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4) 삼당합동과 남조선노동당

(4) 삼당합동과 남조선노동당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가자 좌익 내의 3당은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둘러싸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좌익 정치세력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하루라도 빨리 속개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조공은 민전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적인 시위를 통해 우익 정치세력들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던 반면345)≪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1일, 6월 3일. 조공의 시도는 1946년 6월 10일에 시도된 ‘6·10기념 공위촉진시민대회’로 나타났다. 조선인민당과 조선신민당은 “좌우합작에서만 통일정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미군정 및 우익 정치세력과 활발하게 접촉하기 시작하였다.346)≪독립신보≫, 1946년 6월 12일. 조공은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자, 좌우합작에 대해 ‘전형적 기회주의자’로 비난하던347)≪조선인민보≫, 1946년 4월 28일. 입장에서 3원칙을 세워 조건부 지지를 선언하였다.

 좌우합작과 더불어 좌익 정치세력 내부에서 견해 차이가 나타난 것은 미군정의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좌익 정치세력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하여 미군정에 대해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고 좌익, 특히 조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자 미군정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변화되어 갔다. 조공의 미군정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던 여운형·백남운을 비롯한 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과의 관계 역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좌익 정치세력 내부의 이러한 노선차이는 조공이 미군정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공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신전술’을 채택하였으며, 1946년 7월 22일에 열린 민전 의장단 회의를 통해 “미군정에 반대해 투쟁”해야 할 것과 “우익진영과 미국에게 이익을 주게 될 합작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48)Enclosure to Despatch No. 60, August 26, 1947, "Letters Found in Brief Case of Lyuh Woon Hyung," Counter Intelligence Corps.,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eadquarters, File No. 13. 박헌영은 이것을 자신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38선 이북의 북조선공산당 및 소련의 견해라고 하였지만, 여운형과 백남운은 반대 또는 유보의 태도를 취했다.349)<주한 정치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1946년 8월 2일)>(김국태 역, 앞의 책), 392쪽.

 조공의 ‘신전술’은 미군정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불리워진 ‘신전술’의 주요한 목표는 종래 미군정과의 협조, 합작노선에서 반미운동으로의 전환,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북한과 같은 개혁의 즉각적인 실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 등이었다.350)박일원,≪남로당의 조직과 전술≫(세계, 1984), 30∼32쪽. ‘신전술’의 채택이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조선인민당 및 조선신민당과의 차별성이 명백하게 표출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공이 좌익 정치세력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추진한 것이 좌익정당들의 三黨合黨이었다.

 38선 이북에서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합당을 결의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1946년 8월 초부터 38선 이남에서도 좌익정당간의 합당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8월 3일 조선인민당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공산·신민 양당에 합당을 제안”하기로 가결하고,351)≪조선인민보≫, 1946년 8월 5일. 이에 대해 조공과 조선신민당이 합당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삼당합당은 본격화되었다.352)≪조선인민보≫, 1946년 8월 6·8일. 삼당합당의 추진에는 38선 이북에 위치한 좌익정당들의 상황이 큰 영향을 주었지만, 당시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에서 추진되고 있었던 대중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도 큰 영향을 주었다.353)≪조선인민보≫, 1946년 8월 6일.

 좌우합작의 문제로 좌익 정치세력 내부에서 이견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삼당합당이 쉽게 추진될 수는 없었지만, 소련과 38선 이북에 위치한 정치세력들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삼당합당은 1946년 초부터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354)정창현,<좌익 정치세력의 ‘삼당합동’ 노선과 추진과정>(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3), 19∼20쪽. 조선인민당은 삼당합당을 통해서 조공이 함께 참여하는 좌우합작운동의 추진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고, 조선신민당은 38선 이북지역의 조선신민당이 북조선공산당과 합당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당에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좌익 3정당이 삼당합당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합의하였지만, 문제는 구체적인 합당 방법이었다.355)≪조선인민보≫, 1946년 8월 12일. 여운형은 적당한 준비기간을 두고 각 당 내에서 민주적인 견해를 수렴하고자 했던 반면, 박헌영을 지지하고 있었던 조공의 ‘간부파’는 이미 합당이 결정적이며 정세가 긴박하기 때문에 하부로부터의 토의보다 삼당대표들이 연합회의에서 합당선언을 성명하는 동시에 신당의 강령초안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356)≪청년해방일보≫, 1946년 9월 2일. 이제 삼당합당의 방법을 둘러싸고 좌익의 3정당은 모두 두 개의 파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조공의 간부파가 제기한 합당안을 찬성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조공 간부파의 제안이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조공 내부에서 박헌영에 반대하는 간부 6인이 ‘합동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제군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357)≪청년해방일보≫, 1946년 8월 5일,<호외>. 각각의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소위 ‘대회파’로 분류되는 이들은 8·15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비민주적인 당 운영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사들이었다.358)자세한 내용은<북조선분국의 상무위원회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1 가을호) 및 정창현, 앞의 글, 25∼28쪽 참조. 1946년 6월 조공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던 曺奉岩의 전향은 미군정의 공작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박헌영 중심의 당운영에 대한 반발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박태균, 앞의 책, 1995, 121∼130쪽 참조). 성명서에서 이들은 박헌영 일파가 당을 자기 위주로 이끌어 당의 발전을 저해하고 당을 분열의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삼당합당을 위한 전제로서 당대회의 개최를 요구하였지만, 간부파는 미군정의 탄압이 심한 상태에서 당대회를 개최할 수 없기 때문에 중앙위원회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대회파는 당으로부터 제명 및 무기정권의 처분을 당하였다.359)대회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金綴洙·徐重錫·姜進·金槿·李廷允 등으로 식민지시기 박헌영이 활동했던 화요회 계열과 대립되는 활동을 했던 ML파와 서울파 계열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대회파가 전북·경남·부산지구 등의 지방당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수도권지역의 공산당 간부들 역시 대회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의 처분만으로 당의 내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북조선노동당이 창립대회에서 박헌영 중심의 간부파의 입장을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회파는 ‘조선공산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의 일부 세력과 합당교섭을 진행하였다.

