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3) 중도세력과 좌우합작운동
  • (3) 좌우합작위원회

(3)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을 위한 움직임은 8·15 직후부터 시작되었지만,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를 둘러싸고 각각의 정치세력들의 진단과 처방은 제각각이었지만, 우익과 좌익의 분열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하지 못하고 휴회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은 8·15 직후부터 좌우합작을 통하여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당의 정치노선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그는 좌우익의 정치세력을 연합하는 것이 조선인민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였으며, 좌우익의 합작을 위한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1946년 2월 38선 이북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 민족통일전선에 대하여 의논했던 것도 좌우익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논의의 일환이었다.387)≪대한민국사연표(상)≫(국사편찬위원회, 1984), 20쪽.

 좌우합작을 우익의 입장에서 추진했던 김규식은 좌우합작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1946년 5월 이전에 좌우합작을 위한 움직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시기부터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좌우익간의 대립에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했던 임시정부에서 탈퇴하여 민주의원에만 참여함으로써 좌우익간의 대립에서 비켜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나선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통하여 극좌세력을 제외한 좌우익 정치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여운형세력의 거부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388)박태균, 앞의 글(1992), 136쪽. 미군정은 민주의원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민주의원의 효용성이 다했으며, 중도좌파 인사들까지 포함한 정치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시작되었기 때문에 민주의원을 곧바로 재편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연합을 구성하기 위한 계획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는 중에 계속되었다. 미군정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 정치연합의 조직과 함께 임시입법기구의 조직을 계획하였다.389)≪주한미군사≫2, 94∼95쪽. 표면적으로 좌우합작의 시도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46년 5월 말이었지만, 미군정은 이미 1946년 4월부터 좌우합작-입법기관으로 이어지는 정국구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요청에 대하여 미국무부는 ‘광범한 선거방법’으로 ‘현재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능가’하는 입법자문기구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였다. 특히 이 기구는 “좌익세력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현재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보다 모든 한국의 정치여론을 더욱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것이 국무부 지시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을 통해 “소련측에서도 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소련과의 협정체결 가능성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390)<국무부 점령지구 담당 차관보 힐드링이 육군성 작전처에 보내는 비망록(1946년 6월 6일)>(김국태 역, 앞의 책), 296∼299쪽.

 미군정은 곧바로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 입법기구 구성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이 선택한 정치인은 좌우합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도파 인물들로 소련도 받아들일 수 있고, 미군정과도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운형과 김규식이었다. 특히 미군정은 여운형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고, 좌우합작을 통해 조공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좌익세력을 분열·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운영되는 동안 여운형과 박헌영 사이에서 끊임없이 잡음과 갈등이 생겨났던 것은 미군정이 의도한 바였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당수로 있는 조선인민당이 좌익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대중 사이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다수의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좌파세력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또한 여운형이 민전 2차대회에 불참하면서 중도세력을 통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391)<주한미군 정치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보고(1946년 5월 14일)>(김국태 역, 앞의 책), 274쪽. 또한 1946년 초부터 나타나고 있었던 여운형과 박헌영 사이의 불화를 통해 조선인민당을 민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진행된 정치공작의 하나가 조선인민당으로부터 여운홍을 비롯한 세력들을 분리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인민당의 약화가 좌우합작위원회 참여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392)정병준, 앞의 글(1992), 18∼19쪽.

 김규식의 경우 미군정의 정책에 호의적이면서도 그 자신의 정치적인 이해를 위한 당파를 구성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군정은 그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그가 민주의원 내에서 유일하게 반탁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지도자였다는 사실 역시 소련과의 협의를 유리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은 “한국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지도자는 단지 극소수일 뿐”이며 “그 명단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김규식이라고 극찬하였다.393)<아놀드 소장과의 대담 비망록(1946년 10월 9일)>(김국태 역, 앞의 책), 353∼356쪽.

