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조선공산당

(1) 조선공산당

 식민지시기부터 朝鮮共産黨(이하 조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독립을 위한 투쟁에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였다. 비록 조공이 1928년 해체된 이후 1945년에 이르기까지 당을 재건하지 못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농민조합 등 기층 대중으로부터의 조직활동, 당 재건을 위한 활동, 그리고 소규모 그룹활동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식민지시기 말기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8·15의 시점까지 전향하지 않고 투쟁한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다. 일반 국민들은 공산당은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로 인식하였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이 식민지시기 이래로 독립운동 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단결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4차례에 걸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지만, 각각의 공산당은 전체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하나의 파벌을 대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276)1920년대부터 형성된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은 크게 화요계(朴憲永·李承燁·金燦·曺奉岩 등), 서울계(李英·鄭栢·李廷允·崔益煥), ML계(權泰錫·河弼源·崔昌益), 콤그룹계(李觀述·李鉉相·金三龍·鄭泰植) 등이 있었다. 이들 파벌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서로 나뉘어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갈등, 대립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1928년 코민테른은 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였던 것이다. 공산당이 해체된 이후에 전개된 당재건운동 역시 파벌별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8·15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식민지시기 공산주의운동에서 나타난 파벌간의 갈등은 8·15 이후 전개될 공산주의운동의 특징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8·15 이후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공산주의자들은 서울계와 화요회 계열의 일부였다. 서울계의 이영·정백, 화요회계의 이승엽·趙東祐·曺一明, 상해파277)李東輝가 1919년 상해에서 만들었던 高麗共産黨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상해파로 분류할 수 있다.의 徐重錫 등은 8월 15일 밤에 서울 종로의 장안빌딩에 모여 공산당을 결성하였다(세칭 ‘장안파공산당’). 당 결성시 책임비서에는 서울계의 이영, 제2비서에는 화요회계의 이승엽(후에 ML계의 최익한)이 선임되었다.

 장안파공산당을 결성한 인물들은 8·15 직후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패망하자 곧바로 공산당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1940년대 초반 일본의 탄압을 피해서 운동을 그만두거나, 전향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8·15의 순간까지 공산주의운동을 계속했던 인사들에 비하여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화요회 계열이면서 8·15 직전 경성콤그룹(이하 콤그룹)에서 활동했던 박헌영은 8월 19일 서울에 올라와 같은 콤그룹 계열의 김삼룡과 함께 세를 규합하였다. 박헌영은 다음 날 당 재건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후 조공의 정치노선이 되는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이하 8월테제)를 발표하였다. 재건위원회가 발족되자 장안파공산당은 8월 24일 당을 해체하고,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재건위원회와의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열성자대회는 장안파공산당이 주도하여 열었지만, 회의 내용의 결과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모든 공산당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278)김남식,≪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 26∼33쪽.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는 조공을 재건하였다. 9월 11일에 발표된 조공의 주요 부서와 간부는 다음과 같다.

총비서:박헌영(화요회계, 콤그룹)

정치국:박헌영·金日成·李舟河·武亭(독립동맹)·姜進(ML계)·최창익(ML계, 독립동맹)·이승엽(화요회계)·권오설(화요회계)

조직국:박헌영·이현상(콤그룹계)·김삼룡(콤그룹계)·김형선(화요회계)

서기국:이주하, 許成澤(콤그룹계)·金台俊(독립동맹, 콤그룹계)·李龜壎(콤그룹계)·李順今(콤그룹계)·姜文錫(콤그룹계)

 (김남식,≪남로당 연구≫, 돌베개, 1984, 33쪽에서 재인용).

 위의 주요 부서 인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재건된 공산당은 화요회 계열과 콤그룹 계열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화요회 계열이나 콤그룹 계열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당시 귀국하지 않았거나 38선 이남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김일성·무정·최창익밖에 없었다. 이러한 당의 구성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조공은 출발에서부터 재건을 주도한 두 파벌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이 두 파벌의 당 운영 및 조직 장악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할 수 있는 불씨를 안게 되었다.

 조공이 정치노선으로 발표한 8월테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9월 20일에 다시 발표되었다.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현정세

해방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투쟁적 산물이기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들인 소·영·미·중 등 연합국세력에 의해 실현되었다. 2차대전에서 소련의 승리와 그 국제적 지위의 향상은 우리에게 혁명 달성을 위한 유리한 여건을 만들었다.

 2) 조선혁명의 현단계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다. 주된 과업으로서는 민족의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에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적 반역자와 대지주의 토지를 보상주지 않고 몰수하여 이것을 토지 없는 또는 적게 가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오 토지혁명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조선인 중 소지주와 토지에 대하여서는 자기 경작토지 이외의 것은 몰수하여 이것을 농작자의 노력과 가족의 인구수 비례에 의하여 분배할 것이오 조선의 전 토지는 국유화한다는 것이오 국유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농민위원회 인민위원회가 이것(몰수한 토지)을 관리한다.

