 176/30, 한국에 관한 특별위원회 보고서;한국에서 미국의 정책>. 이 보고서는 8월 4일 삼부조정위원회에 제출되었고, 8월 6일 승인되었다.

 <SWNCC 176/30>은 미국측 정책전환 방침을 공식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소공위 결렬에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이르는 세부적 일정과 처리절차를 정식화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한국문제를 전체적으로 4강대국에 다시 회부하는 것이고,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임시정부 수립방안은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 인구비례에 기초하여 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또<SWNCC 176/30>은 먼저 한반도로부터 주한미군의 조기철수는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초래할 것이므로, 주한미군 조기철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식 천명하였다. 이 문서는 그 당시 군부로부터 제기되던 주한미군 조기철수론을 일단 거부하였지만, 동시에 미국의 개입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국무부와 육군부 사이의 입장 차이를 절충하려 하였다.137)오코노기는<SWNCC 176/30>이 국무부를 중심으로 하여 추진되어 온 한국 원조계획과 육군부로 대표되는 주한미군의 조기철수 요구, 곧 ‘개입’과 ‘철수’라는 두 가지 요청의 조화를 기도한 최초의 시도였다고 평가하였다(오코노기 마사오,≪한국전쟁-미국의 개입과정≫, 청계연구소, 1986, 18쪽).

 이 문서는 남한에서 미국의 지위가 불안하므로 이를 만회할 수 있는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재차 확인하였다. 미국은 적극적 정책의 한 표현으로서 이전부터 남한에 대한 원조확대를 계속 주장하였지만,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라는 정치적 처리방침의 변화 속에서도 원조의 필요성은 계속 지적되었다. 오히려 원조의 확대는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과 남한단정 수립으로 초래될지도 모를 정치적 불안정성을 완화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 문서는 점령지역 구제 원조 이상의 적극적인 경제부흥 원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이 문서는 또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라는 정책전환이 점진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한국 내에서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이 야기하는 혼란이 이러한 점진적인 정책전환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미국이 미·소공위를 결렬시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게 회담성과가 없더라도 당분간 회담을 지속할 것과 미·소공위 결렬시 미국에게 쏟아질지도 모를 국제여론의 비판이나 한국 내 정치세력의 반발을 최소화시키도록 담당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의미가 있었다.

 특별위원회 방침에 대해 미국정부 내에서는 물론이고 미군정에서도 원칙적으로는 반대가 없었다. 1947년 7월 중순 이래 미국의 미·소공위 결렬방침은 확고하였고, 미국은 위의 행동계획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미국은 8월 26일 소련을 비롯해 영국·중국에<한국에 관한 미국의 제안>을 보냈다.138)FRUS 1947, Vol. VI,<국무장관대리가 주소 미국대사관에>, 1947년 8월 26일 및 첨부<한국에 관한 미국의 제안>. 소련은 미국이 소련을 포함한 다른 관련국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과 미국의 제안이 남·북에 별개의 입법기구 수립을 상정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한국을 분단시킬 것이라는 점을 들어 미국이 제안한 4대국 회의에 불참할 것을 통보하였다.139)FRUS 1947, Vol. VI,<소련외상 몰로토프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9월 5일. 미국은 소련의 거부를 예상하였고, 이미 소련이 거부의사를 밝혀오기 이전부터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140)FRUS 1947, Vol. VI,<러빗이 제이콥스에게>, 1947년 9월 2일. 미국은 8월 27일 한국문제의 유엔 제출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조를 결정하였다.141)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 점령지역차관보 살츠만이 삼부조정위원회 의장에게 보내는 비망록>, 1947년 8월 27일. 앨리슨이 작업조장을 맡았다. 작업조에는 국무부를 중심으로 육군부·해군부가 참여하였다. 미국은 유엔에서 한국문제의 결정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독자적으로 남한에 독립을 부여하게 될 가능성도 아울러 고려하였다.142)740.00119 Control(Korea),<국무부 전문 1684, 국무장관이 제이콥스에게>, 1947년 8월 29일.