 이상과 같이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은 중도파 정치인이었던 여운형·김규식의 의도와 미군정의 정치적 의도가 일치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좌우합작위원회의 주체였던 3자의 정치적 의도가 同床異夢의 관계였지만, 좌우합작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될 수 있었던 기본적 배경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5월 말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6년 5월 25일 민주의원의 김규식·원세훈과 민전의 여운형·황진남, 그리고 미군정의 요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면서 좌우합작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394)≪동아일보≫, 1946년 5월 29일. 6월 14일에 열린 회동에는 황진남 대신 허헌이 참여하였다.395)≪조선일보≫, 1946년 6월 16일. 6월 22일과 26일에 다시 회합이 있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통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입장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좌우합작에 대한 지지성명은 좌우합작을 위한 시도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였다.396)≪서울신문≫, 1946년 7월 2일. 단독정부 수립과 관련된 발언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이승만이 합작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의 지지, 한독당의 지지가 이어지면서, 민전에서도 좌우합작이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전제 위에서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실질적인 본심에 상관없이 좌우익의 핵심세력들이 좌우합작에 대해서 지지성명을 발표하면서 좌우합작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점차 높아갔다.

 좌우합작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좌우합작에 가장 먼저 걸림돌이 된 것은 ‘입법기구’의 문제였다. 입법기구 설치는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기본적인 전제로 설정했던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6월 말 러취(Archer L. Lerch) 군정장관이 입법기관 설치안을 제출하고 미군정 사령관이 이를 찬성함으로써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목적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397)≪동아일보≫, 1946년 7월 10일. 그러나 한민당만이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을 뿐, 민전과 여운형은 입법기관의 설치에 대하여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입법기관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1946년 7월 초 민주의원과 민전에서 합작위원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각기 5명씩으로 구성된 합작위원이 결정되었다. 우익은 7월 7일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의 연석회의를 통해 김규식·원세훈·김붕준·안재홍·최동오 등 5명의 대표를 선발했다. 민전은 7월 12일 여운형·허헌·김원봉·정노식·이강국 등 5명의 대표를 선발했다. 이들은 7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5차례의 회담을 거쳐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정식회담은 1946년 7월 25일에 시작되었으며, 좌우익정당의 실질적인 대표들이 참여하여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연합이라는 틀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박헌영이 38선 이북을 다녀온 직후 조공의 좌우합작에 대한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좌우합작에 참여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5원칙을 내세웠다. 여운형과 김원봉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을 위해 박헌영이 내세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매진하되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할 것.

둘째, 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급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諸 기본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셋째,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팟쇼 반동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로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넷째,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로 즉시 이양토록 기도할 것.

다섯째, 군정자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조선인민보≫, 1946년 7월 27일).

 이러한 박헌영의 요구는 38선 이북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소위 ‘민주개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으로서 미군정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건이었다. 입법기구에 대한 반대 역시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계획하고 지원하고 있었던 기본적인 의도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는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던 우익 정치세력들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곧 좌우합작을 더 이상 지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헌영과 조공의 태도변화는 표면적으로는 38선 이북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의 지시에 의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좌우합작을 통해 좌익 내부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5원칙을 내세운 시기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던 신전술의 채택 역시 대중 동원을 통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가 겉으로 나타난 이유였다면, 좌익 내부의 주도권을 확립한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였다.

 좌익의 5원칙에 대해 우익은 합작운동을 실패로 이끌기 위하여 이러한 요구가 나왔으며 38선 이남에서 공산혁명을 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합작 8원칙을 제시하였다.

1.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소위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후 동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자주독립 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4. 임정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선에 의한 전국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

5. 국민대표회의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정부를 수립할 것.

6. 보선을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7. 정치·경제·교육의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할 것.

8.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으로 구성하여 처리케 할 것(≪독립신보≫, 1946년 7월 28일).

