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2)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

(2)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

 朝鮮人民黨은 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당이다.298)여운형의 명성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도 일부 마을의 경우 8·15 직후 실시된 3·7제 소작료 문제를 조공의 박헌영이나 미군정이 아닌 여운형의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많은 농민들이 여운형을 지지했다고 한다(이용기,<마을에서의 전쟁 경험-경기도지역의 마을사례를 중심으로>,≪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 역사문제연구소 심포지엄 발표문, 2000, 9쪽).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과 건국에 대비하기 위해 1944년 8월에 비밀결사인 朝鮮建國同盟(이하 건국동맹)을 결성하였다.299)조선건국동맹에 대해서는 정병준,<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한국사연구≫80, 한국사연구회, 1993) 참조. 건국동맹은 8·15 직후 건준으로 개편되어 일시적으로나마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강령에서 잘 나타나듯이300)건준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期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학보를 기함(≪매일신보≫, 1945년 9월 3일).
건준은 여운형과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8·15 이후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국가건설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임시로 조직되었다. 각 지방에는 건준의 지부가 구성되었으며, 임시적인 자치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공의 핵심인사들이 건준에 참여하면서 건준의 주도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건준은 3차례에 걸친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조공의 인사들이 장악하였으며, 안재홍을 비롯한 중도우파 정치세력들은 건준에서 탈퇴하였다. 건준은 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인공으로 다시 개편되었는데, 조공이 인공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인공이 좌우를 망라한 민족적 기관이 아닌 좌파만의 기관으로 전락하자 여운형은 더 이상 인공에 관여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활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301)여운형은 미군정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인공의 조직보다는 건준의 존속이 외교적인 면에서 더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건준의 해체를 반대했다(이만규,≪여운형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223쪽). 건국동맹은 1945년 10월 10일 정당으로서의 재출발을 선언하였고, 동년 11월 조선인민당이 결성되었다.302)조선인민당을 결성하기 직전 여운형은 정치세력 통합을 위한 간담회에 참여하였으며, 여기에서 인공에 집착하지 않고 국민들의 의사를 묻기 위한 국민대회의 소집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간담회 이후 조직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 여운형은 건국동맹의 대표로 합류하였고, 이 활동이 조선인민당 결성으로 이어졌다(정병준,≪몽양여운형평전≫, 한울, 1995, 151∼152쪽).

 조선인민당에는 高麗國民同盟·15회·人民同志會 등 정치단체가 참여하였고303)≪조선인민보≫, 1945년 11월 13일. 11월 12일 결성대회, 11월 25일 확대위원회를 통해 중앙조직의 구성을 완료하였다. 초기 조선인민당의 조직에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동맹 계열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무부장 李如星, 조직부장 李錫玖, 노동부장 金世鎔, 총무국장 李傑笑(일명 李基錫), 문화부장 黃雲, 당무부 위원 玄又玄, 재정부 위원 李林洙, 노동부 위원 金錤鎔, 감찰위원장 金振宇 등 당의 핵심인사들이 건국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304)정병준, 앞의 책(1995), 80∼93쪽.
심지연,≪인민당연구≫(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10∼11쪽.

 식민지시기 건국동맹이 전국적인 조직을 위하여 각 도의 책임자들을 임명했고, 지방에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당의 지방조직 건설은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1945년 12월 부산지부의 결성을 시작으로 1946년 2월까지 광주·서울·대구 등 전국의 주요 지역에서 조선인민당 지부가 결성되었다. 1946년 7월까지 전국에 60개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결성을 준비 중인 곳은 44개였다. 당원수는 창당시 7만여 명이었던 것이 1945년 12월에는 12∼13만 명으로, 1946년 4월에는 18만 명, 1946년 5월에는 30만 명이라고 발표되었다.305)심지연, 위의 책, 11∼15쪽.

 조선인민당의 정책은 ‘계획경제제도의 확립’, ‘민족반역자 처리’, ‘주요 기업의 국영 또는 공영’, ‘중소기업의 국가지도하에 자유경영’, ‘8시간 노동제’ 등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주장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정치세력, 특히 조선공산당과 차이가 있었다.

 첫째로 강령의 제1항에 나오는 바와 같이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조선인민당선언>을 통해 “기본 이념을 등한시하고 현실적 요청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역사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행위라면 기본 이념에만 급급하여 그 현실적 과제를 무시하는 것도 역사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조선인민당 정치노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민당의 이론가였던 金午星은 조선인민당의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인민당은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 인민의 정치적 결집체이며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 인민의 완전해방을 위한 정당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민당은 좌익정당과 아무런 대립관계에도 서 있지 않다. … 오직 상이한 점은 좌익정당이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투사만을 구성요소로 하는 데 반하여 인민당은 그 혁명세력을 전 인민층에서 집결하려는 것이다. … 인민당은 그 현실적 과제인 완전독립의 실현을 위해서는 좌익정당과의 제휴뿐 아니라, 우익정당과도 공동전선을 취할 용의를 갖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완전독립의 실현은 어느 일당 전제하에는 성취할 수 없고 오직 각당 각파를 망라한 민족적 총역량을 집중하는 데서만 가능할 것임으로써이다. 이리하여 조선인민당은 조선의 당면과제인 완전독립을 성취키 위해서는 좌우 양익을 공동전선에 서게 하는 매개적 역할까지 不惜하려는 자이다(김오성,<조선인민당의 성격>,≪한국현대사자료총서≫11권, 돌베개, 1986, 12∼18쪽).