 미국은 9월 중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143)미국은 9월 16일 소련에게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알리는 서한을 발송하였다(FRUS 1947, Vol. VI,<국무장관이 주소대사에게>, 1947년 9월 16일). 그리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었을 때에는 이미 미국이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대해 소련이 거부할 것이 확실했으므로, 이것은 사실상 미국이 단정안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였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은 모스크바결정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곧 모스크바결정의 이행을 전제로 남과 북에 주둔해 있던 미·소 양군의 점령 근거가 사라짐을 의미하였다. 한국문제 유엔 이관으로 미국은 미군 주둔의 명분을 새로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 대한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 새로이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때의 철군논의는 이제 정책대안의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철군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남한점령을 대신할 현실적 대비책을 마련하는 차원으로 바뀌었다.144)이 논쟁은 1948년 4월에 가서 양자를 절충하는 형태로 재정리되었다.<NSC 8,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해방 이전부터 견지되었던 ‘소련의 한반도 지배는 극동에서 미국의 지위와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평가를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미국이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에 개입될 위험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FRUS 1948, Vol. VI, 1163∼1169쪽). 또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함에 따라 점령 종식의 형식적 근거, 철수의 시점, 철수의 구체적 절차나 방법을 현실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논의가 진행 중이던 9월 26일, 소련이 양군 동시철수안을 제안함으로써 철군논의는 어떻게 한국에서 ‘명예롭게 철수’하느냐 하는 명분 찾기와 점령을 대신할 실질적인 대안 찾기의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는 소련의 동시철군 제안을 “우리가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감내하기 힘든 선전책동이다. 그것은 광범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고,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약소국들의 지지를 보다 광범하게 얻어내기 위한 시도”였다고 평가하였다.145)<사관기장>, 1947년 9월 30일(졸편,≪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1, 313쪽). 하지의 파악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철수는 아시아의 민족운동을 소련측에 넘겨버리는 것”이라는 국무부 관리의 우려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146)FRUS 1947, Vol. VI, 784∼785쪽. 그것은 약소국의 점증하는 민족운동이 소련이 지향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가치와 결합하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소련이 동시철군을 제안하자 브라운은 소련이 제안을 발표한 바로 이튿날, 소련이 미·소공위 협의대상 문제에 관해 미국측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한 미·소공위 재개나 소련 제안을 거부할 것이라는 반박성명을 발표하였다.147)≪조선일보≫, 1947년 9월 28일. 미군정은 소련 제안을 ①한국인들에게 반미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②유엔총회 통과를 저지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현혹시킬 목적에서, ③미국 내 의회나 다른 그룹들에 철수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분석하였다. 소련의 선전방향을 잘 요약해 놓고 있다(740.00119 Control(Korea),<Zpol 1200, 주한미군 사령부가 국무부에>, 1947년 9월 28일). 그리고 미국은 점령종식 문제를 유엔의 결정에 연계시킴으로써, 미국측 해결방안의 틀 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148)FRUS 1947, Vol. VI,<극동국장 버터워스가 국무차관 러빗에게>, 1947년 10월 1일.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은 전후 한국문제 해결의 주된 당사자로 간주되었던 소련을 미국 주도하의 4강 구조에 묶어놓지 못하는 이상 미국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자 미래의 행동의 자유를 위한 보장책이었다.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방침이 정해지자 미국은 모든 문제를 유엔의 심의와 결정에 연계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1947년 가을, 미국의 유엔대표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동안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남한의 상황에 맞게 유엔의 결의를 유도해 내는 한편 미군정의 견해를 최대한 반영하여 일을 신속하게 마무리지으려고 노력하였다.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것은 소련의 의사를 무시한 일방적인 행동이었고, 이 단계에서 미국이 내건 ‘통일된 독립 한국’의 수립이라는 정책목표가 온전히 실현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또 미국은 소련의 동시철군 제안 의도가 점령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외교적 대응 이상의 구체적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단정수립을 위한 대응책 모색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47년 8월과 9월에 각각 한국을 방문한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사절단의 활동과 이들이 남긴 보고서이다. 웨드마이어는 대통령 특사의 자격으로 중국과 한국을 방문하였다. 웨드마이어의 주된 임무는 미국의 對中國 원조 확대 여부를 결정하기 이전에 중국상황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다.149)웨드마이어 사절단이 구성되는 배경과 활동, 이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 등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William Stueck, The Wedemeyer Mission: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Athens, Georgia:The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참고. 웨드마이어는 태평양전쟁 중 중국전구 사령관으로 근무한 바 있고, 군대에서는 주로 전략기획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드레이퍼는 육군부 차관으로서 점령지역의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였다. 드레이퍼의 주된 방문목적은 당시 맥아더가 일본에서 준비 중이던 재벌 해체 계획이 지나치게 철저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150)Howard B. Schonberger, Aftermath of War;Americans and the Remaking of Japan, 1945∼1952(Kent, Ohio:The Kent State Univ. Press, 1989), 161∼197쪽. 월가 출신의 드레이퍼는 전후 일본 점령정책을 ‘민주화와 개혁’에서 ‘재건’으로 ‘역전(reverse course)’시킨 장본인의 하나로 꼽힌다.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한국에 관한 내용은 전반적으로 미군정의 활동을 합리화해 주고, 남한단정 수립에 대비해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내부적 정비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즉, 이 보고서는 대한정책이 실패한 이유를 1차적으로 소련의 외부적 방해, 2차적으로 남한 내부의 정치적 혼란에서 구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대한정책은 남한에 대해 독자적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對韓원조 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이승만 등 극우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원조를 위한 사전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중국에 관한 보고서가 국민당정부의 협소한 대중적 기반이나 테러정책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원조 확대를 촉구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151)한국에 관한 보고서의 전문은 FRUS 1947, Vol. VI,<1947년 9월 웨드마이어 중장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중국·한국에 관한 보고서>, 1947년 9월 19일 참고.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상대적으로 정치분야에 강조점을 두어 조사활동을 벌였다면, 드레이퍼 사절단은 상대적으로 경제분야에 강조점을 두어 조사활동을 벌였다. 웨드마이어와 드레이퍼의 아시아 방문의 초점은 중국과 일본이었지만, 이들의 방한은 대한정책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의 내부사정은 물론 동북아 정세에 정통한 편이었고, 대통령 특사라는 자격이 그의 방문에 무게를 더했다. 또 드레이퍼는 육군부에서 사실상 대한정책을 총지휘하는 인물이었다.152)하지 장군 문서철, 상자번호 1/96,<버틀러가 하지에게>, 1947년 11월 19일. 워싱턴의 당국자들은 이들의 방한을 단정안이 현실화될 때를 대비한 사실수집과 사전조사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하였다.153)앞의<SWNCC 176/30>, ‘권고사항’ f항.

