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대립
  • (4) 신탁통치 문제와 좌우의 갈등

가. 좌익세력과 찬탁논리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반탁운동이 해방정국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세력은 어떤 성명을 발표하거나 행동을 감행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해 나가고 있었던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190)≪서울신문≫, 1946년 1월 1일. 12월 31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게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의하였다.

 좌익세력을 대변하고 있던 중앙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동시에 해체하고 단일정부의 창설을 요구하고 있었고, 민족통일에 대한 문제는 통일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주장하면서 1946년 1월 2일 오전 10시까지 대답을 요구하였다. 임시정부측은 송부된 공문이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 명의로 되어 있어, 서식상 접수키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송해 버렸다.

 이 내용을 보면 1월 2일 오전 10시까지 회답을 요구하는 시한부로 임정에 제의하여 국민의 관심을 좌우합작 통일정부 수립으로 돌리려 하고 있고, 신탁통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구 중심의 임정측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를 동등한 자격으로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고 볼 수 있다.191)≪서울신문≫, 1946년 1월 2일.

 해방정국의 큰 쟁점이었고 분단고착화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좌익측이 반탁 입장을 최초로 공식적 반응으로 보인 것은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가 발표한 다음의 신탁통치안 철폐 요구성명서에서였다.

미국 극동부 책임자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같은 사람은 공공연하게 조선을 신탁 관리할 것이라 말하였고, 국내의 소수 매국매족적 반동분자들은 여기에 영합하여, 혹은 당분간 군정기가 필요하다고 하고, 혹은 3년 후가 아니면 독립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반동분자들의 신탁통치는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다. … 통일은 저해되고 따라서 신탁통치를 받는 결과에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이 신탁의 철폐를 위해서는 이 민족통일전선을 좀더 공고하게 결성하여야 할 것을 또다시 제창한다(≪서울신문≫, 1945년 1월 1일).

 그런데 좌익측이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 입장을 보인 것은 1946년 1월 2일이다. 다시 말하면 1945년 10월 20일 빈센트 발언 이래 12월 28일 모스크바협정 발표 후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협정 지지를 공식으로 표명한 1월 2일까지는 신탁통치 반대라는 점에서 좌·우 양파가 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반탁 일변도의 정국 흐름에서 1월 2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정국을 진전시키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1. 8월 15일을 계기로 한 조선 해방은 우리의 힘이 아니고 세계 민주주의 연합국의 용감한 군대의 힘으로 된 것이며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위대한 역사적 단계였다.

2. 3상회담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정권 수립과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달을 원조하여 조선의 완전 독립을 전적으로 완성하여 세계 문명국가의 지위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 진전이다.

3. 이 결정은 現下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조선 국내 정세에 비추어 조선민족의 이익을 존중하는 가장 적절한 국제적·국내적 해결이며 세계의 평화 유지와 인류의 민주주의화에 최적한 결정이라고 확신하여 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① 모스크바 3상회담의 진보적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 연합국과 같이 조선의 민주주의정부 결정의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민주주의 제국의 원조와 협력에 의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적 문명국가의 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하여 투쟁을 약속함.

② 전 조선 인민 각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담의 완전한 실천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하며…

③ 각 인민위원회와 諸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는 본 결정을 민족 대중에게 이해 보급시키며 나라를 사랑하는 전 인민은 본 결정을 깊이 인식하고…(≪朝鮮日報≫, 1946년 1월 4일).

 또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이다. … 臨時的 조선 민주주의정부를 조직한다는 同 건의문에 있어서 이러한 국제적 결정은 今日 조선을 위하여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한다(≪中央日報≫, 1946년 1월 3일).

 좌익계열의 성명 내용을 보면 당시 반탁 열기를 반영하듯이 국민 감정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듯 신탁이라는 말 대신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이라는 말로써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찬탁이라는 말 그 자체가 민중의 감정에 반하는 것이었고, 당시 좌익세력은 기본적으로는 소련 점령군의 노선에 따르고 있었으므로 신탁통치에 대한 공산당으로서의 공식적 태도도 소련 점령군의 견해가 분명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월 2일에서야 그들은 보다 분명한 찬탁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렇다면 좌익측이 그러한 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정국의 두 주역이 미국과 소련임이 분명하고 냉전 논리가 국제 정치의 현실 속에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기인 것을 고려해 본다면 우선은 소련과의 어떤 관계 혹은 영향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192)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인 박헌영은 평양에 송환되어 소련측으로부터 신탁 지지 지령을 받고 1월 2일 서울에 귀환,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중앙위원들의 반대를 꺾고 찬탁노선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金南植,≪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250∼251쪽).

 좌익과 우익 어느 한 세력이 해방정국의 장을 좌우할 정도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음도 좌익세력 중 어느 개인 집단이 설사 한민족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반탁 의사를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 정치 속에서 구현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해방정국은 각 정파의 이합집산 주도권 쟁취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정치세력이든 당시 반탁의 분위기에 반하는 논리의 성명서나 입장을 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좌익세력의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태도 변화는 해방정국 어느 정치세력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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