 조공의 내부 갈등이 표출되면서 조선인민당과 조선신민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당의 내분은 좌우합작에 대한 입장차이를 둘러싸고 심화되었다. 장건상·이여성으로 대표되는 친여운형 계열의 인사들은 좌우합작의 촉진을 합당의 원칙으로 제시했던 반면360)≪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 김오성으로 대표되는 친박헌영파의 경우, 좌우합작을 중지하며 좌익 총역량의 전면적 확대 강화를 위한 무조건 합당을 주장하였다.361)≪동아일보≫, 1946년 8월 17일.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확대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합당 추진을 위한 표결과정에서 합당을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세력의 비율이 48대 31로 나뉘어 조선인민당은 무조건 합당을 주장하는 48인파와 민주주의적 과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친여운형 계열의 31인파로 분열되었다.

 조선신민당의 분열은 위원장 백남운과 부위원장 정노식 사이의 분열로 나타났다. 조선신민당의 경우 38선 이북에 있는 당 본부의 지시가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정당에 비하여 분열의 양태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공 간부파를 지지하는 중앙간부들과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계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백남운 계열은 합당의 방법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362)심지연, 앞의 책(1988), 151∼153쪽.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9월 4일 박헌영을 지지하는 조공의 간부파가 3당합동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조선인민당과 조선신민당의 위원장이 참석하지 않은 채 열린 이 회의에서 삼당합당 결정서가 정식으로 가결되고 남로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363)≪조선일보≫, 1946년 9월 6일. 이에 여운형과 백남운은 남로당 결성을 위한 움직임을 비판하면서 남로당준비위원회와 분리하여 따로이 합당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남로당준비위원회는 여운형·백남운·조공의 대회파가 추진하고 있는 합당을 막기 위하여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겼지만,364)정창현, 앞의 글, 53쪽. 10월 16일 남로당준비위원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사회노동당을 결성키로 결정하였다.365)≪서울신문≫, 1946년 10월 17일. 이제 사회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삼당합당은 사회노동당과 남로당이 갈라져 개별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사회노동당의 여운형과 백남운은 11월 초 남로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주장하였지만, 남로당 준비위원회는 좌우합작노선을 비판하면서 사회노동당의 무조건 해체를 주장하였다.366)≪독립신보≫, 1946년 11월 20일. 11월 23일과 24일 남로당은 정식 결당대회를 가졌다. 위원장에는 허헌이 선출되었으며, 부위원장에 박헌영·이기석이 선출되었다.

 이후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은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합당사업을 추진하였지만, 북로당측에서 남로당의 권위를 인정해 주면서 사회노동당은 점차 약화되었다. 여운형이 삼당합당의 추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38선 이북을 다녀온 이후 북로당에서는 남로당을 삼당합당의 대표 정당으로 추인하였으며, 이로 인해 사회노동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367)≪독립신보≫, 1946년 11월 27일. 아울러 사회노동당에 참여한 좌익 3당의 분파들이 대중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사회노동당의 힘이 약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노동당은 1947년 2월 27일 제1회 당대회를 열고 ‘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결정하였다.

 삼당합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내 간부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좌익 정치세력들은 삼당합당 과정을 통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우선 세 개의 좌익정당이 합당하였지만, 남로당의 실질적인 힘이 조공에 비하여 세 배로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좌익정당에서 간부파의 견해에 찬성하는 사람들만이 합당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삼당합당 과정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9월총파업’과 소위 ‘10월항쟁’을 통해 대중조직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탄압이 점차 강해지는 가운데 박헌영을 비롯한 핵심적인 당 간부들이 38선 이남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상황 역시 남로당의 힘을 약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남로당은 미군정하에서 합법정당으로 발족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들어서 ‘국립서울대학 건설 반대투쟁’,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하였다. 1947년 중반에는 당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당원 5배가, 10배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과 당세확장을 위한 운동은 미군정의 탄압, 남로당의 파괴를 위한 역공작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368)김남식, 앞의 책(1984), 273∼298쪽.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된 이후 남로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하였다. 1948년 2월의 소위 ‘2·7구국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2·7구국투쟁’은 남로당이 지휘한 가장 큰 대중적인 폭력시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진압으로 시위는 곧 가라앉았으며, 동년 5월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남로당은 더 이상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 남로당의 지도부는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38선 이남에서는 비밀조직만이 활동하였다. 1948년 이후 남로당은 남한의 무장유격투쟁에 대한 지원이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남았다. 남한의 남로당세력들은 1948년에서 1950년 사이 대한민국정부의 강력한 좌익 탄압정책에 의해 거의 괴멸되었다.

 남로당은 1949년 6월 북로당과 합당하여 朝鮮勞動黨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다. 남로당에 참여했던 핵심간부들은 1952년의 소위 ‘공화국 전복음모사건’과 ‘미제의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대부분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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