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3) 이승만

(3) 이승만

 식민지시기의 대부분을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이승만은 8·15 직후 국내에서의 활동을 위해 조기 귀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한인 독립운동단체간의 갈등으로 인하여250)고정휴,<제2차 세계대전기 재미한인사회의 동향과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국사관논총≫49, 국사편찬위원회, 1993) 참조. 미국무부는 이승만의 귀국비자를 쉽게 내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8·15 직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던 미국의 국방부 관계자들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은 입국과정에서 일본에 있었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과의 회합을 추진하였다. 소련과의 타협을 통한 한국문제의 해결보다는 강력한 반공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맥아더 사령관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251)정병준,<해방직후 이승만의 귀국과 동경회합>(≪한국민족운동사연구≫, 우송조동걸선생 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7) 참조.

 이승만은 귀국에 앞서 동경에 들려 맥아더 및 주한미군정 사령관이었던 하지(John R. Hodge)와 회합을 가졌다.252)우남실록편찬위원회,≪우남실록≫(1976), 56∼58쪽. 이 자리에서는 38선 이남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승만은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치세력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하고자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은 한국 내에서의 이승만의 명망을 이용하여 좌익세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하고자 하였다.253)도진순, 앞의 책, 42∼45쪽. 이것이 1945년 10월 중순에 계획된 ‘한국인민행정위원회(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이하 행정위원회)’ 계획이었다.254)<주일 정치고문(앳치슨)이 국무장관에게(1945년 10월 15일)>(김국태 역, 앞의 책), 104쪽. 행정위원회 계획은 동년 11월 중순 하지의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는데, 이 시기에 계획의 핵심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의 임시정부였다(<주한 정치고문(랭던)이 국무장관에게(1945년 11월 20일), 김국태역, 같은 책, 150∼153쪽).

 동경회합을 마치고 이승만이 귀국한 것은 1945년 10월 16일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지 두 달만이었지만, 임시정부보다 한 달 이상 먼저 귀국하였다. 이승만의 귀국은 38선 이남의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승만은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이후 YMCA·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익의 모든 정치세력들은 이승만을 자신들의 정당이나 단체에 정치적 지도자로 모시고자 하였다. 후에 상당한 비판을 받았지만, 좌익을 대표하고 있었던 인공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에 이미 그를 인공의 수반으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어떠한 정당·단체에 가입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국내에 뚜렷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특정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가입할 경우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물론 식민지시기 국내에 興業俱樂部를 중심으로 하여 이승만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255)정병준,≪이승만의 독립노선과 정부수립운동≫(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1), 133∼169쪽. 8·15 직후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인사들만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정치활동보다는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자신이 맥아더 장군과 하지 장군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256)이승만이 귀국 직후 했던 주요한 발언들에 대해서는 도진순, 앞의 책, 44쪽 참조. 이것은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까지도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채택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좌우익을 아우르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이승만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전략은 미군정의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이승만은 곧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협의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은 당시 그가 추진하고 있었던 정치조직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조직을 군정부에셔는 초조히 고대하고 있음니다. … 군정부에셔 이 회의에 대하야 바라는 것은 대내·대외관계에 있어셔 이 기관을 경유하계 하야 이 기관을 권위있계 하자는데 있음니다. … 정부가 승인될 때까지의 과도기관으로 설립되여 가지고 민의를 대표하도록 되는 것을 군정당국이 갈망하고 있는 것임니다. … 輓近 개최될 모스크바(莫斯科)의 각국 외상회의 관계가 우리의 문제에 심대한 것이 있는데 이 회의의 구성이 지연되여 유감이나 힘써 速進하도록 합시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록-1945년 12월 15일>,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 서울대 출판부, 1997, 49쪽에서 재인용).

 이승만은 미군정의 후원을 등에 업고 일개 정당보다는 많은 정당·사회단체들이 소속되어 있는 연합체를 주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이미 국내에서 진행 중이었던 정계통합의 노력을 이용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정치세력들의 통합을 위한 조직으로 ‘各政黨行動統一委員會’가 조직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건국동맹·국민당·한민당·조공 등 당시의 대표적인 좌우익정당·사회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단체를 모체로 하여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 대표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大韓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결성하였다.257)≪매일신문≫, 1945년 10월 25일.