 3) 조선 공산주의의 현상과 결점

이러한 모든 곤란한 환경하에서도 어쨌든 국제노선을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진실한 의미의 콤그룹의 공산주의운동이 비합법적으로 계속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37년 이래 전쟁시기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과거 파벌들은 모든 운동(합법적 비합법적)을 청산하고 일본제국주의자 앞에 더욱 온순한 태도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의 파벌분자와 그 거두들이 전시하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탄압을 두려워서 계급운동을 청산한 변절자 일파(전향파)가 다량적으로 산출된 것이었다.

 4) 우리의 당면 임무

①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

노동자들의 불평불만을 이용, 그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며 그들을 조직화해야 한다. 농민들에게는 토지분배와 봉건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위해 노동 계급과의 동맹을 강화토록 하며, 소작료의 3·7제투쟁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 청년운동은 종래 소부르주아적 가두층을 중심한 운동으로부터 일반 근로 청년운동을 전개할 것과 공산주의 이론의 교양 사업을 자기 과업으로 삼는 한편, 민족 개량주의 청년단체와의 일시적 통일전선을 형성, 그들을 쟁취해야 한다.

② 조직사업

당 조직을 노동자 농민들 위에서 건설하며, 기초조직을 공장에 두어야 한다. 당 도시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방당 조직의 대표로서 전국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선거하고 중앙위원회를 조직한다.

③ 옳은 정치노선을 위한 양면 작전투쟁을 전개할 것.

④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⑤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으로 수립된 ‘인민정권’을 위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

 5) 혁명이 높은 계단으로 전환하는 문제

조선혁명은 그 발전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거쳐서 보다 높은 단계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현단계는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단계가 아니다.

(<현정세와 우리의 과업>, 김남식 편,≪남로당 연구 자료집(1)≫,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8∼21쪽).

 8월테제의 특징은 먼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여한 4개국을 모두 진보적인 국가로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38선 이남을 점령하였던 미국을 진보적 국가로 규정하면서 국제정세를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낙관적이라고 평가했다는 부분이 주목된다.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하고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 재편계획을 계속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조공이 미군정에의 협조노선 및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총체적 지지노선을 채택한 것은 이러한 국제정세에 근거한 것이었다.279)8월테제 및 조공의 대미관에 대해서는 김남식·심지연 편저,≪박헌영 노선비판≫(세계, 1986)의 제3장 ‘박헌영의 역사인식과 대미관’ 참조.

 둘째로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인 및 대지주가 소유한 토지뿐만 아니라 중소지주가 소유한 토지까지도 ‘자기 경작토지 이외의 모든 토지’를 몰수할 것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같은 아시아 국가였던 중국이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중농과 부농의 일부의 토지소유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과 다른 점이다. 또한 조공과 같은 좌익계열의 조선인민당이 조선인 지주가 소유한 토지에 대해 특별한 규정을 두지 않았던 점과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토지문제와 관련된 애매한 조항도 나타나고 있다. 즉,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와 토지국유화를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280)조공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강성재는 토지국유화론이 당장 농민의 경작권을 부정하여 집단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토지분배를 통해 경작권을 부여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강성재,<현단계의 조선의 토지문제>,≪과학전선≫, 1946년 2월호, 70∼71쪽). 조공의 토지정책에 대해서는 김정,<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경제정책>(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2), 16∼32쪽 참조. 아울러 대자본가를 타도할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 중소규모의 자본가와 민족주의적 성향의 자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281)김남식·심지연 편저, 앞의 책(1986), 37쪽. 이러한 정치노선은 이후 조공이 우익 정치세력과의 연합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부분을 뒷받침해 준다.

 셋째로 높은 단계의 혁명으로의 진행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8·15 직후 대부분의 좌익 정치세력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또는 자산계급성 민주주의 혁명, 연합성 신민주주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당이나 조선신민당에서 더 높은 단계의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반면, 조공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결론을 대신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은 토지개혁 및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두려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우익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좌익 정치세력과의 연합을 어렵도록 만드는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넷째로<현정세와 우리의 과업>이 정치노선을 천명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내용 중 상당한 분량을 파벌투쟁 및 조직문제에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콤그룹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이 8·15 직전까지 일본에 전향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벌투쟁과 조직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킨 것은 식민지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다양한 파벌들을 당의 핵심조직에 포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노선에서 파벌문제를 중요한 내용으로 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당 지도부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282)8월테제가 발표된 이후 박헌영 계열이 아닌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노선을 담은 글이 발표되기도 하였다.<조선혁명의 현단계, 방향 및 전망-로레타리아트의 궁극적 승리를 위하여>(일명 산로테제)라는 글은 일본에서 귀국한 공산주의자인 임해에 의해 발표되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해방3년사연구회,≪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대야, 1988), 85∼98쪽 참조.