 따라서 조선인민당에는 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주로 우파의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온건한 노선의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우파의 진보적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소집을 계기로 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金元鳳·金星淑·張建相·成周寔 등이 대표적인 인사들이었으며, 이외에도 건국동맹기부터 참여했던 만주군 출신의 朴承煥, 李陸史 시인의 외숙인 許珪, 교육학자이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었던 李萬珪, 柳麟錫 의병장 밑에서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동양화가였던 김진우, 유명한 史學者였던 李相佰, 정치가이자 예술평론가였던 이여성 등이 참여하였다.306)정병준, 앞의 책(1995), 87∼91쪽. 이걸소·김세용·김오성·李貞求 등은 식민지시기 조공이나 노동단체 또는 소련 유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온건 성향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조선인민당의 구성원들이 1946년 말의 삼당합당을 계기로 하여 여운형 계열과 조공 합류 계열로 분열되지만, 삼당합당 이전의 조선인민당 구성원들은 당의 통일, 합작노선을 충실하게 추종하였다.

 둘째로 경제정책에서 나타나는 토지개혁 관련 조항이다. 즉, 정책에서 조선인민당은 토지개혁과 관련하여 “몰수한 토지는 국영 혹은 농민에게 적의 분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토지의 무상분배는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중요한 점은 분배할 토지를 국가가 직접 소유하는 방식에 대해 특별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공이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를 몰수할 것을 규정했던 데 비하여 조선인민당은 일본인의 소유였던 토지와 친일파·민족반역자·전범자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규정만을 두고 있다. 조선인민당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해설한<인민당의 노선>에서도 ‘정책’에서 제시한 노선과 동일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307)조선인민당,<인민당의 노선>(신문화연구소, 1946,≪한국현대사자료총서≫11에 수록).<인민당의 노선>에서 농업정책과 관련하여 ‘정책’보다 더 구체화된 부분은 ‘농업생산의 과학화와 농촌협동조합을 촉진’에 대해 규정한 것밖에 없다. 이 점은 조공과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토지집적과 관련해서 대지주의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규정이 없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노선의 첫 번째 특징인 좌익과 우익을 아우르는 정치활동의 필요성에 대한 조선인민당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당은 ‘좌익과 우익 사이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하여, 무상몰수로 인해서 야기될 수 있는 좌우익간의 갈등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308)≪자유신문≫, 1946년 6월 12일.

 토지문제에 대한 조선인민당과 조공의 입장 차이는 궁극적으로 여운형이 주창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노선’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노선’은 좌익 정치세력들이 모두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여운형의 노선은 조공의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보수주의의 헌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을 갈아입는 것”이라고 하였으며,309)여운형,<우리나라의 정치적 진로>(≪학병≫1권 1호, 1946), 5쪽. 혁명의 수단은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의회에서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었다.310)심지연, 앞의 책(1991), 29쪽.

 그러나 ‘혁명’의 방법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당시의 사회구조 및 개혁과제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지주와 자본가계급을 철폐하고 노동자·농민을 위주로 한 ‘혁명’을 주장했던 조공과는 달리 조선인민당은 ‘부르주아적 산업혁명’을 경제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근로계급의 미숙 때문이 아니라 생산과정의 미숙 때문에 요청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아직 토착자본이 형성되지 못하고 외래자본에 의한 기형적 반봉건적인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의 경제적 조건은 부르주아적 산업혁명, 즉 토지문제의 해결과 산업의 재편성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것이다.311)조선인민당, 앞의 글, 26∼28쪽.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산업혁명이 필요하다는, 즉 사회주의적인 혁명 또는 개혁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현실 파악의 중심을 노동자·농민에 두는 것과 ‘민족자본의 형성’에 두는 것은 현실 인식 상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정치노선하에서 조선인민당의 활동은 좌익과 우익세력의 정치적 합작에 중심이 두어졌다. 조선인민당 결성 직전에 열렸던 정당통일을 위한 모임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촉중협을 조직하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참가단체와 관련된 이견으로 독촉중협과 결별한312)≪자유신문≫, 1945년 11월 7일.
≪조선인민보≫, 1945년 12월 11일.
여운형과 조선인민당은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을 계기로 하여 임시정부와 인공의 통합을 시도하였다.313)심지연, 앞의 책(1991), 50∼52쪽.

