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3) 중도세력과 좌우합작운동
  • (2) 미·소공동위원회 이전의 좌우합작 노력

(2) 미·소공동위원회 이전의 좌우합작 노력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움직임은 식민지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때로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더 크게 표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민족적 요구였다. 신간회운동, 민족유일당운동, 1940년을 전후한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 등은 이러한 민족적 요구를 수용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8·15 이후 좌우익간의 대립은 또다시 심화되었다. 민족국가의 수립이 지상목표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이남과 이북으로 나뉘어지자, 정치세력들은 외세와의 결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새로이 건설되는 국가에 관철하고자 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우익과 좌익이 모두 참여한 조직이었지만,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8·15 직후 정당간의 통합을 위한 노력은 건준이 해체되고 인공이 수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중도좌파를 대표하였던 여운형 계열의 입장에서는 인공 역시 정치세력을 통합하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조공이 인공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인공에 대한 우익세력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인공의 조직은 좌우익 정치세력의 분열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945년 10월 5일 梁槿煥의 중재로 열린 各政黨首腦懇談會는 좌우익 정치세력의 통합을 모색한 첫 번째 시도였다. 이 간담회에는 한민당(송진우·백관수·김병로), 국민당(안재홍), 건국동맹(崔謹愚), 인공(여운형·崔容達·許憲), 재건파공산당(李鉉相·金炯善) 등 4대 정당 대표들이 참가하여 대동단결의 문제와 초당적 자주독립을 추진하는 조직의 설립문제를 논의하였다.378)≪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6일. 이 회의에서의 쟁점은 인공과 임시정부의 위치와 관계 설정의 문제였는데, 당시 상황에서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10월 10일 국민당 등 32개 단체대표 50여 명은 각 정당 ‘緊急問題共同討論會’를 개최, 38선 문제와 일본인재산 처리문제 등을 토론하고 상설기관으로 ‘各政黨行動統一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한민당·조공·고려동지회·건국동맹 등 많은 정치단체가 참여하였다.379)≪매일신보≫, 1945년 10월 12일. 그러나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의 활동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결국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0월 23일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촉중협이 결성되자 조직을 해체하였다.380)≪조선인민보≫, 1945년 11월 16일.

 독촉중협은 이승만의 명망과 미군정의 지원으로 초기에 많은 정치단체들을 참여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승만의 반공적인 발언과 참여단체의 문제, 그리고 친일파 문제 등으로 인하여 좌익세력들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정치단체 통합을 위한 구심체로서의 힘을 잃게 되었다. 독촉중협이 좌우익세력의 합작을 위한 구심점으로서 힘을 잃은 또 다른 원인은 1945년 11월 말 임시정부의 귀국 때문이었다. 좌익 정치세력들은 반공을 주장하는 이승만보다는 중도좌파세력들이 참여하고 있는 임시정부가 좌우익 정치세력들의 합작을 위해 보다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좌익 정치세력들은 인공과 임시정부의 합작이 정치세력 합작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판단했다.

 임시정부의 고압적인 자세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인공과 임시정부의 합작을 위한 작업은 12월과 1월에 계속되었다. 인민당은 인공과 임시정부가 정부 부서에 절반씩 참여하는 형태의 합작을 제의하였고,381)인공과 대등하게 합작하자는 제안에 대해 임시정부는 ‘임정의 법통 승인, 임정의 부서와 요직 승인, 추가로 부서를 늘려 좌익이 차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거부하였다(≪자유신문≫, 1945년 12월 23일). 임시정부측에서도 김성숙·장건상 등이 ‘特別政治委員會’를 구성하여 합작에 나서기도 하였다.382)박태균, 앞의 글(1992), 122∼123쪽.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에는 임정과 인공이 解消合作하여 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기도 하였다.383)≪조선인민보≫, 1945년 12월 30·31일.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고압적인 자세와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 본격화된 좌우익 정치세력간의 대립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1946년에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반탁운동과 조공을 중심으로 하는 ‘총체적 지지’ 진영간의 대립이 한층 심화되었지만, 정당간의 합작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1946년 1월에 있었던 4당회합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당시 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당들이 통합을 모색한 모임이었다. 1946년 1월 6일 조공·국민당·한민당·조선인민당 등 4개 정당이 시국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모이게 되었다. 이날 모임에서는 신탁통치 문제의 대두를 계기로 발생한 국내 정계의 분열과 대립을 해소하고 3상결정의 진의를 파악함으로써 정계의 통일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384)≪조선인민보≫, 1946년 1월 8일.

 1월 7일에는 4대 정당 간담회가 열려 한민당에서 원세훈·김병로, 국민당에서 안재홍·白弘均, 조선인민당에서 이여성·김세용·김오성, 조공에서 李舟河·洪南杓 등이 참여했다. 이날 회의를 마친 후 4당의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 막부(幕府;모스크바, 필자주) 3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에 대하야

막부3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에 대하야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국제헌장에 의하야 의구되는 신탁제도)은 새로 수립되는 정부가 자주독립정신에 期하야 해결케 함.

2. 테로행위에 대하야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로 행동을 감행함은 민족단결을 파괴하며 국가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다. 건국의 통일을 위하야 싸우는 憂國之士는 모든 이러한 반민족적 테로행동을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모든 비밀적 테로단체와 결사의 반성을 바라며 그들을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각자 진정한 우국운동에 성심으로 참가하기를 바란다(≪조선일보≫, 1946년 1월 9일).

 4당회담에서 나온 공동성명은 외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좌우익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합의였다. 특히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됨으로써 야기된 분열과 갈등의 상황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1항에서 언급한 내용은 3상회의 결정서의 내용, 특히 결정서 3항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위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2항의 내용은 한민당 수석총무였던 송진우의 암살에 따른 정치세력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4당간의 공동성명과 공동보조는 한민당의 이의제기로 인하여 효력을 잃게 되었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다음 날 한민당은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공동성명 중 탁치문제에 관한 조항은 한민당이 견지해 오던 반탁정신을 몰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다.385)≪동아일보≫, 1946년 1월 9일. 한민당의 성명에 이어 국민당도 독자적 입장을 밝히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정치세력간의 합작논의는 무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6년 1월 9일 신한민족당이 새로 참가하여 5당회의가 개최되었으나 더 이상 이 회합은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1월 16일의 회의에는 한민당의 불참과 국민당의 반대로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4당회의의 결렬에는 조공과 임시정부의 독단적인 입장이 큰 역할을 하였다. 조공은 4당 공동성명의 내용이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총체적 지지’라고 주장하면서 한민당과 국민당의 분할적 인식-자주독립 보장 지지, 신탁반대-을 비난하였고, 임시정부는 이 회의를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던 비상정치회의의 예비회담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386)정병준,<1946∼1947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2), 11∼13쪽. 임시정부는 정식 참여자가 아니고 옵저버(observer)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정치세력 내부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입장은 한민당과 국민당의 불참 및 반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과 같이 8·15 직후부터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1946년 1월까지 계속된 정당간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많은 정치세력들이 해방된 공간에서 정치세력간의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부터 주어진 여건, 즉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과, 안으로부터 조성된 여건, 즉 임시정부의 법통 고수 및 반탁운동의 고양으로 인하여 정당간의 통일적 움직임은 더 이상 조성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정책과 지원하에서 이루어진 좌우합작위원회에 비하여 1946년 1월까지 진행된 정당간의 통합 움직임은 민족적 위기 앞에서 내부의 정서를 반영한 주체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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