 우익의 8원칙은 좌익의 5원칙에 비하여 상당히 유화된 표현과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신탁문제, 친일파 처리문제, 토지개혁 등과 관련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긴 하였지만, 좌우합작을 처음 시작할 때 좌익의 입장으로 돌아가 본다면 위의 원칙 중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좌익의 5원칙이 발표된 상황에서 위의 8원칙은 좌익의 5원칙에 대하여 비판하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좌우합작위원회에 반대하는 우익의 입장을 보여주는 우익의 입장 표명이 되었다.

 좌익과 우익의 좌우합작 원칙을 둘러싼 대립으로 인하여 1946년 8월 말까지 좌우합작위원회는 1개월 가량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의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의 실세들이 불참한 채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좌우합작이라기 보다는 미군정이 처음에 구상했던 방식의 좌우합작위원회가 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는 8월 26일 좌우합작을 격려하는 친서를 김규식과 여운형에게 전달하였고, 9월 17일에는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398)≪동아일보≫, 1946년 8월 28일, 9월 18일.

 좌익과 우익의 5원칙과 8원칙 발표로 한 달간 휴회되었던 좌우합작위원회는 8월 22일 재개되었다. 그러나 좌익은 민전의 대표가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공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자리에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삼당합당을 둘러싼 대립으로 좌익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 체포령의 취소, 좌익신문에 대한 정간의 취소, 자유언론의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미군정 사령관을 만났지만 거절당했으며,399)≪주한미군사≫제2권 제2장, 122쪽. 조공은 9월총파업, ‘10월항쟁’을 강행하였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에 과도입법기구의 조직을 위한 계획을 제안하였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이 제안에 동의하였고, 미군정은 1946년 10월 1일까지 어떠한 결정이 내려져야 함을 요구했다.400)정병준, 앞의 글(1992), 60∼61쪽. 여운형은 북한방문을 비롯한 정치적 일정으로 입법기구 수립과 관련된 결정서에 대한 승인을 연장하였고, 여운형의 사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좌우합작의 7원칙이 공표되었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遞減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급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 급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급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로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독립신보≫, 1946년 10월 7일).

 합작 7원칙은 좌익과 우익에서 양보와 타협을 통해 만들어낸 중요한 성과였다. 특히 토지문제와 관련된 3항은 우익뿐만 아니라 미군정도 반대한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15 직후의 사회개혁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운형의 사전 동의문제와 함께 우익과 좌익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3상회의 결정서 및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된 1항과 2항은 반탁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임시정부와 이승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이었으며, 6항의 입법기구는 조공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서도 반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한민당은 토지개혁과 관련된 3항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한민당은 무상분배가 국가재정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하였다.401)서중석,≪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1991), 456∼476쪽.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미군정 사령관은 이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1946년 10월 12일 법령 제118호로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공포하였다.402)≪동아일보≫, 1946년 10월 9일. 그러나 소위 ‘10월항쟁’의 여파가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입법기구 창설을 위한 계획은 난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朝·美共同騷擾對策委員會’를 구성하고 당시의 소요사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403)≪동아일보≫, 1946년 10월 24일. 그러나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활동은 미군정 및 군정 내 한국인 관료들의 비협조로 인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소요사태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입법기구의 설치를 위한 선거가 강행되었다.

 1946년 12월 12일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하면서 입법기구 설치를 추진한 미군정의 의도는 관철되었지만,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여운형 등 중도좌파 인사들은 더 이상 좌우합작위원회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규식은 입법의원에 참여하였지만, 입법의원이 자신의 뜻과는 달리 우익세력들에 의해 움직여졌기 때문에 개혁적인 입법을 전혀 추진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입법기구가 설치된 이상 좌우합작위원회의 효용성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곧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해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에도 계속되었다.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비롯한 중도파 정치세력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위하여 좌우합작운동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세력확대를 위하여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과의 연합을 추진하기도 하였다.404)1947년 6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더불어 좌우합작위원회는 확대·강화를 모색하였다.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한독당 내 공위 참여파, 이극로 등 독립전선의 일부 세력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의 암살은 좌우합작운동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운형은 좌익의 대표 중 1인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중도좌파세력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민족자주연맹의 결성과 더불어 1947년 12월 6일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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