 당을 재건하고 8월테제를 발표한 조공은 1945년 9월 6일 발족한 인공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공과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정권기관으로 설정하고, 미군정으로부터 정권기관으로 승인을 받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앙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도·군·면 인민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조공은 당분간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면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283)김남식, 앞의 책(1984), 117∼118쪽. 경제적으로는 우선 심각한 소작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3·7제 소작료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인민위원회가 지역별 조직으로 운영되었다면 조공은 계급·계층별로 조직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사회단체 내에 침투하여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은 ‘勞動組合全國評議會(이하 전평)’였다.284)전평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태승,<미군정기 노동운동과 전평의 운동노선>(≪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87) 참조. 1945년 9월 26일에 조직된 전평은 조공의 외곽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점은 11월 5∼6일 동안 열린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에서 잘 나타난다. 결의문 4항 중 제1항은 “이 회의를 가져오게 한 조선 무산계급의 수령이요, 애국자인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낼 것”이었고, 제3항은 “조선 무산계급운동의 교란자 이영 일파를 단호히 박멸할 것”, 제4항은 “조선 민족통일운동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무의 노선을 절대 지지할 것”이었다.285)김남식, 앞의 책(1984), 65쪽.

 전평 이외에 全國農民組合總聯盟(이하 전농)286)전농의 활동에 대해서는 박혜숙,<미군정기 농민운동과 전농의 운동노선>(≪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87) 참조.·全國靑年團體總同盟(이하 청총)·全國婦女總同盟·國軍準備隊·學兵同盟 등이 외곽단체 또는 조공이 주도권을 장악한 단체로서 조직되었다. 그런데 청총의 경우에는 조공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임시정부 계열과 조선인민당 계열의 청년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으며,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우익계열 인물들이 참여하였으나, 점차로 조공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우익계열의 청년단체와 대립하게 되었다.

 조공은 인공과 외곽단체를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인공을 둘러싼 미군정과의 대립으로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미군정 이외의 다른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10월 10일 인공에 대한 부인성명을 발표한287)≪매일신보≫, 1946년 10월 10일. 이후 미군정은 인공의 이름, 즉 ‘인민공화국’에서 ‘國’자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에 열린 全國人民代表者大會에 ‘국’자를 삭제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이 대회의 최종일 회의에서 ‘국’자 삭제 요구는 거절되었다.288)김남식, 앞의 책(1984), 139∼144쪽.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12월 12일 전격적으로 인공 부인성명을 발표하였다.289)≪자유신문≫, 1945년 12월 13일.

 조공의 활동은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의 이름에서 ‘국’자를 삭제하는 것은 8·15 직후부터 추구해 왔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하지가 ‘인공부인성명’을 발표한 시점은 인공이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인공이 해체된다면 임시정부와 통합을 추진할 모체와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3상회의 결정서로 인해서 조공은 더 이상 인공의 문제에 매달릴 수 없었다.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에도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인공문제가 재차 언급되었지만,290)≪조선인민보≫, 1945년 12월 30·31일, 1946년 1월 2일. 3상회의 결정서가 조성한 새로운 상황으로 인하여 인공은 더 이상 논의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3상회의 결정서의 발표로 인하여 정치상황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가지 문제로 인해서 조공은 정치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총체적 지지’ 입장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나타났고, 다른 하나는 박헌영의 기자회견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공은 1946년 1월 1일 오후 또는 1월 2일부터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1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우익의 반탁투쟁을 민족분열적 행위로 규탄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신탁통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월 1일 오후 2시에 있었던 조공의 기자단 회견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291)≪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그러나 1월 2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3상회의 결정서는 조선 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으로서, 이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였다. 1월 3일 추운 날씨에 10만여 명이 모였다는 서울시민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조공의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지지 입장에 대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반탁대회로 알고 있었는데, 대회는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했던 것이다.292)서중석, 앞의 책, 160∼161쪽. 조공의 입장 변화는 소련의 입장을 전달받은 박헌영이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입장을 전격적으로 바꾸면서 이루어졌다.
김남식, 앞의 책(1984), 211쪽.
이완범,<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1946>(≪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1987), 251∼254쪽.

 이에 더하여 1946년 1월 5일에는 박헌영이 내외신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소련의 1국신탁제를 지지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연방에 합병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박헌영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고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의 발언을 둘러싼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박헌영 기자회견 파문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따라서 반탁운동은 반소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우익 정치세력의 정치공세를 합리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소련의 타스통신이 1월 22일 3상회의의 진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 공개하였지만,293)≪동아일보≫, 1946년 1월 25일. 우익진영의 반탁공세는 계속되었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조공 및 박헌영의 정치적 체면이 상당히 실추되었다.