 임시정부의 고압적 자세로 인해서 임시정부와 인공의 통합 시도는 쉽지 않았으며,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면서 정당통합, 또는 좌우익 정치세력간의 합작을 위한 여운형과 조선인민당의 시도는 일시적인 좌절을 맞게 되었다.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반탁운동과 좌익을 중심으로 하는 총체적 지지 진영간의 대립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 조선인민당이 통일위원회의 조직을 제안하고, 4당회의를 개최하였지만, 3상회의 결정서로 인해 조성된 반탁운동과 총체적 지지 진영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민당은 조공과 임정의 독선적 자세에 맞서서 4당회의에 가장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4당회의의 결렬은 조선인민당의 향후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자 반탁의사를 표명했던314)≪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조선인민보≫, 1946년 1월 1일.
조선인민당은 1946년 1월 2일 조공이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자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당의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지지는 조공의 ‘총체적 지지’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조선인민당은 3상회의 결정서의 정신과 의도는 지지하나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315)심지연, 앞의 책(1991), 62∼64쪽. 조선인민당은 1월 5일 이여성의 담화를 통해 3상회의 결정은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건전한 발전을 원호하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므로 감사히 생각할 뿐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바이지만, 신탁통치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유감이라고 지적하고, 이에 구속되어 3상회의 결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민족적 망동이라고 비난했다.316)≪조선인민보≫, 1946년 1월 3·6일. 여운형 역시 기자회견을 통해서 3상회의 결정의 내용을 자세히 모르고 덮어놓고 피로써 싸운다는 것은 경솔한 일이며, 또한 세계문제에 관한 결정이므로 그 중에는 지지할 점도 있고 배척할 점도 있으므로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317)심지연, 앞의 책(1991), 53∼54쪽.

 조선인민당이 3상회의 결정서를 지지하고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 기본적인 이유는 국제적 제약성 때문이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서는 이들과의 타협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연합국들의 결정인 3상회의에 동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인민당은 3상회의 결정서의 기본적인 내용도 신탁통치가 아니라 평화를 보장하려는 진보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민족에 부과된 신탁통치라는 내용도 국제평화 원칙에서 어쩔 수 없이 초래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318)김오성,<정치노선의 접착점>(심지연, 앞의 책, 1991, 64쪽에서 재인용).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반탁운동세력이 주도하였던 비상국민회의에의 참여를 거부한319)≪조선인민보≫, 1946년 2월 1일. 여운형은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에도 참여를 거부하였다(≪조선인민보≫, 1946년 2월 15일). 조선인민당은 민전에 참여하였다. 민전은 조공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좌익정당과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일부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한 ‘민주주의자들의 연합체’로 주장되었지만, 실상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대처하기 위한 좌익세력의 정치적 집결체였다. 조선인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조선인민당의 조직을 확대·강화하며, 민전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및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민당이 미·소공동위원회에 거는 기대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1946년 3월 30일 공위 내에 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자 조선인민당은 그 내용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진보적인 결정이라고 판단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할 것으로 예측하였다.320)≪현대일보≫, 1946년 4월 6일(심지연, 앞의 책, 1991, 73쪽에서 재인용). 조선인민당은 당 내에 미·소공동위원회 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김오성·김세용·이정구 등 조선인민당의 핵심적인 인사들을 대책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당의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지지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가 5호성명을 계기로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자, 조선인민당의 미·소공동위원회 성공을 위한 움직임은 일단 목표를 잃은 상태가 되었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기간 중에 진행된 정치공작으로 인해서 조선인민당은 조직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즉,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조선인민당을 분열시키고자 하였고, 미군정의 관리들이 조선인민당의 인사들을 만나 새로운 정치그룹을 만들 것을 독려하였다.321)≪주한미군사≫2(돌베개, 1988 영인), 190쪽. 미군정과의 정치적 접촉에 응한 것은 여운형의 동생이었던 呂運弘이었고, 여운홍은 일부 정치그룹들과 함께 조선인민당을 탈당하였다. 여운홍은 탈당 직후 “조선인민당이 조공의 조종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선인민당에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22)≪독립신보≫, 1946년 5월 10일. 이 성명서는 미군정에서 정치공작을 지휘하고 있었던 버취(Leonard Bertsch) 중위가 작성한 것이었다.323)정병준, 앞의 책(1995), 190쪽. 여운홍이 탈당한 직후 건국동맹 출신의 중앙집행위원 張權·朴漢柱를 비롯한 94명이 담화와 함께 5월 11일 탈퇴하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5월 22일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사회민주당의 결성식은 1946년 8월 3일 이승만·엄항섭·버취 중위 및 미군정청 공보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324)심지연, 앞의 책(1991), 100쪽.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조선인민당 내의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조선인민당은 좌우합작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공작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325)박태균, 앞의 글(1992), 137∼142쪽. 조선인민당은 좌파의 대표로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조선인인민당의 강령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좌우합작은 조선인민당의 가장 중요한 정치노선이었다. 미군정이 추진하고 있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입법기관의 설립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조선인민당은 북한의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명실상부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조선인민당에서 추진한 좌우합작은 4단계의 발전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1단계는 ‘남한 각 정당·단체 주요책임자 연석협의체’를 개인 자격으로 구성하는 것이고, 개인 자격의 이 협의체가 정당·단체를 공식으로 대변하는 제2단계 ‘남한 각 정당·단체 연석협의체’로 발전한다. 2단계의 연석협의체는 남한내 좌우합작이 완성된 형태를 의미한다. 남한내 좌우합작이 완성된 후 북한과 협상하여 제3단계의 ‘좌우, 남북협의체’로 발전한다. 이제 좌우, 남북합작이 완성되면 소련과 협상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시킨다. 물론 좌우, 남북을 모두 포함하여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에 기초해서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를 통해 제4단계 ‘임시정부(좌우연립 과도정권)’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326)정병준, 앞의 책(1995), 260∼261쪽.