 독촉중협은 명실상부한 좌우익의 정당·사회단체들을 모두 포함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출발부터 몇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독촉중협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첫 번째 문제는 親日派의 처리와 관련된 문제였다. 조공과 건국동맹 등 좌익세력들은 독촉중협의 조직에 친일파를 참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웠다. 식민지시기부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친일파 문제와 관련하여 조공과 갈등이 일어나자 反共에 뿌리를 둔 자신의 정치노선을 공개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하였다.258)귀국 초기에는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하등의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좌익세력까지도 아우르는 정치조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조공은 독촉중협에서 탈퇴하였고,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연설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신념을 발표하였다.259)≪자유신문≫, 1945년 11월 8일. 11월 말 건국동맹의 후신인 조선인민당이 독촉중협에서 탈퇴하자, 독촉중협은 좌익을 모두 배제한 우익 정치세력만의 단체로 전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는 이승만이 귀국 이후 뚜렷한 정치노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동단결론’과 ‘반공’은 그가 내세운 정치노선이었는데, 이것은 많은 정치세력으로부터 비난받을 소지를 가지고 있었다. “국토분단이라는 국난을 앞에 놓고 38선이 더 굳어지기 전에 민족이 하나가 되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외투쟁을 벌이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는 이유였지만,260)이인수,≪대한민국의 건국≫(촛불, 1988), 58쪽. 8·15 직후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친일파 문제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결집을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8·15 직후 많은 대중들이 좌익의 정치노선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공’을 축으로 한 그의 신념 역시 정치세력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261)구한말 이래로 이승만은 기독교국가 건설, 민주공화제정부의 수립, 반공보루의 구축, 평등사회의 실현 등의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유영익,<이승만의 건국사상>,≪한국사 시민강좌≫17, 일조각, 1995). 그러나 8·15 이후의 정치활동 속에서는 반공사상이 가장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좌익세력들이 탈퇴하면서 1차적인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귀국으로 2차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승만의 명성 못지않게 임시정부는 당시 한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익 정치세력들은 좌익의 인공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의 추대’를 공식적인 정치노선으로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익 정치세력들이 독촉중협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공식적인 정부로 추대하기 위한 정치노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독촉중협이 출발 단계에서부터 전체적으로 정치세력들을 포괄하거나, 좌익세력들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못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임시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상황이었다.262)<주한 정치고문(랭던)이 국무장관에게(1945년 11월 20일)>(김국태 역, 앞의 책, 150∼153쪽). 이 전문에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재편계획을 내놓았다.

 임시정부가 귀국한 11월 말 이후 이승만은 정치적인 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독촉중협은 정치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에 임시정부를 포괄하고자 하였지만, 임시정부는 독촉중협과의 연합보다는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인정받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인공의 제의에 의해 인공과의 합작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 내의 중도파세력들은 독촉중협의 활동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하였다.263)이승만의 반공노선을 비난한 것은 임시정부내 成周寔이며, 이 발언은≪서울신문≫, 1945년 12월 21일에 실렸다.

 임시정부의 귀국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이승만에게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3상회의 결정서의 발표였다. 식민지시기에 ‘위임통치론’을 발표하여 비난받은 바 있었던264)방선주,≪재미한인의 독립운동≫(한림대학교 출판부, 1989). 이승만은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자 반탁운동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승만은 반탁운동 과정을 통하여 좌익을 배제하고 우익진영 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민주의원의 성립이었다. 이승만과 독촉중협은 임시정부가 조직한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모종의 정치공작을 통하여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민주의원으로 개편하였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정치고문으로 내한하였던 굳펠로우(Preston M. Goodfellow)의 공작을 통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연합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으로 개편하였던 것이다.265)도진순, 앞의 책, 68∼72쪽;정병준,<이승만의 정치고문들>(≪역사비평≫여름호, 역사비평사, 1998), 174∼175쪽.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여 민주의원이 조직되고, 이승만이 민주의원의 의장에 취임하면서 우익 정치세력의 주도권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이승만은 지방순회에 들어갔다. 이 시기의 지방순회는 ‘반공’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이승만의 존재가 미·소공동위원회의 진행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적극적 활동이기도 했다.266)도진순은 이승만의 지방순회가 ‘미국의 무기인 민주의원 의장이 소련의 무기인 인민위원회를 격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도진순, 위의 책, 81쪽). 이승만은 국내에 이렇다 할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대비하여 국내에 정치적 기반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大韓經濟輔國會’의 결성을 통해 정치활동을 위한 정치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267)정병준,<대한경제보국회의 결성과 활동>(≪역사와 현실≫33, 한국역사연구회, 1999), 258∼275쪽. 적극적인 정치적 조직은 아직 미흡한 상태였다. 이승만은 지방순회를 앞두고 1946년 4월 大韓獨立促成國民會(이하 독촉국민회)의 지부장회의를 열어 자신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정치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268)≪서울신문≫, 1946년 4월 11·12일. 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독촉중협과 반탁투쟁위원회의 통합으로 조직되었지만,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독촉국민회가 결성된 초기에는 김구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김보영,<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1994, 10쪽).