 미군정 역시 웨드마이어와 드레이퍼의 방한을 남한의 상황과 자신의 견해를 상부에 전달하고, 또 확고한 조치를 촉구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군정은 양 사절단을 위해서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또 미군정은 사절단의 방한기간은 물론이고 방한을 전후하여 이들에 대한 남한 내 여론동향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154)하지는 웨드마이어에게 제출할 보고서들의 작성방향을 지시하였고, 작성된 보고서들을 직접 검토하였다(군사실 문서철, 상자번호 44,<McGray의 회의비망록>, 1947년 8월 19일). 또 미군정 정보당국이 조사한 한국의 정세와 여론동향에 대해서는 군사실 문서철, 상자번호 44,<웨드마이어 장군 방한에 즈음한 G-2의 정세평가>및≪주간정보요약≫97·101·102호 참고. 한마디로 이들의 방한은 미·소공위 결렬을 앞두고 워싱턴과 서울 사이에서 이후의 점령정책 전반을 최종 조율하는 역할을 하였다.

 웨드마이어는 방한 중 미군정 관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인들과 광범한 접촉을 가졌다. 그의 방한활동은 국내정치적 측면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미 웨드마이어가 방한하기 이전부터 이승만은 웨드마이어가 하지를 견책하러 오는 것이고, 트루만이 이승만에게 보내는 개인사절이라는 선전공세를 펼쳤다.155)740.00119 Control(Korea),<주한미군사령부가 국무부에>, 1947년 8월 11일. 이승만의 선전공세는 웨드마이어의 방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책동의 일환이었다. 이는 웨드마이어의 정치적 성향이나 워싱턴의 파견의도로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소공위 결렬조짐이 점차 뚜렷해짐에 따라 이승만측은 미군정과 관계개선을 서둘렀고,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의 로비스트들은 웨드마이어의 방한을 미군정과 화해하는 하나의 계기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이승만에게 미군정과 협조를 위해 웨드마이어를 끌어들이라고 충고하였다(하지 장군 문서철, 상자번호 1,<러취가 하지에게 보내는 편지>, 1947년 7월 16일). 다른 한편으로 미군정도 웨드마이어의 방한을 한국언론에 널리 선전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술변화를 위장하는 데 이용하였다. 즉 미국은 웨드마이어 사절단의 공식 방한목적이 한국에 대한 원조계획의 연구라고 천명함으로써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려는 미국측 의도를 숨기는 데 이용하였다.156)740.00119 Control(Korea),<Zgcg 1033, 하지가 국무장관에게>, 1947년 8월 17일.