 조선인민당이 좌우합작의 원칙으로 제시한 방안은 다음과 같다.

一. 국제적 마찰을 일으키는 반소반미의 모든 언동을 정지시켜서 일국편향주의에 의한 민족적 분열을 방지할 것.

一. 직접 좌우합작을 방해하는 모든 테러행위를 중지할 것.

一. 친일파·민족반역자·모리배 등으로 하여금 모든 행정·사법·경찰·경제기관에서 물러서도록 하여 그들의 반민족적, 반통일적 발악을 인민의 위력으로 거세시켜야 될 것.

一. 언론과 집회의 모든 자유를 우리가 서로 존중하여 주어야 할 것.

一. 민족적인 행사는 거족일치로서 합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것(≪조선인민보≫, 1946년 7월 18일).

 조선인민당은 이러한 원칙에 기반하여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지만,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좌익과 우익세력의 반대로 인해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사들만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이 입법기관을 강하게 추진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선인민당의 인사들은 좌파로부터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울러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진되는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좌파 계열의 삼당합동과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사회노동당의 대립과정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실패뿐만 아니라 조선인민당의 해체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남로당이 결성되고 사회노동당이 해체된 이후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은 조선인민당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조선인민당 내에서 온건파, 또는 우파에 속하는 인물들로 장건상과 이만규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들은 1947년 1월 29일과 30일 양일간에 인민당재건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위원장에 장건상, 부위원장에 이만규를 선임하였다.327)≪민주일보≫, 1947년 2월 1일. 이어 사회노동당 계열에서 12명, 인민당 재건위원회에서 9명,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은 신민당을 포함한 기타 정치단체에서 10명으로 구성된 31명의 준비위원을 선출했다. 남로당은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당 결성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통일전선 형성을 통해 공동투쟁을 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328)이상 심지연, 앞의 책(1991), 161∼162쪽.

 결국 근로인민당은 조선인민당의 후신으로서 1947년 4월 26일 창당되었다. 근로인민당에는 창당준비위원의 면모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다양한 정치인들이 참여하였지만, 대체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선인민당과 유사한 정치노선을 천명하였다.329)근로인민당의 선언 및 강령, 그리고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심지연, 위의 책(1991), 168∼183쪽 참조. 근로인민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근로인민당의 창당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1947년 5월 30일)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은 근로인민당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운형의 암살(1947년 7월 19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1947년 10월 21일)로 인하여 근로인민당은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다양한 인사들의 정치노선을 아우르고 있었던 구심점이 사라지고, 정치적 목표가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근로인민당은 여운형의 암살 후 체제정비와 당 정치노선의 재검토를 위하여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수석부위원장제도를 도입하였으며,330)≪조선일보≫, 1947년 10월 7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2정당협의회·民族自主聯盟·南北指導者連席會議에 참여하였지만,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정치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결국 근로인민당은 분열, 해체의 길을 걷는다.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여했던 근로인민당의 당원들은 북한에 잔류하여 1948년 10월 17일 비상대표회의를 열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과 부강한 민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투쟁하며 인민들의 물질적 문화적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을 도모하는 사업을 성취”한다는 의미에서 17개항의 강령초안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이영, 부위원장에 백남운을 선출하는 등 서울과는 별도의 중앙기관을 구성하였다.331)≪조선중앙연감≫1950년판, 248쪽(심지연, 앞의 책, 1991, 215쪽에서 재인용). 서울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뚜렷한 활동을 못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정부에서 법령 제55호 2조에 의거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1957년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던 장건상·김성숙 등이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근로인민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