 조공은 우익 정치세력들이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면서 세를 확장해 나가자 좌익 정치세력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조직을 꾸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민족주의세력들을 모두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의 조직이라고 표명하였지만, 실제로는 반탁운동에 반대하는 좌익 정치세력들의 집결체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1946년 1월 19일에 시작된 조직 작업은 준비위원 발표, 선언문 초안 작성 등을 거쳐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의 결성으로 마무리되었다.294)민전의 결성과정에 대해서는 류정임,<해방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형성과 그 성격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40∼43쪽 참조.

 민전의 결성을 통해 조공은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8·15 직후부터 표방해 왔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8월테제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공은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대중적 요구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4당회합·5당회합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조공은 민전의 결성을 통해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과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전의 결성이 조공에서 주장하고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민족통일전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조공이 처음 민전을 계획하면서 우익정당 및 임시정부의 대표를 포괄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한민당 및 임시정부 내 일부를 포괄하고자 했던 시도가 실패하였다. 즉, 민전이 민족주의세력을 모두 포괄하지 못하였으며, 민전은 3상회의 결정서를 지지하는 좌익 정치세력만의 집결체에 불과한 조직이 되고 말았다. 우익 정치세력 중에서는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일부 朝鮮民族革命黨 계열 인사들이 합류했을 따름이었다.

 둘째로 민전의 결성으로 인공문제가 해결되었다. 인공문제는 1945년을 통해 조공과 미군정이 대립했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자의 삭제를 둘러싼 논쟁은 조공의 대미 협조노선의 고수를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조공은 민전을 조직하면서 인공을 흡수함으로써 ‘국’자의 삭제를 둘러싼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 없게 되었다. 조공이 공식적으로 인공을 해체한 적도 없으며, 인공을 부인한 적도 없었지만, 민전이 출범한 이후에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인공을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공이 인공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공에게 있어서 인공은 뜨거운 감자였지만, 해방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민중들의 인공에 대한 지지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조공이 이러한 유리한 상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인공에 대한 조공의 태도를 바라보는 다른 정치세력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조공은 대중투쟁이 전개되거나 좌우합작을 비롯한 정치적인 쟁점이 부각될 때에는 인공과 인민위원회의 문제를 다시 들고 일어났다.

 이후 조공은 민전을 중심으로 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성공을 위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다. 민전은 좌익 정치세력의 결집체였지만, 조공은 민전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민전의 모든 활동은 조공의 통제를 받았다. 이 점이 조공 내부, 그리고 민전 내부에서 조직의 민주적인 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즉,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내의 일부 파벌이 당의 조직과 민전을 장악한 데 대한 내부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말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지구당의 반발은 민전의 결성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2월 조공의 중앙당을 지지하는 북조선공산당에 대해 반박하는 메시지가 조공전라북도위원회에 의해 전달되었으며,295)<북선분국 동무들의 멧세지와 우리의 주장>(≪북한관계사료집≫Ⅹ, 국사편찬위원회, 1990), 156∼162쪽.
<북조선분국의 상무위원회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역사비평≫가을호, 역사비평사, 1991), 423∼424쪽.
민전 결성 직후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연석회의’에서는 중앙당의 독선적 운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296)<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역사비평≫가을호, 역사비평사, 1991). 민전의 독단적 운영으로 인하여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좌파 인사들은 민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또한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직후 조공 및 민전의 독단적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하였다.297)박태균,≪조봉암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5). 조공의 활동은 민전을 중심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하여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분열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 휴회 직후 미군정의 3개 좌익신문 폐간, 조공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 등으로 조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갈 때 조공은 소위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노선을 전환하였다. 즉, 미군정에의 협조노선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전술로 전환한 것이었다. 조공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에 대해서 미군정보다는 우익세력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리다가, ‘신전술’의 채택을 계기로 하여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1946년의 ‘9월총파업’과 소위 ‘10월항쟁’은 모두 ‘신전술’하에서 나온 대중적 투쟁이었다.

 조공의 ‘신전술’은 미군정에 대한 ‘갑작스러운’ 인식변화에 기인하기도 하였지만, 미·소공동위원회 휴회 이후에 진행된 좌우합작위원회 및 삼당합당 과정에서 조공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10월에 계획되었던 총파업은 삼당합당의 중요한 고비였던 9월 말로 앞당겨졌다. 조공은 대중적인 동원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이로써 좌익 정치세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공은 8·15 직후 가장 강력한 정당이었다. 그러나 인공의 결성, 3상회의 결정서 지지, 민전의 결성, 신전술 채택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조공은 삼당합당을 통해 南朝鮮勞動黨을 조직하면서 약화된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지만, 당내의 분열은 심각한 상황이었고, 좌익 정치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좌익 정치세력은 삼당합당을 통해 오히려 社會勞動黨과 남조선노동당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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