 웨드마이어는 방한 중 이승만은 물론 김구·김성수 등 우익 정치가들과 김규식·안재홍 등 중간파 정치가들을 주로 면담하였다. 웨드마이어는 허헌 등 좌익 지도자들과도 면담을 시도하였으나, 좌익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을 문제삼아 나타나지 않았다. 또 좌우를 막론하고 각 단체들은 웨드마이어를 향해 자기 정파의 정치적 계획과 건의내용을 선전하고, 조직적 세를 과시하는 데 분주하였다.

 대체로 우익이 총선을 통한 남한 단정수립, 신탁통치 반대, 미국의 군사·경제적 원조 등을 주장하였다면 좌익은 모스크바결정의 정확한 실시, 경찰과 우익단체의 백색테러 엄단, 군정 내 친일파 처단, 토지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또 중간파는 분단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157)웨드마이어 장군 문서철, 상자번호 10·11에 나타나는 개인·단체들의 건의내용과 편지 참고. 각 정치세력의 주장과 활동으로 보건대 이들은 웨드마이어의 방한목적을 미·소공위 정돈 상태 이후 미국이 취하게 될 새로운 대한정책의 입안과 이후 미국의 남한정치에 대한 대응책 마련과 결부시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귀국한 뒤 웨드마이어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미국이 철군하지 않고 남한에 대한 지원정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제시하였다. 웨드마이어는 그 근거로 한국에 대한 지원의 중단은 소련의 한국 지배를 의미하고, 이는 인근 일본이나 중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58)앞의<1947년 9월 웨드마이어 중장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중국·한국에 관한 보고서>. 이러한 평가와 주장은 웨드마이어 자신의 견해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웨드마이어는 이후에도 이러한 평가를 거듭하였는데, 그가 귀국 이후 곧 군부의 핵심적 기획집단인 육군부 작전기획국장에 취임한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소홀히 할 수 없다.

 미군정은 웨드마이어·드레이퍼와 회의에서 조기철군 반대의사를 거듭 밝혔고, 오히려 최소한 5년간 점령 연장과 그 기간 중 적극적인 군사·경제 원조를 요청하였다. 미군정은 대응책이 확보되지 않는 한 철군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동시철군을 제안해 놓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이 무한정 점령을 지속할 수는 없었고, 미군정은 철군 이후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은 철군 이후 국내의 정치적 대결이 군사적 대결구조로 전환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일단 남과 북에 분단정권이 수립되면 한국인들 내부에서 재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강력하게 분출될 것이고, 그것은 군사적 대결까지 불사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 미군정의 판단이었다.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이러한 인식에서 남한의 군사력 증강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미국은 당장 1947년 10월부터 군사력 증강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육군부는 10월 중순 남한 군대의 육성에 관한 미군정의 견해를 구하였고, 하지는 적절한 장비만 주어진다면 1년 안에 이북의 군사력에 대항할 만한 남조선 군대를 육성할 수 있으리라는 대답과 함께 자세한 편제·훈련 계획을 보냈다.159)맥아더사령부 전신철, 상자번호 3,<W 88572, 육군부에서 맥아더사령부 경유 하지 장군에게>, 1947년 10월 17일;<Tfgcg 1293, 하지 장군이 육군부에>, 1947년 10월 21일. 하지는 처음 병력 10만 수준의 육군 창설을 요청하였으나, 1948년 3월 최종적으로 경비대를 5만 명으로 증원하고 이들에게 중무장 보병 형태의 무기를 제공하기로 결정되었다.160)맥아더사령부 전신철, 상자번호 3,<Cx 58437, 하지 장군이 맥아더사령부 경유 육군부에>, 1948년 2월 6일;<Warx 97886, 육군부에서 하지 장군에게>, 1948년 3월 10일.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한국인들 나름의 경비대 증원이 진행 중이었고, 그 수가 5만 명에 육박하였다(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KMAG in Peace and War, Washington, D.C.;OCMH, Dept. of the Army, 1962, 29∼30쪽).