 이승만의 지방순회를 계기로 하여 독촉국민회의 지방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승만은 경찰과 우익단체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독촉국민회의 조직원수는 1946년 2월 51만여 명에서 이승만이 지방순회를 시작한 초기에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46년 6월 이후에는 700만 명 정도로 발표되었다.269)도진순, 앞의 책, 101쪽<표 2>에서 재인용.

 독촉국민회와 더불어 임시정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던 政治工作隊 역시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기반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이었던 申翼熙가 중심이 되어 1945년 말에 조직된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의 산하에 조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촉국민회에 합류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 비주류 계열에 속했던 신익희는 임시정부보다는 이승만과의 결합을 추진하였고, 정치공작대의 성원들은 1946년 3월 1일 독촉국민회의 청년조직으로 결성된 大韓獨立促成國民會靑年隊(이하 국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청은 이승만의 호위대로서 역할을 하였고, 이승만의 지방순회와 독촉국민회의 조직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70)이경남,≪분단시대의 청년운동≫(삼성문화개발, 1989), 152쪽. 정치공작대는 1946년 6월의 독촉국민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독촉국민회에 합류하였다.271)박진희,<해방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역사와 현실≫21, 한국역사연구회, 1996), 199∼200쪽.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직후인 1946년 6월 3일 ‘單獨政府樹立’ 발언을 통해 정계를 뒤흔들었던272)≪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이승만은 民族統一總本部(이하 민통)를 결성하여 좌우합작위원회에 대응하는 우익세력의 연합체를 조직하였다. 이승만은 독촉국민회와 민통을 중심으로 우익 정치세력을 장악하는 한편, 미군정의 좌우합작위원회 추진에 맞서고자 하였던 것이다.

 좌우합작위원회가 계속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여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12월 2일 서울을 출발한 이승만은 동경에서 맥아더와 회담한 후 미국으로 향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식민지시기부터 자신을 도왔던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행정부의 인사들을 만나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이승만은 귀국하기 직전인 1947년 3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30일 내지 60일 이내 남한에 과도적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73)≪경향신문≫, 1947년 3월 23일.
도진순, 앞의 책, 131쪽.
이제 이승만은 1945년의 동경회합 이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노선, 즉 ‘38선 이남에서 단독정부의 수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후 우익 정치세력 내부에서 주도권을 강화하면서 남한에서의 단독과도정권의 수립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면서 그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지만, ‘韓國民族代表者會議’를 조직하여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그는 ‘장덕수 암살사건’을 계기로 하여 임시정부 계열과 결별하면서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1948년 3월 31일 이내에 조기 총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274)≪동아일보≫, 1948년 1월 27일.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이승만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은 독촉국민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였고, 총선을 앞두고 급조된 ‘政黨社會團體代表者大會’ 역시 중요한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275)≪조선일보≫, 1948년 1월 18일. 8·15 이후 38선 이남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총선거에 참여한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5년의 ‘반공’ 담화, 1946년 6월의 ‘단정’ 발언, 1947년 3월의 ‘단독과도정부’ 발언 등을 통해 많은 비난을 받은 이승만이었지만, 1947년 이래 조성된 세계적 상황 및 한반도 내에서의 냉전의 심화는 결국 38선 이남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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