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 (2) 해방정국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2) 해방정국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해방이 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그동안 금지당했던 정치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정책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없었던 한민족은 해방으로 정치공간이 열리자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이념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직후 정치활동을 전개한 주요 정치세력으로는 金性洙·宋鎭禹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세력, 呂運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세력,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해방과 함께 해외 즉 중국·소련·미국으로부터 입국한 정치세력과 이합집산하면서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이들 정치세력 상호간에는 국가건설의 기본방침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여기에 외적 요인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매개 변수가 작용하여 갈등은 한층 더 극대화되었다. 이들 중에서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조직화된 것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建國準備委員會였다.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지만, 대다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갖지 못하고 관망 상태에 있었다. 이는 일제의 가혹한 사상 탄압과 보도 통제로 인하여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인사들까지도 정세의 변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이 해방정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신속하고 유리한 입장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식민통치하에서 그가 전개한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지만, 해방 1년 전에 그가 비밀리에 결성한 朝鮮建國同盟 때문이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에 여운형·趙東祐 등이 조직하였는데, 뒤에 李如星·金世鎔·李萬珪·李相佰 등이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 상당수의 조직원을 갖고 있었다.168)홍인숙,<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2, 한길사, 1987), 57∼71쪽.

 태평양전쟁에서의 참패와 원폭투하 소식을 접하면서 항복이 임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귀국과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이 통치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총독부당국은 여운형에게 이를 다시 요청하였다. 총독부가 자신들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여운형에게 항복 후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은 여운형이 조선의 청년·학생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항복이 공표되었을 때, 조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여운형이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라고 총독부 관리들은 판단하였다.

 8월 15일 아침,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로부터 일본 패망 후 치안권과 행정권을 위촉받은 여운형은 ①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②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해 줄 것, ③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④학생과 청년을 훈련·조직하는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⑤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동원·조직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169)이만규,≪여운형선생 투쟁사≫(총문각, 1946), 188쪽.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총독부는 여운형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여운형은 즉각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여운형과 그의 측근 인사들은 8월 15일 오후에 조직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17일에 여운형을 위원장, 安在鴻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이어 8월 26일에는 건국사업의 방향을 나타내는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날 발표된 선언의 요지는, “건국준비위원회는 한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준비기관이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각 계층의 인민에게 완전히 개방된 기관으로, 반동적 반민주세력과 투쟁하여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강령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한다. 둘째,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정권의 수립을 기한다. 셋째,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한다.170)송남헌,≪한국현대정치사≫제1권:건국전야(성문각, 1980), 71∼72쪽.

 여운형은 해방 전에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그리고 일제의 항복직후 석방된 정치범과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건국을 준비해 나갔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지지가 급격히 확산되자,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확대 정비하였다. 8월 31일, 건국준비위원회는 12부 1국의 체제를 갖추어 준정부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었다.171)구성원들의 이념적 성격과 일제하의 활동경력에 대해서는 홍인숙의 앞의 글을 참조할 것.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은 지방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어, 8월 말에는 건국준비위원회지방지부라는 명칭을 가진 조직이 전국적으로 145개에 이르렀다.172)건국준비위원회 지방조직에 관해서는 안종철,≪광주 전남 지방현대사 연구≫(한울출판사, 1991)을 참조할 것.

 건국준비위원회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준비하는 과도적 조직체임을 표방하고, 반민족적·반민주적 세력을 제외한 전 민족의 통일체를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세력(한민당 계열)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극좌세력(조선공산당 계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나 균등의 원칙을 존중한 중도 우파세력(안재홍의 국민당계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정하는 중도 좌파세력(여운형의 인민당 계열)”을 모두 참여시켰다. 여운형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던 정치세력들을 한 곳으로 규합함으로써, 국가건설을 위한 좌우균형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것이다.173)건국준비위원회 조직 구성원들의 해방 이전의 활동경력이나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홍인숙, 앞의 글 및 전용헌,<해방이후 좌파세력의 정치조직과 정치노선>(≪한국현대정치론≫1, 나남, 1990)을 참조할 것.

 이러한 의도에 따라 건국준비위원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초기의 조직이 급박한 상황에서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다면, 중기의 조직은 보다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활동가들을 기반으로 한 조직이 되었으며, 후기의 조직은 미군의 진주가 임박해지고 우익세력들이 점차 세력을 규합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서 탈퇴함에 따라 보다 좌익적 성격이 강한 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참여인사들은 그들이 추종하는 이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지만 조직적 측면에서는 12부 1국이라는 상당히 체계화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영향력은 확대·강화되었으나, 전국유지자대회의 문제, 건국준비위원회 조직과 운영상의 문제에서 여운형과 안재홍간에 견해 차이가 나타남으로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간부들이 조직의 방침과는 다르게 독단적 행동을 함으로써 조직내의 분열을 초래하였고,174)송남헌, 앞의 책, 73∼74쪽 참조.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어 국민들의 여망이었던 건국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건국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4일 조직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새로 구성된 3차 조직의 인적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여운형, 박문규 부위원장:안재홍175)안재홍은 명목상의 부위원장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사퇴한 형편이었다., 許憲 총무부:崔謹愚, 全奎弘 조직부:李康國, 李相燾 안전부:이여성, 梁在廈 치안부:崔容達, 劉錫鉉, 鄭宜植, 張權, 李丙學 문화부:咸秉業, 李鍾洙 건설부:尹亨洙, 朴容七 조사부:崔益翰, 高景欽 양정부:李珖, 李貞求 후생부:鄭求忠, 李圭鳳 재정부:金世鎔, 吳載一 교통부:金炯善, 權泰彙 기획부:朴文圭, 李舜根 서기국:崔星煥, 鄭處黙, 鄭和濬

 그러나 여운형의 이와 같은 이상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였다. 정치세력간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차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출되고 증폭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 이합집산이 가속화되었다. 일제의 항복 직후 정세를 관망하던 우익세력들은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면에 일사불란해 보이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내부적 균열을 겪게 되었다. 안재홍 등 우익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초계급적 협조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기적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경화되어 간다”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초기와는 달리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국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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