 정치적 측면에서는 국내의 정치정세, 각 정치세력의 활동상과 이후 활동방향, 이들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이 논의되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은 미·소공위의 성사 가능성과 지속 필요성 여부를 현장에서 최종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 회의에서는 좌우합작 및 중간파에 대한 현실적 평가에 논의가 모아졌다. 그런데 드레이퍼 사절단에 와서는 이후 이승만의 역할과 현지에서 생각하는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 이후 해결책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양 사절단의 방문 사이에는 불과 한 달이라는 시간차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논의의 중심이 변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것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이승만을 권력의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는 웨드마이어와의 회담에서 이승만 일파가 한국인 중 상당수를 통제하고 있고, 미국이 남한에 남아있는 한 이승만의 미래의 이용가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적 불화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는 “그들은 반공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선거가 시행되면 권좌에 앉게 될 것이고, 그들은 행정적 능력은 없지만 조금만 자제시킬 수 있다면 미래에 이들을 승부수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드레이퍼와 회의에서도 중간파 지원정책이 철회되었을 때, 남한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지탱해 줄 정치지도자로 이승만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드레이퍼 방한 이후 중간파와 우익의 김구세력까지 동시철군안을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삼는 상황에서 이제 미국에게는 이승만을 자제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고립과 불안정성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우익의 분열상, 좌익측의 반대활동으로 이승만 정권은 출발부터 극히 취약할 것이고, 그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정치세력과 조화로운 연합보다는 정적을 배제시키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그 수단은 반공드라이브 정책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익히 예상하였다.161)“P” File,<Intelligence Memorandum 66, Rhee Syngman and the Post-election Period in South Korea>, 1948년 5월 9일. 더하여 미국은 남한이 정치적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은 남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이 정권에 대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군사·경제 원조뿐이라고 생각하였다.162)“P” File, CIA<ORE 15-48 The Current Situation in Korea>, 1948년 3월 18일;CIA,<ORE 44-48 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1948년 10월 28일.

 하지는 웨드마이어 사절단의 방문에 대비하면서 자세한 경제상황 보고와 건의안을 준비하였다. 또 드레이퍼 사절단과는 경제적 대응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미국측 상황분석 보고서들이 인정하듯 경제적 궁핍은 대중들의 태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정치적 동기보다 심각한 요소였다. 당시 남한의 경제상태에 대해 점령군 당국자는 미군이 철수하면 “남한은 2개월 이내에 우마차경제로 돌아가고, 900만 명의 인구가 기아상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163)740.00119 Control(Korea),<동북아시아부 존 윌리암스의 비망록>, 1948년 2월 4일. 드레이퍼가 돌아간 직후부터 미군정 경제전문가들이 워싱턴에 장기간 체류하며 당국자들과 구체적인 원조계획을 논의하였다.

 원조를 둘러싼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군사원조는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예방수단으로 여겨졌다. 1948∼1949년에 실시된 원조는 주로 군사력 확대와 구호와 관련된 것이었고, 진정한 경제적 자립과 안정 추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권의 안정과 새로운 정책수립의 융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의 확보가 이 시기 경제원조 계획의 핵심이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의 방한 이래 미국이 추구한 대남한 정책의 방향은 남한 군대의 육성과 강화, 경제원조의 확대, 남한 내 정치적 혼란의 수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군대 육성과 원조 확대는 미군정이 이전부터 주장하던 것이었고,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피하게 된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1947년 가을부터 군대 육성과 원조 확대를 위한 내부적 조정과 실무적 준비가 미국측 대한정책 담당자들의 과제가 되었다.

 미국이 독자적인 대남한 정책을 준비하면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남한내 정세의 불안정성이었다. 이와 같은 불안정한 정세는 주로 경제적 피폐와 정치적 불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측 남한 단정안의 주요 지지세력은 이승만·한민당 계열이었다. 그러나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국인들 내부에서 한국문제의 자주적 해결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이승만·한민당세력의 정치적 고립은 심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측 내부에서는 군대 육성과 경제원조가 모두 남한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였다.

 미국은 점령 이래 신정부의 수립방안을 선도적으로 제시하였고, 이러한 정부수립 구상에 한국 내 정치세력을 포섭함으로써 자신의 대한정책을 관철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한국에서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과 광범한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1946년 이래 미국은 중간파를 활용하여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전한국임시정부 수립의 전제로 남한과도정부를 설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과도정부안에 대해 좌익·우익·중도파 어느 정치세력으로부터도 전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미국은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남한 단정안의 현실화라는 전반적인 정세변화 속에서 오히려 중간파의 이탈과 남한 내 정치적 기반의 축소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47년 후반 이후 미국에게는 남한 단정 수립이 가져올 내외의 반대를 무마시키고,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현실적 조치의 마련이 점령정책의 목표가 되었다.

<鄭容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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